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다행이었나?
드라마를 보며 또 울고 있다.
작년 겨울에는 딸아이와 함께 SKY 캐슬을 보며 그렇게 울었는데
지금은 딸이 개강을 해 바빠진 터라 나 혼자 ‘열여덟의 순간’을 보고 있다.
그런데, 이 드라마가 또 내 마음을 미어지게 한다.
무슨 아이돌 그룹 출신인지는 모르지만, 사슴 같은 눈망울의 주인공 남자아이(옹성우 분)와
착한 마음을 가진 여주인공 소녀(김향기 분)가 만들어가는 순수한 사랑을 보고 있노라면,
우리 아이는 저런 걸 못해봤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미안해진다.
나는 큰 아이 4학년 때, 둘째를 임신했다.
갑작스러운 임신에 한창 재미있던 드라마 보조 작가도 그만두게 됐다.
서른아홉이라는 나이에 늦은 임신은 순탄하지 않았다. 결국 집에 드러누워 몇 달을 보내고,
다시 병원에 누워 한 달을 버텨 7개월 만에 둘째 아이를 낳았다.
큰 아이는 사춘기가 시작되며 갓난아기 동생을 만난 거다.
그 당시 우리 아이가 쓴 일기를 읽어보면 나름 동생에 대한 애잔함과 사랑이 넘친다.
하지만 가만 생각해보면 그 시절은 그렇게 아름답지 않았다.
나는 뒤늦은 출산과 육아에 지쳐 큰 아이에게 짜증을 많이 냈다.
여성이 갑자기 아기를 낳고 키우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우리 큰 아이는 완벽하게 체험했다.
종종 유모차를 끌고 큰 아이 마중을 나가기도 하고, 학교 행사에도 참석했다.
교문만 넘어서면 유모차로 달려오는 아이들, 아기가 예쁘다며 난리 법석이었다.
그 모습을 철이 잔뜩 든, 깊은 눈으로 바라보던 아이가 바로 내 딸이었다.
마치, 너희들은 아기가 뭔지 몰라... 여자의 일생을 몰라... 그런 느낌.
신문이나 TV 프로그램에서는 우리나라 남녀 아이들이 첫 경험을 하는 나이가 대부분 중학생이고,
일부는 초등학생도 있다고 했다. 아이고 무서워라. 나는 겁을 잔뜩 먹었다.
나는 딸에게 너 남자 친구를 사귀다 실수라도 하게 되면 엄마처럼 이렇게 아무것도 못 하고
아기만 돌봐야 한다고 저주를 퍼부었다.
어쩌면 연애도 시작하지 않은 아이에게 임신과 육아에 대한 공포심을 심어준 셈이 되었다.
그 때문이었을까, 우리 아이는 이후 남자 친구를 제대로 사귄 적이 없다.
딸은 가끔 남자 친구가 있는 친구들이 부럽다고 했다.
워낙 내신 경쟁이 과열되다 보니 동성 친구들끼리도 뭔가 불편하고
어려워지는 순간들이 종종 있단다.
농담으로 던진 "너 재수해라!" 한 마디에 분노로 몸이 덜덜 떨렸다고 한다.
" 너도 재수해!" 그렇게 둘은 평생 원수가 되는 시스템.
그 와중에 남자 친구가 있는 아이들은 은근 안정돼 보이더라는 거다.
점심시간에도 둘만 만나 급식을 먹고 조용히 대화를 나누던 친구 커플이 그렇게 부러웠단다.
물론 계단에 앉아 생각보다 진한 스킨십을 하는 모습을 보고 나서는
좀 놀라기도 했단다.
어쨌든 내 딸은 대학에 가서 남자 친구를 사귀면 좋겠다고 늘 생각했지만,
이 드라마 ‘열여덟의 순간’을 보니, 아, 저 순수한 사랑은 저 때뿐인데 하는 생각도 든다.
물론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래도 교복을 입고 저렇게 학교라는 울타리 안에서 서로에게 보내는 쪽지 하나,
낙서 한 장에 저렇게 설렐 수 있는 건 진짜 저 때뿐인데 말이다.
“아리야, 열여덟의 순간 OST 들려줘~”
하루 종일 울려 퍼지는 옹성우의 청아한 목소리, 차에서도 집에서도 같은 노래만 듣자,
우리 딸, 오늘 밤 나와 같이 이 드라마를 봐주겠다고 한다.
그렇게 함께 본 드라마, 그날 남녀 주인공의 뽀뽀 장면이 나오고야 말았다.
옆에서 우리 딸이 한숨을 쉰다... 나는 눈치를 보다 한마디 건넸다.
"옹성우같이 생긴 아이가 너 다니던 학교에 있기나 했니? 이제부터 찾아보자. 저렇게 사슴 눈깔을 하고 순수한 마음을 장착한 대학생 남자아이, 어딘가 있을 거야. 힘내! 우리 딸, 파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