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 기운이 떨어진거냐 철이 든 거냐
인디안 썸머(Indian summer)
북아메리카 대륙에서 발생하는 기상 현상을 일컫는 말로,
늦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기 직전 일주일 정도 따뜻한 날이 계속되는 것을 말함.
예전 영화 중에 [인디안 썸머] 가 있었다.
처음 듣는 생소한 '인디안 썸머'라는 단어에도 호기심이 일었지만, 더 중요한 것은 한 번에 내 눈길을 사로잡아 버린 포스터였다.
간단힌 줄거리 정도만 기억이 나는, 내겐 그리 임팩트 있는 영화는 아니었다.
오직 내 머릿속엔 박신양. ㅎㅎ 당시 대세였다.
그리고 영화보다 강렬하게 기억에 남아 있는 단어 '인디안 썸머'
몇 번의 비슷한 날씨를 맞이할 때마다 생각했다.
누가 계절과 날씨를 가리켜 어떻게 인디안을 떠올리고 연관 지어 볼 생각을 했을까.
누군지 정말 대단하다. 아... 나는 뭐지?
내게 '인디안 썸머'는 오랜 고생 끝에 모처럼 반짝 찾아온 평화로움을 뜻한다. 가뭄 끝의 단비랄까.
모처럼의 여유를 느끼며 생각한다. 아, 사람 죽으란 법은 없구나.
매일을 전쟁처럼 지지고 볶고 온종일 긴장하며 살아내는 것은 녹록지 않은 일이다.
공사다망하고 역동적이며 전혀 예측 불가능한 사춘기 아들 두 녀석을 내 생활의 베이스로 깔고,
그 외에 나를 둘러싼 모든 사람들에게서 발생하는 사건 사고들이 더해진다.
보통은 예측들이 가능한 사건들이고, 하나씩 해결해 나가면 힘은 들지언정 큰 문제가 될 건 없다.
하지만, 내게 있어서 가장 큰 스트레스는 떼로 밀려드는 예측 불가능한 것들이다.
올해 들어서는 유독 다방면에서 사건 사고는 넘쳤고, 생각지도 못한 복병들까지 줄줄이 이어지고 있다.
그 숭한 놈들을 맞이하여 이거 빼서 막고 저거 빼서 막고, 간간히 정신 승리로 나를 다독여가며 버텨낸 날들이었다. 아이들 여름방학을 거치고 추석을 맞아 정점을 찍은 그 숭한 것들은 내가 파멸되기 직전에 서둘러 '인디안 썸머'를 시전 했다.
일주일 정도의 평화가 지속되고 있다.
다치는 놈도 없고, 독하게 성질을 부리는 놈도 없으며, 학원에서도 내가 알아야 하거나 개입해야 할 만한 정도의 문제가 발생했다는 연락이 오지도 않는다.
아이들은 내가 묻는 말에도 짧게나마 착하게 대답도 하고 있고, 심지어 한 번에 대답을 하기도 한다.
학교에도 잘 다니고 있고, 중간고사 대비 기간이라 예민한 상태지만 나름 열심히 시험 대비 중이다.
아이들이 왜 갑자기 변화된 모습을 보이는 걸까?
설마, 철이 든 것은 아닐 테고. 새로운 시위 법인가 생각도 해봤지만 그것도 아닌 것 같고.
학교 가고 스터디 카페 가고 학원 보충들을 다니느라 너무 바빠서 성질을 피우거나 할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게 아닌가 잠시 생각했지만, 또 그것만이 이유는 아닌 듯하다.
그렇다기엔 아침저녁으로 마주하는 아이들의 눈빛이 순둥순둥했기 때문이다.
피곤에 찌들었지만 아련하게 착한 눈빛이랄까, 순수한 눈빛이랄까.
그렇다고 살가운 대화가 오가거나 하는 일도 없다. 그저 서로 간에 침묵과 안쓰러움이 묻어나는 시간이다.
아무튼 그냥저냥 아무 일도 없는 날이 계속되고 있다.
아이들은 참으로 알쏭달쏭한 미지의 생명체구나... 이런 말을 가끔 중얼거리며 하루를 보낸다.
덕분에 마음에 평화가 찾아와 커피맛도 느끼고, 생활에 관련된 생각들이 아닌 '딴생각'도 하고 모처럼 '나'에 집중하는 중이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모처럼 좀 즐겨볼까나.
처음엔 마냥 좋더니 이제는 슬슬 불안함을 느낀다.
언제 다시 느닷없이 뒤통수를 갈기는 듯 한 충격적 사건이 발생할 것인가.
이런 불안증은 캐캐묵은 것들이다. 내 오랜 배냇병.
이참에 정리도 좀 하고 다음 라운드를 준비해 둬야겠다.
즐길건 즐기고 가능하다면 여유도 좀 저축해 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