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브레터>의 그곳, 북해도에 가다
내 청춘의 그 시절, 무척 감동을 받았던 영화 중 하나가 일본 영화 <러브레터>다.
영화도 영화지만 화면을 꽉 채운 그 설경에 꽂혀서 언젠가 꼭 홋카이도에 가봐야겠다고 결심했었다.
다만, 지금은 바빠서 안되고, 경제적인 여유가 없어서 곤란하고, 같이 갈 사람이 없어서 또 미루고.
그렇게 계속 시간만 흘러 지금에 이르렀다.
이번에는 가려는 쪽으로 집중했다. 지금이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하긴 했지만 역시나 흔들리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남편의 한마디가 나의 결심을 확고히 만드는 결정타가 되었다.
"무슨 삿포로야. 그냥 삿포로(일식집)에 가서 친구들과 사모님 정식(점심메뉴)이나 먹어."
"삿포로에 가서 사모님 정식이나 먹어."
웃자고 한말이지만 이 말은 나와 내 친구들에게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우리는 불끈 타올라 "당장 떠나자고!" 시전 했고, 여행계획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결국 나의 버킷 리스트의 한 자리를 오랫동안 차지만 하고 있던 그 소원은 드디어 실행되었다.
북해도는 패키지로 떠나기로
이번 북해도 여행은 나를 포함한 고등학교 친구 넷이 아이들 없이 가장 장기간 떠나는 여행이라 매우 큰 의의를 가졌다. 그동안은 아이들을 떼어 놓기도 어려웠거니와 떼어놓고 여행을 가더라도 아주 짧게, 그리고 아이들에게 무슨 일이 있으면 금방 달려갈 수 있는 거리로 잠깐씩만 자리를 비웠었다.
여행을 계획하면서 중점에 둔 건 영화 <러브레터>도 있지만, 겨울 온천 여행도 꼭 하고 싶었던 것 중의 하나였기에 두 가지를 중심으로 장소를 선택하고 계획을 세워갔지만 금세 벽에 부딪혔다. 가장 큰 문제는 그 눈 많은 곳에서 누가 운전할 것이냐 하는 것이었다. 비만 와도 운전이 거슬리는 마당에 눈이 엄청나게 많은 곳에서, 더구나 타국에서의 운전이라니. 선뜻 나서기가 부담스러웠다. 또한, 매 끼니 메뉴를 선택하고 식당을 찾아다는 것도 일이라면 큰일이다. 우리는 별로 맛집을 찾아다니는 쪽은 아니라, 밥은 그냥 끼니 정도면 되고, 대신 많은 관광지를 걸어 다니며 구경하는 것을 좋아하므로 그쪽에 초점을 맞췄다.
이런저런 상황을 고려했을 때 가장 좋은 선택은 패키지였다. 걷는 것은 좋지만 오래 걸을 수 있을까 자신이 없기도 했고, 관광지난 식사 메뉴를 선택하고 찾아다니는 것이 대단히 귀찮기도 했고. 이유는 무수히 많다.
이 선택은 여행 일정 내내 우리가 한 선택 중 제일 잘한 선택으로 꼽혔다.
얼마만의 패키지여행인지.
처음 해외여행을 가던 그때처럼 설렜다.
'NO'는 'NO'야
여행 일정 내내 우리는 우리가 하고 싶은 것에 집중할 수 있어서 행복했다. 이동과 밥은 알아서 살펴주니 우리는 진짜 본연의 욕구에 집중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끼니 걱정 안 해도 되는 것이 제일 기뻤다. (특히 방학기간이라 더)
일상에서 완전히 벗어나니 일단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지 않아도 되는 것도 좋았다. 그저 느긋한 자세로 흘러가는 시간을 즐기면 되니, 세상에 이런 호사가 없었다.
눈에 보이는 대로 즐기는 것, 시간이 주어지는 대로 하고 싶은 것을 즉시 할 수 있는 것,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자유였다. 물론 패키지의 특성상 많은 자유시간이 주어지지는 않았지만 간간히 주어지는 시간은 최대한 활용했고, 저녁식사 이후에는 보통 자유시간이므로 그 시간을 이용해 각자 자기만의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자유시간마다 거리를 구경하고, 먹고 싶은 것을 먹고, 사고 싶은 것을 사고. 어떤 것도 거칠 게 없었다.
우리의 총무는 'NO'하는 법이 없었다. 무슨 요구든 오케이봇처럼 오케이.
마치 "너 짬뽕 먹을래 짜장면 먹을래? 물었을 때 뭘 고민하나, 다 먹으면 되지!" 하는 것 마냥 무조건 만사 오케이. 덕분에 우리는 여행 내내 즐거운 간식 시간 및 휴식시간을 원 없이 즐길 수 있었다.
일상생활에서 'NO'만 빼도 마음이 편해지고 누군가 나를 위해준다는 느낌이 들어 훨씬 행복했다.
이전 여행들과 달라진 점도 있었다. 우리는 각자 자신의 시간을 즐길 줄도 존중할 줄도 알게 되었다.
이전에는 무조건 같이 왔으니 우리는 함께 붙어 다니는 게 맞다고 여겼다. 같은 것을 보고 같은 것을 즐기고, 사소한 일들까지 모두 같이 해야 한다고. 그것이 진정한 친구이며 우정인줄 알았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니 같이와 혼자의 구분을 자연스럽게 할 수 있게 되었고, 그것을 즐길 수도 있게 되었다.
조급해할 일도 반드시 같이 해야 하는 일도 없었다. 따로 또 같이의 시간을 보내니 스트레스도 덜하고 마음의 여유도 항상 충만했다.
그 덕에 나는 새벽에 온천에 갈 수 있었다. 친구에게 같이 가자고 묻거나 같이 있는 내내 대화에 신경을 쓰거나 할 필요가 없으니 나만의 시간에 집중할 수 있었다. 덕분에 홀로 노천 온천을 즐기며 몸도 마음도 힐링을 할 수 있었다. 뜨끈한 물에 들어간 몸은 노곤노곤해지고 반면에 머리는 찬 겨울바람을 맞아 정신 번쩍 나게 시원한 그 기분은 정말 이루 말할 수 없이 개운하고 산뜻했다.
북해도 새벽 온천의 눈 쌓인 풍경과 공기와 습도, 바람은 오래도록 잊히지 않을 것 같다.
북해도에서 패키지 투어 돌기 "간략 요약"
북해도는 항상 '눈이슈'를 염두에 둬야 했다. 눈으로 인한 도로 통제와 길 막힘이 다반사였다. 실제로 치토세 공항에서부터 발이 묶이기도 했었다. 그런 이유로 당연히 항상 기상체크 도로체크가 일이다.
눈과 함께 체온조절에도 힘써야 한다. 패키지라 관광지 안까지 차를 타고 편하게 이동했지만, 차에서 내려 관광지를 둘러보는데 걷는 곳이 꽤 되었다. 거기에 수시로 눈보라가 치고 바람이 부니 방수와 방풍, 보온에 각별히 신경을 써야 한다. 나의 경우, 우산보다는 따뜻한 모자와 핫팩을 요긴하게 썼다. 길도 정말 미끄러워 대비가 필요하다.
[우리의 북해도 여행코스]
노보리베츠-도야호수-오타루-삿포로-닝구르테라스-비에이-신궁-시로이코이비토파크 (온천 호텔)
패키지답게 참 많은 관광지를 도장 찍고 다니는 코스였다.
북해도에 관한 정보과 여행기는 매우 많으므로 간략한 정보만 정리한다.
노보리베츠 : 입구에 거대 도깨비상만 기억에 남음. 근처 온천 호텔에 숙박하기 전 들르는 코스인 듯.
도야호수 : 멀리 산보며 유람선 타고 한 바퀴 도는 코스.
유람선 겉모습이 옛날 동네에 흔하게 있던 궁전풍 예식장 같음.
비에이 : 정말 '크리스마스트리'라 이름 지어진 나무 한그루만 있음. 사진 찍기 신공 발휘 장소.
오타루 : 구경거리, 간식거리, 쇼핑거리, 예쁜 카페 모두 많음. 포토스폿도 많고 아기자기 볼 것 많은 동네임.
패키지 특성상 자유시간 두 시간 남짓 시간 보내다 감. 하고 싶은 것은 많은데 시간이 부족한 동네.
후라노 : 강원도 평창에 가면 볼 수 있는 스키 점프대 있음. 그 외엔 전무. 버스에 남아 잠이나 잘걸 후회함
삿포로 : 하루종일 도장 깨기를 하고 다녀 너무 피곤한 나머지 야간 외출을 시도조차 할 수 없었음.
시내를 지나는 중간에 시티투어를 위해 내려주기를 요청하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패키지 특성상 책임문제 때문에 숙소에 도착하기 전에는 버스에서 안 내려줌.
시로이코이비토 파크 : 먹을 것도 구경할 것도 많은 아기자기한 동화 마을 스타일. 거대 간식 상점.
흔히 면세점에서 보던 시로이코이비토 과자만 있는 게 절대 아님. 면세점이랑 완전 다른 쇼핑의 세계.
절대 값이 싸거나 하지는 않음. 몇 개만 담아도 십만 원은 일도 아님.
흰 수염폭포 : 물색깔 환상. 다리 위에서 내려다보는데.. 신비롭고 예쁨.
아오이이케 : 호수 색깔에 반해서 일부러 이 호수가 포함된 패키지 상품을 선택했는데, 일정 취소됨.
추위에 호수가 얼어붙었고 그 위에 눈이 수북이 쌓여 보이지 않는다고 함.
쇼핑센터 : 패키지 특성상 한 군데 방문. 한국에서 직구 많이 하는 흔히 알려진 상품 거의 다 있음
(클렌징폼, 동전파스, 카베진 등등) 그러나 일부러 쇼핑 안 해도 됨. 다른 사람들이 엄청 사니까.
북해도 신궁 : 신궁으로 향하는 소나무(?) 숲길과 마루야마 공원 너무나 좋음.
신궁 앞에 경주 십원빵 같은 주전부리 상점들 다수 존재. 그러나 대박 바가지임.
내 눈썰미 탓일 수도 있지만 다른 일본 신사들과 별 차이 없었음. 국화무늬만 빼고.
북해도를 다시 간다면
여행 전, 영화[러브레터]와 소설 [설국(雪国, ゆきぐに)](가와바타 야스나리, 川端康成)을 다시 읽고 떠나고 싶다. 유독 눈 덮인 정경에 꽂히는 나의 특성상 이처럼 아름답게 눈을 담아낸 것은 없는 듯하다.
이번 여행에서도 평생 볼 눈을 다 봤다고 할 만큼 북해도의 눈구경을 실컷 했지만, 그냥 '와 좋다' '예쁘다'로 끝내기에는 너무나 아쉬운 설국이었다. 다시 한번 읽고 가슴 충만하게 북해도를 느껴보고 싶다.
이번엔 초행길의 설렘반 두려움반에서, 두려움은 빼고 마음 편히 설국에 푹 빠져 조용한 여행을 하고 싶다.
또한 이번엔 여러 관광지 중, 시간이 부족해 아쉬움이 남았던 곳, 내 마음에 잔상이 남았던 곳 위주로 가보고 싶다. 오타루, 삿포로, 온천 료칸에서 각 하루씩 보내면 적당 할 듯하다.
그리고 꼭 '삿포로 눈축제'기간에 가고 싶다. 내가 갔던 때는 축제 전이라 눈 조형물을 만드는 모습만 구경했었다. 미완성작도 멋지던데 눈 조형물 가득한 눈축제는 얼마나 멋질까.
마지막으로 먹을 것. 이번엔 북해도의 다양한 음식들과 간식들을 먹어보고 싶다. 특히, 유제품.
먹는 것에 관한 한 새로운 도전은 안 하는 편이라 초행길에 그냥 패스해 버린 음식들이 많다. 찾아다닐 시간도 물론 안 됐지만, 줄 서서 기다려 먹는 것이나 맛집을 검색하는 일은 필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북해도의 우유와 아이스크림은 집에 돌아와서도 그 맛이 계속 생각이 났다.
좋은 사람들과 함께하는 여행은 삶을 풍요롭고 행복하게 만들어 준다.
이번 북해도 여행으로 당분간은 어떤 일이 생겨도 흔들리지 않을 만큼 충분한 충전이 된 듯하다.
다음 여행을 기약하며 건강관리도 체력 관리도 열심히 해 둘 생각이다.
아무 일 없이 보통의 날들을 보내는 화목한 가정이어야 행복한 여행도 가능하므로, 이 또한 노력할 예정이다.
돌아와 보니 가족들 모두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너무나 잘 지내고 있었다.
마중 나온 남편이 아이들과 보내며 있었던 기막힌 일들을 토로하기는 했지만, 얼굴을 살피니 그것도 아마 그들만의 즐거운 추억으로 남을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