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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연우 Oct 22. 2024

오이를 씹는 동안

                                              _남연우



B2 버튼에 빨간 불이 켜지고

중력보다 가파르게 승강기가 하강하는 동안

아침을 규칙적으로 씹는 소리 들린다     


맷돌을 갈듯

껍질과 알맹이 섬유질이 잘게 부서지며

싱그러운 녹즙을 내어주는 그 소리     


작은 새가 

나뭇가지를 옮겨 다니며 나뭇잎을 뒤척이는 소리

어스름 푸른 새벽 싸락눈이 내리는 소리


A4 용지 오타 난 글자를 쓱쓱 지우며

파래 붙은 갯바위를 살며시 돌아나가는 썰물이 되어

3층 2층 1층으로 흘러내린다    

 

버터 바른 식빵과 달걀 바나나의 무음을 

꿀꺽, 삼킨 아침은 차라리 전투적이다    

 

현관문을 나서며 급히 집어넣은 오이 한 조각이

바람막이 점퍼를 여며 잠근 지퍼같이

오늘 하루 창가에서 넝쿨을 뻗어 

균형 잡힌 타원형 열매를 맺을 수 있다면    

 

술병 뚜껑에 고일 만큼 미량의 즙을 짜내어 

해독하는 그의 식물성 저작음은 

컨베이어 벨트를 가동하는 억압에 대한 

서글픈 서사,     


지하 2층 버튼 불이 꺼졌다

오이를 다 삼킨 그는

사거리 좌회전 방향지시등을 켜고

신호대기 중        







       

어제 아침노을, 때로는 아침노을이 저녁노을보다 강렬하다..

아침 엘리베이터에서

먼저 타고 내려온 이웃 분이 입안에 삼킨 야채를 씹는 소리가

싸그락 싸그락 싸락눈처럼 들립니다

경건한 저음조 새소리 같기도 하고

지난밤 지운 오타 같기도 하고

어금니 사이에서

약간 저항하며 부서지는 물기 많은 그 소리

단박에 오이란 걸 알아챘죠

용기 있는 소리 같았어요

나라면 입 다물고 뭉기적거렸을 텐데..

반면 영양가 있는 음식은 소리가 잘 안 납니다

현관문을 나서며 급히 집어넣은 오이 한 조각과 함께

바람막이 점퍼를 채우는 지퍼같이

쭉쭉 자라올라

오늘 하루 알맞은 성과를 거두어들이길,

자유의지에 반해 때로는 기계적인 출근길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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