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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 예술가들의 걸작을 보다

"비엔나 1900, 꿈꾸는 예술가들" 전시회 관람

by 앨리스 W Feb 22. 2025


브런치 글 이미지 1


유럽 미술사 혁명 이끈 걸작 총출동
에곤 실레와 클림트… 서울 온 '1900년 비엔나' 거장들

구스타프 클림트와 에곤 실레를 비롯한 오스트리아 출신 미술사 거장들의 걸작을 선보이는 ‘비엔나 1900, 꿈꾸는 예술가들’ 특별전이 30일 서울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막을 올린다. 
서양 근현대미술에서 가장 중요한 사조 중 하나인 ‘빈 분리파’ 작가들의 회화를 중심으로 세계 디자인 역사를 바꿔 놓은 빈 디자인 공방의 공예품 등 총 191점을 전시한다.




‘지금 보지 않으면 다시는 볼 수 없다(Now or Never).’


이 광고를 보고 주목한 지 몇 달 만에 거의 끝날 때가 임박해서야 부랴부랴 관람을 하고 왔다. 

나의 관심을 끌었던 것은 클림트와 에곤 쉴레. 한 번쯤 들어보았던 예술가의 이름을 들으니 괜히 친근함을 느끼고 그래서 가봐야 할 것 같았다. 이웃을 사귀었으니 친해지려면 그들을 알아야지. 


그림은 잘 모른다. 다만 나만의 시선과 느낌으로 그림을 감상하는 것을 좋아한다. 먼저 보고 설명을 읽어보는 재미는 또 얼마나 색다른지 모른다. 설명을 읽고, 여러 자료들을 찾아가며 하나씩 알아가는 재미는 꽤 흥미진진하다. 

 

오스트리아 레오폴트미술관에, 직접 빈에 가지는 못하더라도 가까운 곳에서 이렇게 오스트리아 예술가들의 작품을 볼 수 있는 게 얼마나 행운인지, 다시 생각해 본다.  


   




눈을 감으면 머릿속에서 1900년대의 오스트리아 빈의 거리가 거리가 만들어지고 그 거리에 그 시대의 사람들이 걸어 다닌다. 거리에 늘어선 카페에는 예술가들의 모임이 곳곳에 열리고 있다. 후원자를 만나기도 하고, 친구들과 담소를 나누기도 하고, 혹은 혼자 고독을 즐기기도 하며 각자의 시간을 의미 있게 보내는 중이다. 

그들은 무슨 생각들을 하고 있었을까.


그들이 보는 것, 듣는 것, 느끼는 것, 생각하는 것은 드로잉, 그림, 포스터, 우표 같은 것으로 만들어지기도 하고 컵이나 의자 같은 공예품이 되어 그들의 생활 속 일부분으로 자리하기도 한다. 



이름은 한 번쯤 들어본 화가와 그림들


정확히 알지는 못하지만 스치듯이라도 이름은 한 번쯤은 들어본 듯한 그런 예술가들이 있다. 

구스타프 클림트, 에곤 실레. 내가 아는 것은 이 이름과 유명한 그림 몇 점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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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스타프 클림트 [수풀 속 여인] (좌) , [큰 포플러 나무](우)

     

클림트의 그림은 화려하고 색감이 예쁘다. 멀리서 가만 들여다보면 기분이 좋아지는 진정 아름다운 그림이다. 그리고 가까이 다가가서 자세히 보면 또 다른 것들이 보인다. 그림을 채색하는 방법이 참 독특하다. 유화의 질감도 좋고 포플러 나무 잎사귀들을 붓으로 물감을 점찍듯 터치해 표현한 아이디어도 참 좋다. 멀리서 보던 색을 가까이에서 보면 다른 느낌으로 새롭게 보이므로, 거리에 따라 보는 맛도 있다. 



구스타프 클림트  [베토벤 프리즈] 1902구스타프 클림트  [베토벤 프리즈] 1902


클림트는 베토벤 9번 교향곡을 벽화로 그려내기도 했다. 음악을 시각화하다니 얼마나 놀랍던지. 

다시 보고 다시 듣고. 보면서 듣고. 반복하면서 재미가 점점 더 해지는 기분이었다. 

전시회장 한쪽에서 음악과 함께 벽화 영상들이 상영되고 있다. 


유화를 볼때면 붓터치를 따라 한번 만져보고 싶은 마음 굴뚝같았지만, 예술작품을 대하는 예의를 갖추고자 참았다. 손상되면 어쩔... 만지는 것, 진상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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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곤 실레/  [자화상], [어머니와 두 아이], [어머니와 아이], [자신을 보는 사람'(죽음과 남자)] 

                                         (맨 위 왼쪽부터 시계 방향 순)


보면 볼수록 참 신기하고 이상한 에곤 실레의 작품들이다. 분명 편하게 봐지지는 않는데 마성의 매력으로 자꾸만 눈길을 끄는 작품들이다. 보면서 자꾸 생각하게 되고 상상하게 된다. 


전시회장엔 에곤 실레의 자화상이 다수 전시되어 있었다. 에곤 실레는 본인을 탐구하고 분석하는 데에 상당히 집착적으로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그런 이유로 '자화상'이 많다. 아름다워 보이는 앳된 얼굴도 있었고, 괴물 같은 기괴함을 뿜어내는 것도 있었으며, 보기만 해도 굉장히 예민하고 신경질적으로 보이는 것도 있었다. 그 많은 자화상들 모두 드로잉이든 유화이든 간에 단 한 점도 평범하거나 단순한 것은 없었다. 구도도 색감도 선도 굉장히 특이한 방식으로 표현되었다.   


엄마와 아이를 그린 그림도 여러 점이 전시되어 있었는데 무척 기억에 남는다. 분명 누구나 짐작 가능한 평범하고 일반적인 관계인데, 전혀 일반적이지 않은 시선으로 담아낸 엄마와 아이의 특별한 모습. 

다소 기괴하고 음산한 듯한 느낌을 받는 그림을 계속 보다가 설명을 보니 에곤 실레는 엄마와의 관계가 순탄치 못했다고 한다.  


이 모자 관계에서 요즘 계속 싸워대는 나와 작은 녀석의 관계를 투영해 본다. 

작은 녀석의 머릿속에 나는 어떤 엄마이려나.  


집에 돌아와서도 내내 그림들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보통 사람들과 분명 다르기 때문에, 범상하기 때문에 거장이라 불리는 거겠지. 안다. 

그런데 도대체 왜? 어떻게?     

 


그들의 시대와 삶을 반영하는 작품


○1900년 빈, 그 아름다운 혁신

예술의 역사에는 ‘결정적 시공간’이 있다. 15세기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부오나로티 미켈란젤로는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르네상스 미술을 꽃피웠고, 렘브란트 판례인과 요하네스 페르메이르는 17세기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네덜란드 황금시대’ 회화를 일궈냈다. 19세기말 프랑스 파리의 클로드 모네와 동료 화가들은 인상주의를 남겼다. 그 뒤를 이은 곳이 1900년을 전후한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수도 빈이다. 이번 전시의 주인공인 클림트와 실레가 그곳에 있었다.
                                                                                            <한경잡앤조이>에서 발췌



1900년대 오스트리아는 유럽의 다른 강대국들에 밀려 내리막길을 걷는 중이었다. 불안이 만연하고 빈부격차가 커지는 우울한 사회에서 '분리파'라는 오스트리아의 예술가 모임이 조직되고, 그들만의 독창적이고 탁월한 예술 작품들이 폭발적으로 탄생했다는 것은 참 아이러니 하다. 

 

분리파의 선두에 선 사람이 당대에 이미 이름을 날리던 클림트라고 한다. 

그는 파격적이고 자유로운 예술활동에 적극적이었고, 후배 화가들을 발굴하고 지원하는 데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고 한다. 

그중 한 명이 에곤 실레였고, 에곤 실레는 어려서 아버지를 잃고 방황하던 차에 클림트를 만나 그림공부를 계속할 수 있었다고 한다. 에곤 실레는 스승인 클림트의 인정을 받아 자신감을 얻고 그림을 적극적으로 배웠으며, 종국엔 클림트와는 다른 자신만의 독창적인 화풍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구스타프 클림트와 에곤 쉴레의 이름을 듣고 그들의 작품을 보러 찾아간 거였는데, 그 당시 활동하던 다른 화가들의 작품을 보고 새로운 작가들(오스카어 코코슈카, 리하르트 게르스틀, 막스 오펜하이머)을 알게 되어 기뻤다. 물론 처음 접한 작가들이라 잘 알지는 못하고 그들의 그림들을 봤다. 이해하고자 설명도 열심히 읽었지만 아쉬움이 남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예술에 문외한인지라 감상에도 아직은 많은 공부가 필요하다. 


가기 전에 여러 관람객들이 올린 후기들을 많이 읽어봐서 대강의 순서나 전시품들을 알고는 있었다.

하지만 읽는 것과 내가 직접 보고 느끼는 것은 정말 천양지차가 맞았다.







처음 전시회를 찾아가 그림을 보게 된 것은 그저 색감이 좋아서, 예뻐서였다. 

아름다운 것을 보면 기분이 좋아지니까. 

주로 르누아르나 모네 위주의 고운 그림들을 보다가 점점 확장되기 시작했다. 

그림의 색감을 보다가 그림의 내용이 알고 싶어지고, 그 화가는 어떤 사회에서 어떻게 삶을 살았는지 점점 더 궁금해져 갔다. 그 화가에 대해 알아가다 보면 같은 시대를 살아가던 친구들의 이름도 나오고. 

그렇게 나의 예술 감상의 세계는 확장되어갔고 의미도 깊어졌다. 

이제 전시회나 미술관은 나에게 힐링의 장소가 되었다. 

마음에 맞는 그림들을 천천히 관람하면서 마음을 고요하게 만들고, 평정심을 찾고 기분을 전환한다. 


<비엔나 1900, 꿈꾸는 화가들> 은 제목부터가 아주 마음에 드는 전시회였다. 

지금도 보고 온 그림들 중 몇몇 작품들이 머릿속에 맴돌고 있다. 

한동안은 오늘 본 화가들의 여러 자료를 찾아 새로운 것을 알게 되는 즐거움에 바쁜 나날을 보낼 것 같다.  

새로운 것을 배우고 싶어 하는 것은 참 설레는 일이고, 삶의 활력이 된다.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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