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수현 Sep 21. 2022

나는 한라산 정복자

등산보다 하산의 어려움을 몸소 배우기 까지.

결국에 나는 성판악을 올랐던 나의 과거의 기억을 미화시켰고, 그 끝내 다시 정상에 올라보고자 이번에는 과감하게 관음사코스를 선택해 다시 날을 잡게 된다.

이름하여 2022.7.26 한라산 정복의 날이다.


한라산 하면 백록담인데 정상에 올라 백록담을 보지 못한 것이 끝내 아쉬움이 남았다.

첫 한라산의 설렘이 만들어 낸 좋은 기억이 나를 다시 백록담으로 이끌었고, 그래서 이번엔 너무 더워지기 전에 올라가 보자고 남자친구와 서둘러 날을 잡았다.


이전의 첫 한라산 등반의 시작이 갑작스러운 한파주의보였다면, 이번 한라산 등반의 시작은 갑작스러운 폭염주의보였다. 그래도 한라산의 올라가는 길은 오히려 서늘하다는 후기를 많이 읽었기 때문에 큰 고민 없이 가보자고 결정했다. 날씨뿐만 아니라 지난번과 달라진 것이 있다면 성판악 코스가 아닌 관음사 코스로 올라간다는 것이었다. 워낙 힘든 구간이 많다는 것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어차피 올라갈 한라산이라면 풍경이 더 예쁜 코스로 올라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선택했다. 하지만 새벽 택시를 타고 가면서 기사님과 대화를 나누며 괜한 선택이었나 하는 생각이 뒤늦게 들긴 했더랬다. 본인도 안 올라간지는 수십 년이 됐지만 관음사 코스는 정말 각오하고 올라가야 한다고 진지한 얼굴로 말하시는 그 타이밍이었다. 나는 쿨하게 "근데 풍경은 두배로 예쁘다고 하더라고요~ 천천히 조심해서 잘 올라가 봐야죠~"라고 했지만 속으로는 쫄았던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럼 뭐하나 이제 오를 시간인데.


역시 모든 등산의 처음은 설렘으로 인한 아드레날린의 폭발로 시작되는 듯했다. 역시나 풍경은 예뻤고, 날씨 진짜 완벽하다 라는 말을 계속하며 올라갔다. 첫 번째보다 사진을 덜 찍었지만 오히려 여유로웠다. 관음사 코스는 확실히 성판악 코스와는 다른 풍경이었다. 큰 바위를 건너서 지나가야 하는 구간도 있었고, 큰 계곡을 지나는 다리도 많았다. 이때까지는 관음사 코스로 와보길 너무 잘했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다리를 지나 천국의 계단을 맛보기 전까지는 말이다.

첫 번째 천국의 계단.. 아니 지옥의 계단이라고 하면 누구나 공감할 계단을 시작으로 가파른 계단의 연속이었다. 계단을 오르다 허벅지가 터질 것 같으면 쉬고, 또 허벅지가 터질 듯 오르다 쉬고를 반복할 수밖에 없었던 무한 계단 오름의 연속이었던 등산. 그렇게 계속 올라가다 중간중간 현 위치를 알려주는 지도를 보게 되는데 이게 난이도 중 코스라고~? 더 올라가면 상 코스가 있다고~? 하며 올라갔다. 분명 정상까지 절반은 왔는데 앞으로의 구간 난이도가 상이라니 그 또한 그렇게나 괴로움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도 높이 올라가니 풍경은 환상적이었다. 힘듦을 잊을 만큼의 풍경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물론 잠깐씩이었지만. 구름이  발아래에 있다는 경이로움과 대자연이 주는 광활함과 가슴  트이는 시원한 바람까지. 쥬라기공원의 한 장면과 같은 한라산의 모습에 우와를 남발하며 올랐다. 그러다 도착한 삼각봉 대피소는 정말 아름다웠다. '한라산에서만   있는 풍경' 확실했다. 깎아지르는 뾰족한 돌산에 우거지게 자라난 나무들, 산의 굴곡은 정말 이루 말할  없는 아름다움이었다.

내가 오른   가장 멋진 풍경이었음은 자신 있게 말할  있다. 삼각봉에서 조금 쉬었다  풍경을  삼아 다시 정상으로 올랐다.

그때부터였을까. 정말 극한의 지옥을 맛보았다. 오르고, 또 오르고, 오르고, 또 올랐다. 계단이 미친 듯이 많았고 대체 정상은 언제 나오는지 가도 가도 끝이 없었다. 그러다 뒤를 돌면 또 아름답고 그랬다.


그렇게 힘들다가 정신 줄을 놓을 때쯤 정말 갑자기 정상이 나왔다.


",  왔다."

정상에서 내려다본 물이 고여있는 백록담. 정말 환상 그 자체였다. 오르는 길에 하산 중인 사람들이 "오늘 물 고여있어요! 힘내세요!" 해주었기 때문에 물이 있다는 건 알았지만 그게 이렇게 아름다울 줄은 또 몰랐지.

그렇게 오른 정상은 해와 가장 가까이 있구나 싶을 만큼 뜨거웠지만 그래도 자리 하나 잡고 신발을 벗어던지고 힘들게 짊어지고 온 컵라면과 삼각김밥을 먹었는데, 와 이게 이렇게나 맛있다고? 올라왔을 때의 힘듦은 싹 씻겨나갈 맛이었다.


그렇게 정상을 구경하고, 사진을 찍고, 조금 휴식시간을 가지는데 다리가 확실히 문제가 있구나 싶었다. 일단은 발바닥과 발목이 너무 아팠고, 더 최악은 왼쪽 무릎이 너무 아프다는 것이었다. '내려갈 때 죽어나겠다.' 나는 내 미래를 이미 알고 있었다.


더 쉬면 제시간에 못 내려가겠다는 오빠를 따라 하산길에 오르기 시작했다. 초반부터 망했다 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발목과 왼쪽 무릎이 너무 아팠다. 내리막을 한 발 디딜 때마다 왼쪽 무릎에 찢어지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고 발목은 후들거려 금방이라도 주저앉을 것 같았다. 게다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올라올 때 생각보다 물을 많이 마셔버린 터라 내려갈 때 마실 물을 많이 남기지 못했다는 것이 큰 문제였다. 내려갈 때는 체력적으로 더 지쳐있기 때문에 물을 조금 더 챙겼어야 했는데 심각성을 깨닫고 조금 더 빨리 내려가 보자고 아픈 다리를 더욱 재촉했다.


올라가는 길과는 다르게 내려가는 길에는 오빠와 정말 대화 몇 마디 나누지를 않았다. 무릎이 너무 아파 한 걸음에 한 신음소리를 내느라 말할 기력도 없었고, 오빠도 내가 생각했던 것 그 이상으로 지쳐 보여서 말을 걸면 큰일 나겠다 싶었다. 그렇게 내려가는데 정말 죽을 맛이었다. 중간중간 무릎이 아파 도저히 못 내려가겠는 몇 순간들이 있었는데 그럴 때마다 쉬는 순간 못 일어나겠다는 생각에 쉬는 시간을 줄여 내려갔다. 어느 순간부터는 내 다리가 내 다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고통만 있는 통나무가 된 느낌이랄까. 한계는 이미 넘었고 제정신이 아닌 그 언제 쯔음, 돌계단에 앉아 쉬고 있는 부부를 보았다. 부인 분이 다리가 아픈지 주저앉아 있었고, 남편분은 조금 체력이 남아계신지 부인 분의 다리를 주무르며 마사지해주시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 모습을 보니 마음이 몽골몽골 해지면서 계속해서 정색하고 있던 얼굴도 미소로 풀어주고 좀 쉬고 가고 싶은 타이밍이 있었는데, 때마침 타이밍 좋게 이미 나와 같이 한계를 넘어선 얼굴을 한 오빠가 아플수록 빨리 내려가야 한다고 시간이 더 걸리겠다는 말을 해서 사실 속으로는 굉장한 오기가 생기기도 했다. 그래 쉬긴 뭘 쉬어. 미친 듯이 내려가자 생각하고 이를 꽉 깨물었다. 이것이 힘들어서 오는 짜증인가, 아파 죽겠는데 재촉하는 남자친구에서 오는 짜증인가. 어쨌든 짜증이 나긴 했는데 이게 힘이 드니까 그런 짜증도 힘이 나야 내는 거구나 싶었다. 아 지금은 짜증의 이유를 생각해서는 안 되는 순간이구나. 오빠나 나나 절체절명의 순간이구나. 물이 없으니 정말 목이 말라와서 정신이 아찔해졌기 때문에 정말 내려가는 것에만 집중했다. 그때부터는 정말 좀비처럼 내려가기만 했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오빠가 재촉하지 않고 쉬었다면 내려가는데 시간이 더 많이 걸리긴 했을 거다.


가도 가도 끝이 안 보이고, 다리는 쥐가 나고, 발목과 무릎은 이미 돌이킬 수 없을 것만 같고, 목은 말라서 정신이 혼미해지는 상태로 2시간 정도를 내려갔다. 정말 죽겠다 싶을 때 '한라산은 여러분을 사랑합니다.'하고 출구가 보였다. 조금만 더 늦게 출구가 보였다면 아마 난 주저앉아 울었을 거다.  

나중에 다 내려오고 나서 오빠는 미안한 마음이 들었는지 그때 화났었냐고 물으며 기분이 나빴으면 미안하다고 사과를 했다. 내가 표정이 안 좋기는 안 좋았나 보다. 서운한 마음이 들고 짜증 난 건 사실이었지만 그냥 힘들어서 그랬던 거라고 말하며 웃었다. 사실 그렇게 짜증이 났다는 사실도 내려와 편의점 얼음컵에 파워에이드 가득 채워 들이키고 나니 그저 웃겼다. 무엇보다도 오빠도 나만큼이나 힘들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다 이해가 됐다. 인간은 극한의 상황에서 그 사람 내면의 본능이 드러난다고 하니 그럴 만도 했다. 무사히 내려오고 나니 내려올 때 들었던 안 좋은 감정들은 다 필요가 없더라. 그냥 이 힘든 여정을 함께 무사히 마쳤음에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등산보다 하산이 훨씬 힘든 일이라는 걸 뼈에 새기며 한라산 정복의 여정을 마무리했다.


너무 아름답고 감격스러웠던 관음사 코스의 한라산 풍경. 그때의 여운을 다시 느끼기 위해 찍었던 사진을 보고 또 보고 자랑을 엄청 했다. 나는야 한라산 정복자.

하지만 최소 5년은 앞으로 관음사 코스로 한라산 갈 일 없을 거라고 오빠한테도 말해뒀다.

하이리스크, 하이리턴 이걸 주식 시장에서 느꼈어야 하는 건데... 나는 한라산에서 느끼게 됐다.

인생은 등산이라고 하던데, 내 인생이 한라산은 아니길 바라며.

그래도 너무 즐거웠던 한라산 정복자의 길. 이제 여한이 없다.



작가의 이전글 나는 한라산 정복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