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를 보다가...폭발했다. [경로를 이탈하였습니다]

지긋지긋한 모성판타지는 이제 그만

by 임지원

*스포일러 포함, 기사에 이미 나왔으니, 상관없을 듯.


단막극을 보면 설렌다. 순수한 열정 같은 게 느껴진다.

이 작품은 세상을 향해 뭘 말하고 싶은가!


X세대 엄마와 Y세대의 딸의 좌충우돌 로드무비라는 jtbc 드라마 [경로를 이탈하셨습니다]

이 드라마는 결혼식 당일 사라져 버린 남편(사위)를 찾아 딸과 엄마가 여행을 떠나

고군분투하는 이야기다.

내가 바로 X세대 엄마가 아닌가! 미디어는 나를 어떻게 보고 있나?

너무 궁금했다. 재미와 감동 두 마리 토끼를 잡았다는 기사도 봤다. 기대감이 차올랐다!


미혼모로 딸을 낳아 키운 X세대 엄마는 사사건건 딸의 행동이 마음이 안 든다.

뭐 하나 제대로 하는 게 없다고 한다. 생각해보니 나도 그렇다!

나에게는 뭐랄까 헝그리 같은 게 있었던 거 같은데, 딸에게는 없다.

아마도 내가 부지런히 채워준 구멍들 때문에 딸은 그렇게 됐을 것이다.

물론 타고난 시대적 환경 탓도 있을 거다. 난 사회학자는 아니지만, 대충 그럴 거 같다.

그저 나를 춥게 했던 그 매서운 바람 속에 딸을 세워두고 싶지 않아서 최선을 다했던 건데

이 드라마, 계속 나를 가르친다. 엄마들 제발 딸한테서 손 떼세요!

당신들의 과한 모성애가 딸을 망치고 있다고요!

엄마가 지겨워서 벗어나기 위해 이런 이상한 결혼을 하려고 하잖아요!


아! 그럴 수도 있겠구나. 착하게 반성을 해본다.


하지만 이 엄마, 의외로 딸의 결혼은 화끈하게 밀어준다!

X세대 엄마라면 노숙하며 소확행을 추구하는 사윗감 정도는

받아들여야 하는 모양이다.

하긴 내가 만약 이 드라마의 엄마처럼 요식업계의 큰손이며 동시에 부동산 투자로

큰돈을 만졌다면 한번 생각해볼 만하다. 사회적 스펙은 초라해도

내가 익히 최고의 신랑감의 조건이라 말한 유연함과 도덕성을 갖춘 남자라면

있는 재산 툭 떼어주면서 내 딸과 알콩달콩 소확행이든 더 큰 행복이든 어쨌든 행복하게만 살라고

할 수 있을 거 같다. 어쨌든 '내 딸을 먹여 살릴 수 있는가?'에 매몰될 거 같지는 않다는 말이다.

안타깝게도 나에겐 그런 재산이 없지만 그래도

내 딸, 밥은 안 굶기겠지! 하는 기준 하나 통과했다고 딸을 줄 생각은 없다는 거다.

이젠 그런 세상은 아니다. 그렇지! 그렇지! 착하게 공감해본다.


이제 슬슬 결론을 향해 달려간다. 물론 생각보다 그 과정은 재밌지 않다.

재미와 감동 두 마리 토끼를 잡았다던데... 재미는 아닌 거 같다. 그럼 감동은 있겠지!

좀 더 집중해보자!


사라진 신랑을 찾으러 다니는 여정 속에서

엄마에게 속마음을 털어놓고 막 으르렁대던 딸은 그 덕에 응어리가 많이 풀린다.

그리고 어떤 심경의 변화가 있었는지 힘들게 찾은 신랑에게 우리 헤어져! 이별을 선언한다.

신랑은.. 그러니까,

결혼 식장에서 도우미의 과도한 잔소리에 멘털이 붕괴되고

돈 많고 다정하기까지 한 장모님을 배신하는 날이 올까 봐 두려워서

갑자기 화장실 간다고 하고는 산속에 숨은 놈이다.

당연히 손절해야한다. 하지만 솔직히 결혼식장에서 이미 버려진 건 딸 본인이다.

이미 절로 들어가 있는 남자에게 이별을 고하는 장면이 왠지

"내가 찼어!" 세르모니같은 느낌이 든다.

올드하네... 암튼 그런 느낌이다. 뭐 어쨌든!


그런데, 여기에 큰 반전이, 딸은 임신 중이었다.

엄마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반드시 사윗감을 데리고 가고자 했던 것이다.


요즘은 피임약 광고도 세련되게 많이 하고 그러던데...

Y세대를 표방하며 결혼은 절대 안 하고 동거만 하겠다던 딸이었던 거 같은데,

게다가 대학원까지 다니는 고학력 여성이 노숙하고 배달하면서 결혼을 하기 싫다는

소확행 남자의 아이를 임신했다는 것 자체가 역시나 뻔하다. 올드하다!

여기서 그 올드함이 한 단계 업그레이드되는 놀라운 전개가 일어난다.

임신한 딸과 함께 너 죽고 나 죽자는 X세대 엄마?


왓!!


미혼모로 딸이 미혼모가 된다는... 뭐 그런 운명론적인 옛날 드라마 판박이 전개도

진짜 맘에 안 들지만 뜬금없이 모성애가 폭발한 딸은 아이를 낳겠다고 난리법석.

어쨌든 임신만 하면 하늘에서 모성애를 비처럼 내려주신다고 생각하는 거?

게다가 딸 하나를 키우며 사회적으로 성공해 부를 축적한 모성 지존의 엄마가

굳이 너 죽고 나 죽자고 할까?


킴 카다시안 패밀리를 보면 그런 생각이 든다.

여러 명의 남자와 여러 번 결혼을 하면서 여러 아이를 낳아 거대한 패밀리를 이루고 사는 그들만의 세상!

많은 사람들이 이들을 기괴하다, 손가락질하지만 난 은근 매력이 있더란 말이다! 누가 뭐래?

우리 패밀리는 숫자로도 스케일로도 막장 히스토리로도 절대 안 밀려요! 하는 듯한 느낌.

모계사회의 21세기 버전이다. 난 그들의 그런 당당함, 스웨그가 솔직히 부럽다.



이제 결말을 향해 달려간다.

다행히 엄마와 딸은 죽지 않는다. 그 일촉즉발의 죽음의 문턱에서

딸은 자신의 뱃속의 아이를 손바닥으로 보호하며 다시 한번 모성애를 폭발한다!

결국 딸은 결혼이 아닌 출산과 자신의 일을 선택한다.

오랫동안 언론고시를 준비하며 실패를 맛보던 딸이기에

그 짬밥을 살려 혼자 독립출판사를 차리고 엄마와 함께 아이를 기른다는 결말.

결혼을 선택하지 않는 것만으로 이 드라마는 최선을 다했다는 것인가?


그렇게 도착한 이 드라마의 마지막 장면이 충격적이다.

출산을 하고 엄마가 된 딸은 책상에 앉아서 글을 쓰고 있다. 독립출판을 해야 하니까.

아기는 천장에 매달린 모빌을 바라보며 울지도 않고 버둥버둥 잘 누워있다.

글을 쓰던 엄마는 모성애 뿜 뿜 하는 표정으로 잠시 책상에서 내려와

버둥대는 아기를 사랑스럽게 바라본다.

육아와 일이 병행되는 평화로운 순간을 기가 막히게 포착한 것.


왓!!!! 왓!!!!


강아지를 길러도 저렇게 평화롭지 않을 것이다.

방에 누운 아기는 식물인가? 인간인가?

나도 저런 장면을 보고 환상 속에서 아이를 낳았다가... 바로 현실 자각하고

완전 깜짝 놀라 돌아버렸던 육아의 생지옥이 떠올랐다!!


"저거 저거 또 육아에 대한 잘못된 판타지 심어주고 있네!!!"


심지어 아기 아빠는 여전히 소확행, 낭만 인생을 살며 배달통 가방을 가슴에 메고

휘휘 자전거 주행을 하고 있다!

왜 임신한 사실을 신랑에게 말하지 않냐는 엄마의 질문에 딸은 이렇게 답한다.


가족이 생기는 것도 두려운 남자한테 아이 임신한 얘기를 어떻게 하냐고.

왓!!!! 왓!!!! 왓!!!!!


엄마의 과도한 잔소리와 인생 개입이 짜증 나

노숙하는 남자와 사랑에 빠지고, 임신까지 했는데,

그 남자한테는 부담을 줄 수 없어서 여자 혼자 모성애 폭발해 출산하고

육아 생지옥에서 독립출판사까지 차려 자아실현한다고!?


이게 진짜 머선 일이고.

과연 누가 세상 무책임한 아기 아빠한테 그런 자유를 허락하는가 말이다!


미혼모의 딸이 미혼모가 되는 올드함!

하여간 딸이 혼전 임신만 하면 너 죽고 나 죽자는 올드함!

남자는 그래도 된다는 올드함!

육아 진짜 현실은 노룩 패스하는 올드함!


서른아홉에 늦둥이 둘째를 낳고 두 번째 육아 지옥에서 헤매고 있을 때

읽게 된 책이 있는데, 바로 엘리자베트 벡 게른스하임이라는 독일 할머니가 쓴 [모성애의 발명]이다.

모성애의 발견이 아니라, 발명!

나에게 닥친 상황을 사회학적으로 설명해주는데, 너무 공감되면서

왠지 모르게 배신감을 느끼게 되는... 페미니즘적인 책이다.

이 책에서 엄마와 딸이 서로 편지를 교환하는 형식으로 기록된 어떤 책의 내용을

소개하는 부분이 있다.


'어째서 엄마는 그것에 대해 경고하지 않았어요?...

엄마는 왜 내게 어머니가 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말해주지 않았나요?

의무나 책임에서 벗어나 아무 걱정 없이 마침내 다시 자기 자신으로 있고 싶은...

단 일주일만이라도 혼자 있거나 아이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 대화를 하고 싶은...

냉정한 소망은 꺼낼 수도 없지요.' ( Onken/Onken 2006, 11~12쪽)


결혼과 출산... 그리고 육아는 판타지가 아니다.

모성은 비처럼 내리는 것이 아니라, 끝이 보이지 않는 고통 속에서 피어나는 꽃이다.

더 이상 엄마 모성 판타지에 갇힌 올드한 드라마는 보고 싶지 않다. 지긋지긋하다!!

내 딸에게 어떤 영향도 주지 않았으면 좋겠다.


중간에 많이 지루했지만, 그래도 신선한 결말을 기대하며

끝까지 봤는데, 그냥 넷플릭스나 볼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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