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일이 있어도 별일이 아닌 듯
자기 전에 아이들에게 읽어 줄 책을 고르고 있었다.
잘 골라야 했다. 두 아이가 모두 좋아해야 했고, 너무 유치하지도, 어렵지도 않은 책이어야 했다.
독일어와 영어에 비해 한국어 수준이 떨어지는 아이들이 한국어 책에 대한 흥미를 잃지 않도록 잘 골라야 했다.
<달길>
전에 한 번 읽어 준 적이 있었던 <달길>이라는 책이 보였다.
갓 알에서 깬 거북이가 엄마의 편지를 읽고 '밤하늘 가장 빛나는 곳'을 찾아 떠나는 여정이 그려진 책이었다.
셋이 누워서 편안하게 읽기에 딱 좋은 책이었다.
글밥이 많지 않았지만, 그림이 따뜻했고, 무엇보다 아이들 둘 다 좋아했다. 한 번 읽었던 책인데도 읽어준다고 하니 싫어하는 기색이 없었다.
달빛을 따라 바다로 가야 하는 거북이는 밝게 빛나던 가로등을 따라 그만 도시로 가게 된다.
그러면서 벌어지는 거북이의 도시 탐색, 바다로 무사히 돌아오기까지의 모험이 그려져 있는 귀여운 내용이다. 드라마틱한 사건은 없는데도 행여나 거북이가 다칠까 봐 약간은 숨을 졸이며 끝까지 읽게 되는 그런 책이었다. 우리 셋은 그렇게 한국어로 책을 읽으며 거북이를 함께 응원하며 따뜻한 마음으로 하루를 마무리할 수 있었다.
나에게는 달빛을 따라 꿋꿋하게 살아가는 친구가 하나 있다. 언젠가 서점을 열고 싶다던 그 친구를 난 중학교 2학년 때 만났다.
'별일 없지?' 하고 물으면 언제나 '응, 별일 없어.' 하고 대답하는 친구. 별 일이 있어도 내색을 안 하고 별 일이 아닌 듯 잘 소화하는 친구에게 별일 없냐고 묻는 건 사실 소용없는 일이다.
나라면 큰 일을 저렇게 잘 감당해냈을까 싶은 일을 언제나 잘 버틴 후에 별 거 아니라는 듯 얘기해주는 친구. 사소한 일에도 화를 내고, 혼자만 힘든 양 난리를 치는 사람들이 많은 세상에서 친구를 보면 갑자기 밤 바닷가에 서서 파도 소리를 듣고 있는 듯 편안해졌다. 별 일을 모두 파도에 실어 보낸 듯 그저 조용히 앞으로 나아가는 친구는 달빛을 따라 바다를 찾아가는 거북이와 닮았다. 느려도 결국 바다를 찾아가는 거북이.
3년 전, 그 친구를 따라 처음 가 본 독립서점에서 <달길>을 발견했다. 친구가 소개해 준 그 서점은 후암동에 있는 '스토리지북앤필름'이라는 독립서점이었다. 해방촌에서부터 동네 구경을 하며 한참을 걷다 보니 나타난 이 서점은 작지만 예뻤다.
책방지기의 취향대로 선별되어 책방 곳곳에 진열되어 있던 책들은 대량 판매를 목표로 편집되어 나온 책들이 아니어서 그런지 작가의 개성이 더 잘 묻어나 있는 듯했다. 일반 서점에서 못 보던 그림책이나 엽서집도 있어 보물 찾기를 하듯 구경했다. 지금까지 대형 서점만 가 본 나는 그날 이후로 책방지기의 큐레이션이 빛나는 독립서점의 매력을 알게 되었다. 독립서점이란 게 있는지도 모르고 살 때는 전혀 보이지 않던 작은 서점들이 알고 나니 여기 저기서 보였다. 내가 살던 동네에도 곳곳에 박혀있던 개성있는 서점들이 요술 망토를 벗은 듯 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세상의 모든 일이 그랬다. 관심을 가져야 보이고 경험을 해 봐야 이해되는 거였다.
이번에 알게된 사실이지만, 스토리지북앤필름 후암점은 신기하게 '책방 스테이'라는 프로그램도 운영하고 있었다. 책방에서 하루 시간을 보내고 싶은 사람이나 책방 운영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 책방지기 대신 하루 책방을 운영해 보는 거다. 미리 알았더라면 한국에 살 때, 친구가 일을 시작하기 전 한번 같이 해볼걸 하는 생각이 들었다.
친구 덕분에 넓어진 나의 세상과, 친구 덕분에 좋아할 만한 한국 책을 얻은 아이들.
비가 엄청 내리던 오후에 친구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별일 없지?"
"응, 별일 없지. 너도?"
"언제나처럼"
"좋다"
친구도 그녀만의 예쁜 서점을 가질 수 있을까?
내가 달이면 좋겠다.
친구가 내딛는 한 걸음 한 걸음에 환한 달빛으로 달길을 만들어 줄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