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한여름의 붉은 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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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연우

▶▶ 이 이야기는 1949년 8월 15일부터 1954년 4월 30일까지 제 청년 아버지가 4년 9개월 간 국가의 부름을 받고, 군 생활을 하면서 온몸으로 겪어낸 6.25 전쟁의 전 과정을 생생한 증언으로 기록한 수기입니다. 특히 2년 6개월에 걸친 이북에서의 포로생활을 낱낱이 들려줍니다. 약관 스무 살 청년의 시각으로 바라본 6.25의 참상을 있는 그대로 알림으로써 전쟁이 평범한 개인의 청춘을 어떻게 관통하고 지나갔는지 그 단면에 아로새겨진 화인의 시간을 되돌려 현장감 있는 목소리로 증언하고, 자유 대한민국의 영토가 어떤 희생의 대가를 치른 후에 지켜지고 번영을 누리게 되었는지를 올바로 인식하는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 <암호명 겨울비>는 20부로 게재됩니다.



유월 장마가 시작되려는지 개미들의 행렬이 삐뚤빼뚤 마당귀를 가로질러 검은 점선을 긋는다. 몽당연필을 갓 잡은 어린아이처럼 직선도 곡선도 아닌 흔들리며 움직이는 선은 출발을 시작한 이상 힘이 실린 의지를 갖고 앞으로 나아간다. 맨 앞에 앞장서서 무리를 이끄는 선두부터 페로몬을 분비하며 이정표를 만들어가는 그들의 길은 일사불란하여 대열의 마지막 행군이 종료될 때까지 이탈자가 나오지 않는다.


습도에 예민한 개미들은 저기압 상태가 되면 좀이 쑤시는 관절 마디를 바지런히 움직여서 살던 구멍을 버리고 안전지대로 피난을 간다. 거인의 눈으로 더 가까이 들여다보면 각자 이고 지고 짐 보따리가 매달려있다. 최소한의 양식을 싣고 가느라 안간힘을 쓰는 모습은 우리와 별다를 바 없다. 유비무환을 본능적으로 알고 실천하는 개미보다 못한 인간들의 피난 행렬을 나는 빗속에 서서 처절한 심정으로 바라본 적 있다.


1949년 8월 15일, 나는 스무 살의 나이로 보병 8사단 사령부 병참 중대에 입대하였다. 모진 신병훈련을 거쳐 이듬해인 1950년 4월에 사단 내에 있는 포병 18대대로 전속되었다. 전속된 지 2개월째인 6월 25일은 일요일이었다.

장맛비가 내리는 아침 고참병들의 입에서 오늘은 외출이 없고 38선 부근 상황이 어수선함을 얘기하고 있었다. 식사 후 알 수 없는 긴장감이 돌고 있던 오전 9시경 사단 내 전체에 비상사태가 하달되고 완전무장으로 출동 준비하라는 명이 떨어졌다. 준비가 끝나 집결지에 모이니 벌써 보병부대가 군가를 부르며 주문진 쪽을 향해 북진하고 있었다. 우리 포병부대 선임자로부터 38선을 넘어 북괴 인민군의 남침으로 155마일 전 휴전선은 붕괴되고, 우리 포병도 주문진 북쪽 방향 사천지구로 출동한다는 것이다.

새벽 봉창 두들기는 소리보다 더 급박한 전황 소식에 모두 깜짝 놀라 수런거린다. 그런데 보병 1중대가 보이지 않는다. 알고 보니 1중대는 어둠을 타고 밤새 묵호항에 상륙한 인민군 토벌작전에 임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놈들의 기습남침으로 인민군이 벌써 주문진 북쪽 연곡 지방에 침투하고 있었으므로 우리 부대도 연곡 지구로 출동하였다. 연곡에서 한 발 더 전진하여 사천으로 가니 고참병들은 아군 전투기가 북괴군을 전멸시키는 전과를 올려 곧 북진의 길이 열릴 것이라고 한다. 전쟁의 비참함을 모르는 나로서는 전세가 호전된다는 소식에 마음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여기 보선병들은 일정 때 쓰다 남은 구식 총을 들고 선로를 지켰다고 하지만 대포 부대원인 나로서는 포의 위력뿐만 아니라 탄알 장착하는 모습조차 구경을 못 해 봤다. 이래서는 적과 교전하는 마당에 싸움 한 번 제대로 해보겠나. 같이 근무하는 고참병에게 사정을 하니 가보고 오라는 하명을 받았다. 포진지로 가서 사격하는 후방에 서서 잠시 구경했다. 예상했던 대로 포탄의 중량 때문에 두 병사가 함께 들고 포구에 장착하면 포수가 OP(전방관측소)의 지시를 받고 하명하는 포대장의 외침 따라 방아쇠 격인 줄을 힘껏 뒤로 당긴다. 마침내 포연을 내뿜으면서 검은 포탄이 포구에서 튕겨 나간다.

당시 포병은 보병 8사단 18대대가 최강자요, 장교 병사에 이르기까지 대부분 월남한 이북 동포들로서 공산주의에 치를 떨고 광복과 함께 부모 손에 이끌려 38선을 넘어왔다. 나름대로 포부가 있고 이북 출신끼리 단합이 잘 되어 사지라도 뛰어드는 용맹심으로 이름을 떨치는 부대였다. “중대 십 발”하면 야포 3문에서 포당 10발을 연속 쏘았다. 적의 집결지 혹은 적이 점령한 고지가 관측되면 가차 없이 집중포화로 적을 섬멸하는 작전술이다.


아군의 포진지는 사천 강변에 구축하고 남하하는 인민군과 대치하고 있었다. 피난민의 대열은 끝없이 이어지고 그 피난민 중에 고정간첩이 있다는 첩보가 들어왔다. OP에서 “중대 십 발”의 명령이 하달되어 포수들은 정신없이 포탄을 장착하고 있는데 진지 전방으로부터 밀짚모자를 눌러쓴 농부 차림의 중년 남자가 갑자기 뛰어들더니 밀짚모자를 벗어 흔들면서 “포 쏘지 마시오, 아군 다 죽습니다.”라고 외친다. 순간 포대장은 급박하게 돌아가는 이 상황에 사격을 중지시켰다.

OP에서는 왜 포사격을 중지하느냐면서 빠른 사격을 재촉한다. 이때 민첩한 포대장의 기지로 밀짚모자의 주인공인 남자를 체포해서 포대 내 정보과에서 뒷조사를 하니 이 자는 간첩이었다. 아군의 포사격으로 벌떼처럼 밀려오던 인민군의 대열이 흩어지고 사상자가 엄청나게 발생하자 이 간첩은 누구의 지시랄 것도 없이 자발적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놈은 현장에서 처형했으나 전세는 밀리기 시작했다.

인민군이 쏜 박격 포탄이 우리 진지 앞 초가집에 명중하자 초가지붕이 하늘 높이 솟고 적의 선두가 바로 코앞에 와 닿는 것 같다. 용맹을 떨치며 38선 부근 공비토벌에서도 무공을 세운 포병 18대대의 용사였지만 적의 기습공격에는 적잖이 놀랐는지 적의 포탄이 눈앞에서 작열하는 순간 후퇴 명령도 하달된 바 없건만 단독으로 차를 몰고 달아났다. 이 사실을 안 중대장의 지시로 지프차는 원래 자리로 되돌아왔다. 그 광경을 지켜보는 내 가슴도 불안심으로 요동친다.


군사기밀 작전을 수행하는 군에서는 통신술이 제일 먼저 발달한 곳이지만 쓰리고다 차에 무전기를 설치하고 모스부호를 타전하는 통신수단이 전부였다. 포부대의 통신병으로 재배치된 나는 가설된 통신망이 단선되지 않을까 싶어 연결된 통신선을 항상 점검한다. 만약 통신선이 단선되면 전체 포부대와 OP와의 연락이 두절되어 포사격을 할 수 없다. 그렇게 되면 통신병 중에서도 보선병의 책임 피할 수 없게 된다.

밤길을 혼자 보선을 하면서 정신없이 뛰어다닌다. 이때만큼은 전쟁의 공포를 벗어나 적군이 매복해 있다는 생각 따윈 끼어들 틈이 없다. 오직 나만 총을 소지하고 있고 나를 대적할 상대는 이 야밤에 없다는 자신감과 책임감으로 사기가 충천되어 있었다. 저만치 길 옆에 인민군 사체가 전날 내린 하얀 눈을 뒤집어쓴 채 꽁꽁 언 땅에 사지를 뻗고 있었다. 그런 주검들이 또 얼마 못 가 널려있었다.

그 와중에 동행했던 전우가 파카 한 점을 주워왔다. 신병인 그 전우는 예의 바르게도 고참병인 나에게 귀한 그것을 건네주었다. 유엔군이 입던 군복을 처음 보는 나로서는 그 옷의 특별함에 이끌려 사양하지 않고 받아 입었다. 속에 털이 박혀있어 우리 군복 위에 껴입고 보니 정말 따스하다.

전우에게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통신대로 돌아오니 나의 직속 장교가 내가 입고 있던 옷에 눈독을 들인다. 어디서 주웠느냐, 참 좋다고 하면서 자기가 입고 있는 야전 외투와 맞교환을 요구한다. 이 야전 외투는 아군 장교들이 입고 다니는 옷으로 국방색 겉옷 안에 털이 박힌 안감이 이중으로 되어있었다.

몇 번의 교환 요구가 있었고 나로서도 장교복이 싫지는 않아서 마침내 서로 맞바꾸어 입게 되었다. 상대는 소원풀이라도 한 것처럼 무척 좋아한다. 나보다 체격이 큰 그가 입으니 몸에 딱 맞아서 보기에도 좋았다. 반대로 내가 입은 외투는 크고 펄럭거려 끈으로 허리를 졸라매고 뛰어보니 불편하기만 하다. 그러나 누가 알았겠는가. 이 외투가 중공군에 포로가 되어 북으로, 북으로 끌려갈 때 그 무서운 추위로부터 나의 생명을 구해줄 것이라고는 감히 짐작도 하지 못했으니. 참으로 고마운 옷과의 인연이었다.

행군한 지 3일째 되는 날 밤, 사단 본부를 뒤로하고 대관령을 넘게 되었다. 비는 왜 그리 많이 오는지 아흔아홉 굽이 대관령을 넘을 때 처참한 피난민의 행렬을 목도한 후 처음으로 이것이 난리요, 전쟁이구나 싶었다. 머리에 이고 등에 지고 어린애까지 안고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살길을 찾아 굽이굽이 돌고 있는 광경은 하늘의 눈물이 아니었다면 쏟아지는 슬픔을 감추기 어려웠을 것이다.

우리 부대는 대관령을 넘어 진부에 주둔하고 3일을 대관령에서 버티다 후퇴했다. 안동 풍기 땅에 이르러 죽령재 상봉에서 휴식을 취한 후 OP와의 연결을 위해 통신선을 지고 10m 정도 갔을 때 “꽝”하는 소리에 놀라 뒤돌아보니 작전용으로 타고 다니는 쓰리고다 차에 포탄이 명중하여 차가 박살이 나고 포진지에 괴뢰군의 포사격이 집중되어 포연이 아수라장을 방불케 하였다.

위기에 이르러 용감해진 우리 전 포대원들은 이 틈을 타고 포차를 구해냈다. 재를 넘어가니 점심 식사를 운반하던 노무자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밥통은 밥통대로 사과 궤짝은 궤짝대로 모두 산허리에 뒹굴고 있었다. 맛 좋기로 유명한 소백산 자락 사과도 전쟁의 방아쇠를 피해 갈 수는 없었나 보다. 그로부터 우리 포병은 다시 대구로 후퇴하여 곧바로 김해 대저 국민학교로 이동했다.


한 달여간 신병을 인도받아 교육하고 재편성하여 안강 전투에 투입됐다. 낙동강을 끼고 싸우는 포항 전선이 무너지면 부산 함락은 물론 남한 전체가 괴뢰집단의 마수 안에 들어갈 수 있는 백척간두의 위기 상황에서 낙동강 칠백 리가 붉은 피로 변했고, 둥둥 떠내려가는 사체는 참혹한 전쟁을 증명하듯 포성이 고막을 찌르는 이상한 시간의 강물 위로 실려 갔다.

송장 썩는 지독한 냄새와 함께 목도하고도 믿지 못할 끔찍한 살생의 풍경 안에서는 단지 목숨을 몇 초 살려놓는 긴박함과 절실함 외에는 그 어떤 것도 끼어들지 않는다. 내가 살면 네가 죽고, 네가 살면 내가 죽는 극과 극의 소용돌이 속에 몇 날 며칠이 지나갔다. 드디어 우리 부대에 북진 명령이 하달되었다. 맥아드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적의 주력부대가 괴멸됨으로써 북진, 북진 38선을 넘어 평북 덕천지구에서 적과 대치하게 됐다.


약 7일간의 전투가 계속되는데 난데없이 국군의 패잔병이 나타난다. 말인즉 선발대가 초산까지 진격하였는데 갑자기 나타난 중공군의 전쟁 개입으로 원부대가 전멸되었다는 비보를 전했다. 그로부터 며칠 후 우리 부대에도 후퇴 명령이 하달되었다. 이 후퇴작전에서 우리 포병 1중대가 중공군에 포위되어 많은 병력 손실을 보았다. 내 고향 출신 우리 동기생 대여섯 명도 이때 전사하였다. 이것이 1.4 후퇴로 우리는 충북 땅까지 후퇴했다.





6.25전쟁 발발 전 사진(필자 변별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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