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에 운동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다 보면 가끔 마주치는 민망한 장면들이 있다. 아파트 현관 입구의 붙어 있는 검은 실루엣. 여느 남녀라면 '좋을 때다'하고 지나치면 그뿐인데, 문제는 이들의 복장에 있었다. 딱 봐도 근처고등학교 학생이다. 왜 그들은 학교와 나이 식별이 단번에 가능한 교복이나 체육복을 입고서 남녀가 딱 붙어 민망한 상황을 연출하고 있는가다. 대부분은 고등학생인데 드문드문 중학생 커플도 심심치 않게 보인다.
하필이면 꼭 아파트 현관 입구에서.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이곳은 좀 그렇지 않나.
또 하나. 학생이, 미성년자가 막 뜨겁게... 이래도 돼???
그런데 이상한 것은 난 집에 가야 하고 그들은 애정을 표현에 집중하는 와중에, 왜 행위 당사자인 그들이 아닌 내가 죄지은 사람 마냥 후다닥 집으로 들어가야 하는가 하는 것이다. 왜 부끄러움은 내 몫인 거냐고.
분명 공공장소에서 애정행각을 하는 그들이 부끄러움을 느끼거나 어색해해야 하는 것 아닌가.
아... 아닌가?? 이 순간도 다시 헛갈린다. 쿨하지 못한 내가 미안한일인 건가.
애정행각이 법에 걸리는 게 아니긴 하지.. 그렇긴 하다만.
닉네임이 청학동인 아버지 밑에서 자란, 옛날 사람인 난 당최 적응도 이해도 할 수가 없다.
오늘도 불타는 청춘들을 아파트 현관 입구에서 발견했다. 심지어 세 쌍을. 아파트 한 동에 현관입구가 두 개씩 있는데 두 동을 지나 집으로 향하는 동안, 입구마다 찰떡처럼 붙어 있는 실루엣들을 발견한 것이다. 이 더운 날에 참... 그러고 싶니. 밤이라 어두웠으니 망정이니 꽤나 난감할 뻔했다. 제발 다른 데로 가라고!
내가 고등학생이었던 시절, 10대들에게 한참 인기 많았던 미국 드라마 [비버리힐즈 90210]가 있었다.
미국 고등학생들의 생활과 사랑과 우정 등의 내용을 다룬 드라마였는데, 나와는 너무 다른 그들의 일상과 인간관계들이 놀랍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해서 즐겨 보곤 했었다.
물론 잘생긴 남자 주인공도 시청률에 한몫했다.
일단, 그들은 복장부터가 예사롭지 않았다. 그들이 입은 형형색색의 옷을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쏙 빠질 지경이었다. 누구도 신경 쓰지 않고 거리낄 것 없이 자신만의 스타일로, 심지어 과감하고 화려한 색상도 서슴지 않고 패션에 반영하는 자신감이라니. 우리는 똑같은 교복에, 가끔 입는 사복은 다들 비슷비슷한 무채색 일색이었는데 말이다.
또한, 그들의 자유로운 사고방식과 다양한 일상생활, 폭넓은 생활 반경 같은 것이 신기하고 부러웠다. 그들은 모든 기준을 자신에게 맞췄다. 자신을 중심으로 호불호를 가리고 판단을 내렸고, 새로운 시도하는 것을 망설이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이 가고 싶은 곳은 차를 몰고 달려갔고 하고 싶은 일은 아르바이트를 해서라도 해냈으며, 이성교제도 자유로웠다.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좋아한다', '사랑한다' 표현하기도 했다. 우리학교는 이성교제 금지였다. 여고라서 그렇기도 했지만, 이성교제가 문제시 되던 사회분위기였다.
하나서부터 열까지, 드라마 속 비버리힐즈의 고교생의 생활은 나와는 완전 다른 세계의 이야기였다. 우리는 모두 분명 동시대에 살고 있었는데 말이다. 그래, 드라마니까, 미국이니까, 미국 고등학생이니까 그런 거다 여기며 더 이상의 비교를 강제로 멈췄다. 더 생각하다가는 획일적이고 규칙적인 내 생활에 파장을 몰고 올 수도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막연하게나마 들었었던 것 같다.
세월이 흘렀고 세상은 변했고, 세대가 달라졌다. 우리 아이들이 옛날 그 드라마 속 미국 고교생들의 마인드와 생활 방식 등이 비슷해지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교복은 입지만 교복 자체도 자신의 의지대로 변조하고, 화장을 하기도 하고, 이성교제에 제약이 있지도 않다. 자신만의 개성이 드러나는 헤어스타일이나 옷차림을 하는 데에도 거리낌이 없다. 고등학생들의 실내화를 관심 있게 보시라. 가만 보면 제각각 자신만의 스타일이 있다. 친구와 같이 먹는 음식도 만나는 장소도 우리 때와는 너무나 다르다. 난 카페는 대학 가서 처음 가봤다. 친구와는 분식집이지, 카페라니.
무엇보다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아이들의 사고방식이다. 이들은 더 이상 '같이'에 가치를 두지 않는다.
'같이' 보다는 '나' 위주의 대단히 개인적인 사고방식을 갖고 있고, 매우 자연스럽게 그것을 고수한다.
실상이 이러한데 무슨 이해를 하며 무슨 훈수를 두겠는가.
밤에 아이들이 집에 돌아왔을 때, 아파트 현관 입구의 커플들에 대해 말을 꺼냈다. 큰 아이는 자신의 학교에도 사귀는 친구들 많다고 했다. 사귀었다 헤어졌다가 다시 만나기도 하고 그냥 친구로도 지내고.. 등등.
아이의 얘기를 들을수록 청소년의 남녀 관계가 무엇인지 점점 미궁으로 빠져들었다. 친구면 친구고, 특별히 친하다면 절친이지 사귀는 건 뭐고, 사귀면 관계가 어떻게 변하게 되는 건지.
어차피 매일 보는 관계고 하루종일 거의 같은 시간을 공유하는 아이들인데, 그들 관계 정립의 경계와 기준이 무엇인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그래, 요즘 애들은 이렇구나, 세상이 변하긴 했어... 세대차이란 이런 거겠지.
현실은 어느새 할리우드구나. 할리우드야.
그래도 '우리 애는 안그래요' 마인드로 현관 앞 커플들과는 다르겠지, 안심하고 있을 즈음이었다.
"엄마, 000알죠?"
"어? 그게 누군데?"
"초등학교 때 같은 반이라서 엄마도 본 적 있잖아요. 엄마가 되게 예쁘다고 칭찬했었는데"
"내가?? 누구지?"
아이는 이 여자 아이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름을 말하는데 이름은 귀에 익었다.
사실 엄마에겐 말 안 했지만 초등학교 때 짝꿍이라 친하게 지내면서 사귀었단다. 그러다 00가 전학 가면서 헤어졌는데, 우연히 같은 외고에 입학하고 같은 반이 되면서 다시 만나게 되었다고 했다. 곧바로 서로를 알아봤고 절친이 되었다고. 평소에 별 말도 없던 아이가 주저리주저리 참 많은 말을 쏟아냈다.
그러니까, 네 말은 너와 여자친구, 둘 사이에 서사도 있고 인연도 있다는 얘기인거지.
"00가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대학교에 같이 가서 사귀재요. 지금은 공부할 때라고. 정말 생각이 깊죠?"
아이의 얼굴 표정을 보니, 누가 봐도 내 아들은 사랑에 빠진 게 분명했다.
아이는 일관되게 제 여자친구 자랑을 계속했다. 허나, 줄줄이 칭찬일색인 와중에도 사귀는건 아니란다.
도대체 친하게 지내는 거랑 사귀는거랑 무슨 차이가 있냐고. 어차피 같은 생활인데.
-학교에서 제일 예쁘고 지나다니면 좋은 향기가 나고
-자투리 시간 활용을 매우 잘해서, 배울 점이 많고
-자율학습할 때, 공부에 방해된다고 자기 핸드폰까지 00가 챙겨서 다른 곳에 놔두며 자기를 챙겨주고
-자기에게 농구를 조금만 하고, 공부를 해야 한다고 충고도 해주고
-자신이 학원 시간 때문에 밥을 굶으면 간식거리를 챙겨주기도 하고(둘은 같은 국어학원에 다닌다)
-같이 공부를 하며 서로 알려주고 선의의 경쟁을 하니 학습 효과가 좋다고
요약하면, 제 여자친구는 생각이 깊고 이해심도 많고 자기 관리도 잘하고, 철없는 우리 아들을 당근으로 달래 공부하게끔 이끌어주는 대단히 훌륭하고 야무진, 똑 부러진 여학생이었다.
이런 학생이 존재하다니 듣는 것만으로도 감탄을 금할 수가 없었다. 한편으로는 누구네집 딸내민지 그 엄마가 너무나 부러웠다. 정말 좋겠다. 말로만 듣던 엄친딸이라니.
한없이 부러워하다 문득 내 아들을 보니, 그렇게 못나 보일 수가 없었다.
-내가 공부에 방해된다고 핸드폰 가져오랄 땐 귓등으로도 안 듣더니
-내가 학원 사이에 먹으라고 간식 챙겨줄 땐 귀찮다며 신경질 내고 나가더니, 간식을 챙겨줘서 너무 고마워??
-내가 농구 좀 그만하고 공부하라고 할 땐 알아서 한다며 신경 끄라고 반항하지 않았니
내 아이의 말들이 머릿속에 지나가며 은근슬쩍 부아가 치밀기 시작했다.
같은 상황인데 상대방에 따라 이렇게나 해석이 달라지다니. 아들놈 키워봐야 소용없다는 말, 진리였다.
요즘 아이의 학교 생활, 학원 생활이 그 여자친구, 00으로 인해서 나날이 꽃밭이다.
아이는 오늘도 환한 얼굴로 아침 일찍 등교를 한다.
나가면서 내게 빨래를 부탁한다. 내일 꼭 갖고 가야 되는 체육복이라고.
"좋은 향기 나게 세탁해 주세요. 00가 요즘 에어컨 때문에 추워서 제 체육복 윗도리를 입곤 하거든요."
헐..... 잠시 시어머니의 며느리에 대한 질투가 이렇게 생기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나를 이용해 자신의 여자친구를 위해 주려는 아들놈의 괘씸한 발상.
하지만 곧 마음을 바꿔 먹었다. 그래, 이깟 빨래쯤이야. 얼마든지 해주겠다.
우리 아이의 인생에 귀인으로 등장하신 여자친구님이니.
안 그래도 하루종일 좁은 공간에서 공부에 매진하느라 몸도 마음도 지치고, 힘든 고교 생활을 마음에 맞는 친구와 더불어 서로 의지하고 도와주며 힘을 낼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하고 행복한 일인가.
적어도 우리 아이에게 그런 좋은 기운을 주는 친구라면, 정말 너무나 고마운 일이다.
이런 생각들을 하다 보니 한편으로는 걱정도 됐다. 우리 아이가 무척이나 그 여자친구를 좋아하는 데 혹시나 사이가 틀어지면 어쩌나 하는 걱정말이다. 그런 상상만으로도 이루 말할 수 없이 처참한 상황들이 그려졌다.
진정, 생각조차 하기 싫다.
내 경우엔 고교시절이 힘들지만 가장 행복한 시기였다. 지금 곁에 있는 친구들도 고등학교 때 친구들이고.
우리 아이의 고교시절도 비록 힘들지만 행복한 나날과 아름다운 추억으로 가득 채워지길 바란다.
더불어 그 여자친구도 우리 아이로 인해서 고등학생 시기를 더 즐겁고, 덜 힘들게 보냈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리고 간절한 당부의 한마디를 안 할 수가 없다.
00야, 제발 우리 아들 버리지 말아 줘.
네 덕분에 우리 애가 말도 사람처럼 하고, 정신 차리고 공부하는 것 같기도 해.
혹시라도 너랑 사이가 멀어지면 대단히 큰일이 날 것 같아. 진심으로 부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