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 좌절하다
"엄마, 나 망했어요."
낮에 아이에게서 카톡이 왔다. 밑도 끝도 없이 망했다니.
학교에 있을 시간이라 당연히 통화를 할 수도 없고
카톡을 보낸다고 해도 아이가 답장을 해줄 것 같지도 않았다.
머릿속에 온갖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반나절이 지나고 아이가 돌아왔다.
물어볼 틈도 표정을 살필 겨를도 없이 아이는 그 길로 제 방에 틀어 박혔다.
집히는 바가 있었다. 성적이 나올 즈음이었으니까.
고등학교에 올라왔고 특목고에 왔으니 대강 짐작할 뿐이다.
그래서 도대체 몇 등급이길래 이렇게 까지 나에게 카톡을 보낸 걸까.
얘는 왜 나에게 카톡을 보내서 환장하게 만들어 놓고 입도 뻥긋하지 않는 걸까?
혼자 틀어박혀 고민할 거면 나한테 왜 카톡을 보내냐고. 왜.
닫힌 아이의 방문을 보며 계속 생각했다.
그냥 둘 것인가 말 것인가.
용케 아이가 문을 연다고 해도 어떤 표정으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참 난감했다.
예민한 그 아이는 나의 분위기와 표정, 말투를 기민하게 알아챌 것이다.
내가 어떻게 반응하는지에 따라 아마 더 좌절하거나 혹은 다시 용기를 낼 생각을 할 수도 있겠지.
뻔한 위로를 건넬 것인가 누구나 알고 있는 뻔한 그 말을 훈계랍시고 해댈 것인가.
아니면 그냥 둘 것인가. 시간은 자꾸만 흘러갔고 내 마음은 썩어갔다.
가만 생각해 보니 큰아이는 실패나 좌절의 경험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제 잘난 맛에 살아왔던 그 아이가 더욱 충격이 크고 자존심이 상했나 보다.
일반고로 전학을 시켜야 할까
그냥 두면 자존감에 문제가 되지 않을까
내신 성적 때문에 대입에 문제가 되지 않을까
입시컨설턴트를 찾아가 봐야 하나
내 걱정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가정에 가정을 더해서 덩치를 키워가며 안 좋은 쪽으로만 밤새 이어졌다.
앞으로 이보다 더한 고난이 허다할 텐데 겨우 성적 때문에 세상 끝난 것처럼 좌절하다니.
너무 약하게 키운 게 아닌가 후회도 되고... 결국 또 내 탓을 하게 된다.
살면서 그나마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건 성적 밖에 없던데, 이게 가장 쉬운 것 중의 하나인데.
이만한 일로 약한 모습을 보이면 험한 세상 어떻게 살아가려고 그러나.
며칠 후, 큰 아이는 머리를 자르고 왔다. 정말 짧은 스포츠로.
삼손의 머리카락처럼 애지중지, 머리를 길러 펌을 하겠다고 벼르던 그 아이가 스스로 머리를 자르다니
아이가 크게 상심했었던 마음을 추스르고 뭔가 단단히 결심을 했나 보다 생각했다.
"엄마, 정대만 같죠?"
"어?"
아이는 뭔가 자신 있어 보이는 표정으로 거울 앞에서 머리를 매만졌다.
아, 일본 만화 <슬램덩크>에 나오는 그 정대만. 그래, 그 정대만은 심경의 변화를 일으킨 후 머리를 짧게 자르는 것으로 결심을 보였었다. 명대사 '농구가... 농구가 하고 싶어요.'
그러니까 너도 중대한 결심을 했다. 뭐 그런 거겠지?
잠시 기다렸지만 아이는 여전히 헤어스타일에만 집중할 뿐이었다.
기다림 끝에 나온 아이의 다음 말은 '헤어 왁스가 필요하다.'는 거였다.
벌써 극복한 거냐
무딘 거냐
그냥 잊고 살기로 한 거냐
너란 인간은 도대체 정체가 뭐란 말이냐. 배배 꼬인 나는 회심의 일격을 날렸다.
"네 머리 이수근 벌칙머리 같아. 신서유기에 나왔던."
엄마의 말이 뭔가 안 좋은 말은 같은데 감을 못 잡는 아이에게 핸드폰으로 위의 사진을 전송해 줬다.
가만히 다음 반응을 살피니, 금세 아이의 인상이 구겨졌다. 은근히 기분이 좋아졌다.
아이는 바로 내 핸드폰으로 사진을 전송했다.
"아니에요, 이거예요. 정대만 머리."
언제 또 이런 건 찾아놨는지. 개중 잘생긴 그림으로 잘도 골랐네.
이 정도면 아들의 자존감 걱정은 집어치워도 되지 않을까 싶었다.
"엄마, 다음 시험 잘 보면 슬램덩크 만화책 전부 사주세요."
아이는 그 말을 남기고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여전히 나의 의사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
한결같은 태도를 보이는 아이가 원래대로 돌아왔다고 기뻐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잠시 들었다.
그리고 선문답식의 아이의 말을 놓고 오늘도 깨달음을 구한다.
다음 시험을 잘 볼 수 있도록 노력을 다할 거라는 뜻일까 아니면 슬램덩크 만화책이 갖고 싶다는 뜻일까.
이 말은 좌절하지 않고 뭔가 해보겠다는 의지 같은 거라고 해석해도 되는 걸까.
매번 꿈보다 해몽인 듯 하지만, 좋은 쪽으로의 추측은 썩은 동아줄이나 지푸라기라도 잡고야 말겠다는 강력한 나의 의지다.
어찌 됐든 한편으로는 참 다행이었다.
아이는 상처를 받고 회복하고 좌절하고 극복하면서 굳은살이 박일 것이다.
어떤 고난이 와도 상처는 아물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될 거고
어떤 일이든 반드시 시간이 흐르면서 잊히고 무뎌진다는 것도 깨닫게 될 것이다.
아픈 만큼 성숙한다는 말은 진리라는 것도 깨닫게 되겠지.
그리고, 이번엔 며칠이었지만 점점 회복에 걸리는 시간도 단축될 것이다.
많이 괴로워하고, 많이 고민하고, 많이 생각하고, 많이 느껴보렴.
응원한다. 우리 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