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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스의 법칙

하트페어링에서 이혼숙려캠프까지

by 임지원

큰애가 졸업을 한다. 졸업논문을 제출하고 기숙사 짐까지 뺐다. 논문 제출과 기숙사 짐 빼는 일정이 하루에 다 몰려 있어 나도 함께 바쁜 하루를 보냈다. 그 짐을 다 차에 싣고 와 집에 풀어놓으니... 정신이 하나도 없다. 빨래의 지옥문이 열렸는데 날은 흐리고 간간히 비까지 내린다. 그렇다고 그 빨래를 그냥 쌓아둘 수만은 없어 세탁기를 몇 번 돌렸더니 베란다가 꽉 찼다. 건조기에 돌릴 옷들이 아니니 어쩔 수 없다. 빨래 돌리랴, 차에 실린 짐들 빼오랴, 포장음식이었지만 어쨌든 먹은 거 치우랴, 등등등 이거 다음 저거, 저거 다음 이거! 머릿속은 끊임없이 계획을 세우고 움직인다. 몸이 열개면 좋겠다. 너무 힘들다. 다리가 안 보이게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있는데 남편은 날 너무 믿는 건지 왜 저렇게 여유가 있어 보이지? 얄밉다. 내가 여유가 있을 땐 저런 모습도 대충 눈에 거슬리지 않았는데, 내가 과부하 상태가 되니 화가 난다. 억울해진다. 생각할수록 늘 저런 식이었다. 그래서 신혼 때는 지금보다 더 많이 싸웠다. "그러니까 엄마는 왜 아빠 같은 남자랑 결혼을 했어?" 큰애는 종종 이런 말을 했다. 어려서부터 우리 부부의 싸움 중재를 많이 했던 터라 결혼 안 하고 혼자 산다고 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다행히 연애도 하고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고 싶다고 한다. 하지만 아직은 그와 관련된 큰 사건이 없어 보인다. 대신 하트시그널, 솔로 지옥 등 연애 프로그램을 즐겨보는 거 같다. 나와도 종종 같이 본다. 수다 파티가 벌어진다. 마치 가상 연애를 하듯 이 남자는 별로다, 저 남자는 괜찮다. 저 여자 매력 있다 문제 있다 등등 가족끼리만 할 수 있는 편안한 대화를 하며 낄낄 웃는다. 재밌는 포인트는 출연자들이 서로 오해를 하거나 내가 좋아하는 상대가 다른 사람을 좋아하는 상황, 하여간 사랑의 작대기가 혼란 그 자체일 때다. 본인들은 속사정을 모르지만 시청자는 다 알 수 있으니 얼마나 재밌는지 모르겠다. 우린 이게 문제였네 저게 문제였네 하며 수다의 속도를 올린다. 하지만 반대로 모든 것이 결정 난 상태.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그저 우리 그냥 사랑할래요! 알콩달콩 할래요! 하면 갑자기 우린 조용해진다. 할 말이 없다. 난 아이가 저 모습을 부러워하나 싶어 눈치를 보기도 한다.


오늘 낮에는 오랜만에 둘이 현재 방송 중인 하트페어링이란 프로그램을 봤는데, 가장 주목받는 남녀 커플이 놀이공원 야간개장에 가서 데이트를 한다. 촬영 중이라는 걸 모를 리가 없는데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서로를 바라보며 좋아 좋아 어쩔 줄 몰라하는 표정이 생생하게 전해진다. 밤이라는 공간 속에 알알이 퍼진 불빛들이 아름답다. 동화처럼 신비롭기까지 하다. 그 모습을 보며 할 말은 이것뿐이다. 예쁜 사랑 하세요! 그런데 문득 딸의 눈빛이 아련해지는 것 같다. 사랑이라는 판타지에 몰입했나? 이 정도 가상 로맨스에 혹할 아이는 아닌 줄 알았는데... (이번에 쓴 졸업 논문의 주제가 영화 '헤어질 결심' 속 송서래의 네 번의 살인을 분석한 거 란다. 후덜덜) 로맨스가 무섭긴 무섭다. 지금 딸에게 필요한 말은 무얼까? 아주 잠깐 진지하게 고민을 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 말만 떠오른다. 그냥 해야겠다.


"엄마 아빠도 저거 다 했어! 놀이공원 야간개장 가서 손 잡고, 꿀 뚝뚝 떨어지는 눈으로 다정하게 바라보고!"

"아...!"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드나 보다. 마법에서 깨어나듯 현실에 눈을 번쩍 뜬다.


"저렇게 알콩달콩 하다가도 결혼하면 엄마 아빠처럼 싸운다. 알지? 봤지?

그리고 누구는 못 참고 이혼숙려캠프, 결혼 지옥 가는 거야. 로맨스의 법칙!"

“엄마 나빠, 엄마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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