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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보노 Jul 26. 2020

미안하지만, 네 고민은 아무것도 아니다.

- 칸트

고민이란 무엇인가. 마음속으로 걱정하고 애태우는 것이다. 걱정이란 무엇인가. 안심이 되지 않는 것이다. 일진이 나를 괴롭히고, 취업이 안되고, 애인에게 차이고, 회사 다니는 게 힘들고, 장사가 잘 안되고, 자식이 말썽 피우고, 가족이 큰 병에 걸려서 걱정과 고민을 한다. 걱정과 고민이 되는 이유는 생각이 되서이다. 생각이 되고, 나는 이유는 그것들이 인식되서이다. 인식되지 않았다면, 걱정하고 고민할 일이 없었다. 내 눈에 들어오고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사실은 인식과 인지의 문제이다.


과거의 사람들은 오감을 통해, 외부의 대상으로부터 정보를 추출하고 그것만으로 대상을 인식했다. 하지만, 칸트는 생각이 달랐다. 오감을 통한 정보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게 아닌 인간 특유의 체계로 재구성한 대상을 인식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것은 외부세계의 것이 아닌, 내 안의 세계가 구축한 것이다. 사과는 빨갛고 동그랗다. 내 눈이 그걸 봤다. 하지만 사과가 나한테 시각정보를 주고 내 눈이 시각정보를 경험해서 인식한 것이 아닌, 나의 인식체계가 이 대상을 이렇게 인식하도록 구성한 것이다. 칸트는 이런 생각을 하고 난 후에, 자기 자신의 천재성에 너무나 감탄한 나머지, 자뻑에 빠져 이를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고 칭했다.


지렁이는 눈이 없지만, 빛을 인지할 순 있다. 지렁이가 인식하기에, 나무에 매달려 있는 사과는 태양의 빛에 반사된 달과 같다. 지렁이는 사과의 진짜 모습을 모른다. 그리고 우리 인간도 사물의 진짜 모습을 알 수가 없다. 그 빨갛고 동그란 사과는 내 망막이 받아온 시각정보를 통해 뇌가 재구성한 모습에 불과하다. 칸트는 인식 외부에 있는 이것을 두고 <물자체(物自體)>라고 불렀다. 자체로서 존재하는 물(物)이라는 뜻이다. 지렁이뿐만 아니라, 인간도 물자체에 도달할 수가 없다. 그저 우리는 인간 고유의 형식을 통해 재구성한 세계로 보고 있을 뿐이다.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는 인간 고유의 형식을 통해 규정된 제약된 세계일 뿐이다.


한국어 개새끼가 욕이 된 이유는 우리 조상들이 가장 쉽게 볼 수 있는 망나니 생물체가 개였기 때문이다. 개들은 발정기가 오면, 눈이 뒤집혀서 근친상간을 한다. 개들도 본능적으로 혈연지간이 아닌, 다른 개들이 더 매력적이었겠지만, 방법이 여의치 않다 싶으면, 부모 자식 간에 남매간에 짝짓기를 한다. 그래서 개같은놈, 개새끼가 욕이 되었다. 과거에 개가 아닌, 고양이를 애완동물로 키워왔다면, 그 불명예는 고양이가 뒤집어쓸 뻔했다. 하지만 그건 인간의 관점이다. 개나 고양이들이 근친상간을 하는 것은 개입장, 고양이 입장에선 본능일 뿐이며, 선이고, 진리이다. 어쩔 수가 없다. 우리가 말하는 진리, 도덕, 이성 같은 것은 모두 인간에게만 한정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에게만 진리인 진리를 규정하고 진리를 한정할 수 있는 인간의 순수이성에 한계를 명확하게 그은 것이 칸트의 저작 <순수이성비판>이다. 


지렁이로 태어나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개로 태어나고 싶다는 사람은 가끔 있었지만, 그것이 개로 태어나 근친상간을 즐기고 싶다는 뜻은 아니었을 것이다. 인간의 관점에서 지렁이는 생태계와 토양에 아주 이로운 동물이겠으나, 먹이사슬의 최하층으로 곤충과 새들에게 끊임없이 잡혀 먹히는 가련하고 비참한 생명체이다. 고차원의 외계인의 관점에서는 우리 인간도 지렁이나 개와 다를 바가 없다. 12차원의 외계인은 인간들을 바라보며 생각할 것이다. 아니, 저 지구라는 행성의 인간이라는 종은 이 세계가 3차원이라고 생각한다고? 미개하다. 미개해. 그들은 우리를 한심해할 것이다. 어쩔 수 없다. 발정난 개에게 인간의 이성을 요구해봐야 먹혀들지 않는 것과 같다.


인간의 걱정이나, 근심, 고민 같은 것들은 하찮은 것들이다. 어린아이였다면, 칭얼대고 불평불만하는 게 자연스러운 행동이겠지만, 성인은 그렇지 않다. 지금 내가 하는 있는 걱정과 고민, 생각들은 전세계 80억의 사람들 모두가 경험한 것들이다. 그들은 똑같이 고뇌했고, 같은 포인트에서 좌절했지만, 결국엔 아무렇지 않은듯 살아간다. 걱정과 고민거리의 거의 대부분은 시간이 지나면, 결국 다 해소된다. 사실은 별 대수롭지도 심각하지도 않은 것들이다. 그냥 과민반응을 하며, 걱정하는 나에 취해 있을 뿐이다. 인식체계의 문제이다. 인간은 결코 물자체에 도달할 수 없고 그렇기 때문에, 완전하지 않다. 완전하지 않음을 스스로 인식하고 인식체계에 대한 커스터마이징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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