- 초자아, 이드, 방어기제
내가 어렸을 땐, 중국집에 짜장/탕수육 알뜰세트메뉴가 없었다. 아직 출시 전이었다. 그래서 형편이 넉넉하지 않은 집에선, 짜장면과 탕수육을 같이 시키는 일은 특별한 날 일 때에나 가능했다. 어쩌다, 탕수육과 짜장면을 동시에 먹을 때면, 탕수육을 실컷 먹은 후에 짜장면을 입에 가져갔다. 탕수육은 공동의 것이고, 짜장면은 나 혼자만의 것이기 때문에, 탕수육이 사라지기 전에 빨리, 최대한 먹어두고 내 몫의 짜장면은 천천히 먹자는 전략이었다. 이른바 <공유지의 비극>이다. 모두에게 개방된 목초지가 있다면, 자신의 사유지는 보전하고 이 공유지에서만 소를 방목해 공유지는 황폐화되고 만다.
어렸을 땐, 그랬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대체 왜 그랬나 싶다. 식탐에 눈이 멀어 걸신들린 것 같았다. 참으로 민망하고 부끄러운 과거이다. 다행히 지금은 그렇게 추잡하게 살지 않는다. 스스로의 욕구를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먹고 싶은 것을 먹고 싶을 때, 아무 때나 사 먹을 수 있는 소득도 있다. 다른 사람과 식사를 할 때엔 나만 너무 많이 먹은 게 아닐까 하며 먹는 속도를 조절하는 눈치도 생겼다. 나는 과거보다 더 나은 인간이 되었다.
만세! 나는 이미 훌륭한 어른이다. 타인을 배려할 줄 아는 인간이 되었다. 이것으로 되었다.
사실은 아니었다. 셋이서 치킨을 먹을 때, 닭다리를 집어 먹지 않은 이유는 닭다리를 좋아하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남을 먼저 생각하는 훌륭한 위인이어서가 아니었다. 타인의 시선이 두려워서였다. 나는 타인을 배려할 줄 아는 인간이 아니라, 남의 손가락질이 두려운 한심하고 나약한 인간이었다. 그래서 닭다리를 들지 않았다. 평판을 잃은 것이 두려웠을 뿐이다.
프로이트는 인간의 정신을 이드, 자아, 초자아로 분류했다. 이드는 쾌락의 원리의 지배되는 무의식의 영역으로 성욕, 식욕과 같은 원시적 욕구와 본능을 말한다. 자아는 현실을 고려하는 현실 원칙에 지배된다. 현실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하면서, 나를 인간답게 행동할 수 있도록 조절한다. 초자아는 도덕원리를 바탕으로 이드를 제압하는 좀 더 높은 자아를 말한다. 초자아는 보통 양심과 같은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신생아 시절을 기억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신생아들은 배고 고프면 울고 마려우면 바로 싼다. 본능밖에 존재하지 않은 상태이다. 좀 더 자라 유아기에 접어들면, 이드의 부산물로 자아가 떨어져 나간다. 엄마의 훈육으로 어떤 행동은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왜 그래야 되는지는 모른다. 어린이가 되고 나면, 이드의 부산물로 초자아가 생성된다. 사회도덕 규칙의 내면화된 표상이다. 부모와의 상호작용을 통해 초자아가 완성된다.
어린아이는 아직 초자아와 자아가 충분히 발달하지 않았고 본능에 충실했다. 그저, 탕수육도 짜장면도 많이 먹기만을 바랬다. 하지만, 어른이 되고서는 그러지를 않았다. 초자아가 그것은 도덕적인 행동이 아니라고 끊임없이 소리쳤기 때문이다. 식탐에만 몰두한 인간은 정상적인 사회활동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자아는 초자아의 의견을 수용했다. 나는 좋은 사람인게 아니었다. 훌륭한 사람이 아니었다. 내 안의 정신세계에서 자아는 쫄보였고 그렇기에 초자아가 우위에 있었다. 타인의 미움을 사지 않는 행동에 유인되었을 뿐이었다. 타인을 공격하지 않고 또한, 타인으로부터 공격받지 않은 삶을 추구했을 뿐이었다. 추가적인 이득이 없더라도 손해보지 않는 삶. 그것이 내 삶의 모토였다.
자아가 위협받는 상황에서는 무의식에서부터 방어기제가 올라와 나를 보호했다. 결과가 어찌 됐건, 나는 잘못한 것이 없다. 나는 틀리지 않았다. 저 사람은 원래 남 험담하고 괴롭히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다. 내가 이렇게 된 이유는 내 탓이 아니라, 세상 탓이다. 대게 스스로를 합리화했다. 이드의 위협적 충동이 발현되었을 때, 초자아가 반발하고 죄의식을 느끼지 않도록 그럴싸하게 포장하고 무마했다. 무의식적으로 발현되니, 실제로는 내가 그래왔는지도 잘 모른다. 인간의 정신세계에서는 자아, 초자아, 이드 간의 삼국 전투가 치열하게 벌어지고, 마지막에는 자아가 모든 상황을 납득 가능한 수준에서 정리를 한다.
방어기제는 의지가 부족한 나약한 사람들이 합리화 수단이 아니다. 인간의 정신력에는 한계가 있으며, 막대한 스트레스 상황에서는 방어기제를 통해 천천히 상처에서 회복하는 것이야말로 건강한 방식이다. 무의식이 주관하니, 내가 무얼 어쩔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 지식을 내 것으로 하면 일말의 죄책감을 조금이라도 덜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