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빙고동의 인연들
"한국에서의 마지막 저녁 식사는 어디에서 하고 싶어?"
아이들에게 물었다.
"칠백식당!"
요즘 힙한 몬드리안 호텔이 들어서기 전, 캐피탈 호텔이 그 자리에 영업을 접은 채 동빙고동에 덩그러니 서 있던 시절, 우리는 건너편 쪽의 빌라에 살았다. 동빙고동은 여러 나라 대사관들이 있고 아파트보다는 빌라가 많은 조용한 주택가였다. 10분 정도 걸어가면 이태원 가구거리가 나오고, 보광동 쪽으로 걸아가면 70년대 골목 같은 예스러운 골목들과, 다닥다닥 붙어있는 작은 가게들이 있었다. 지하철도 안 들어오고 버스도 별로 없어 편의시설 역시 많이 없는 그런 동네였다. 식당도 딱 두 개가 있었으니 하나는 '유진 막국수'였고, 나머지 하나는 '칠프로칠백식당'이었다. 동네에서 저녁을 해결하고 싶었던 어느 날, 기대 없이 들렀던 고깃집 칠백식당. 그곳은 머지않아 우리 가족의 단골집이 되었다.
칠백식당의 메뉴는 간단했다. 안심, 등심, 모듬, 육사시미. 그리고 된장찌개, 곤드레밥, 장아찌 국수. 그곳에 처음으로 갔던 날, 초등학교 1학년, 3학년이었던 아이들이 육사시미를 먹겠다고 했다. 아이들이 연어 회를 좋아하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고기를 생으로 먹겠다는 말에 나는 깜짝 놀랐다. 난 어렸을 때 징그럽게 생긴 음식은 잘 먹지 않았기 때문에 생선회나 육회를 먹어본 적이 없었다. 회사에 다니면서 생선회를 처음 먹기 시작했고, 육회는 먹어볼 생각도 하지 않았었다. 육사시미는 소고기를 얇게 회 뜨듯이 뜬 음식이었다. 낯설었지만 아이들이 굳이 먹는다고 해서 육사시미와 안심을 일단 주문했다. 아이들 때문에 그날 처음 먹은 육사시미는 안 먹었으면 어쩔뻔했나 싶을 정도로 맛있었다. 아이들은 육사시미 한 접시를 날름 먹어버리고, 또 한 접시를 먹겠다고 했다. 총각 사장님이 깜짝 놀라시고, 주방 이모님까지 신기한 듯 '아이들이 육사시미 먹는 것은 처음 본다'라고 말씀하셨다.
육사시미와 안심 맛에 빠져 2주가 멀다 하고 토요일마다 칠백식당으로 갔고, 사장님과 주방 이모님과도 점점 친해졌다. 몇 주만에 가는 날이면 오랜만에 왔다고 다들 반가워하셨다. 간다고 미리 전화를 드리면 사장님은 우리 가족이 제일 좋아하는 지정석을 준비해 두셨다. 안심을 주로 먹던 우리를 위해 좋은 안심이 들어오면 전화를 주셨고, 안심이 떨어진 주말이면 헛걸음하지 말라고 미리 알려주시기도 했다.
한국에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었던 나는 된장찌개며 장아찌 국수며 모든 것이 너무 맛있었고, 아이들은 이 식당의 깍두기를 무척 좋아했다. 김치류는 맵다고 잘 먹지 않는 아이들이었는데, 이곳을 통해 내 나라 음식인 깍두기 맛을 알게 되었으니 난 더욱 고마울 뿐이었다. 달걀찜이 메뉴에서 사라진 이후에도 이모님은 종종 달걀찜을 서비스로 주셨고, 언제나 맛있게 먹는 우리 식구들이 예뻤던지, 가끔 깍두기와 심지어 된장도 싸 주셨다. 친구들이 친정이나 시댁에서 김치를 얻어먹었다면, 나는 아이들 덕에 칠백식당 이모님께 깍두기를 얻어먹었다. 손재주도 좋은 이모님은 손님이 없는 시간에는 앉아서 색색의 뜨개실로 예쁜 수세미를 만드셨는데, 갈 때마다 예쁜 수세미도 하나씩 주셨다. 우리가 마지막 저녁을 먹은 날은 마지막이라고 수세미를 5개나 싸 주셨다.
사장님과 이모님의 친절함은 피리부는 사나이의 피리소리 마냥 우리를 그곳으로 끌었고, 그곳에서의 저녁 식사는 언제나 편안하고 맛있었다. 다른 나라에서 받아보지 못한 서비스를 내 나라, 동네 식당에서 지난 5년간 흠뻑 받았다.
맛있고 정겨웠던 마지막 저녁 식사를 마치고, 언제나처럼 칠백식당 옆에 있는 세븐일레븐에 갔다. 성악가 같은 목소리와 함박웃음이 트레이드 마크인 사장님이 마침 계셔서 마지막으로 인사를 나눌 수 있었다. 두 사장님과 이모님의 친절함에 대한 인사로 비타 500을 샀다. 하나를 세븐일레븐 사장님께 드리니 감사하다 하시면서 수줍은 얼굴로 기쁜 소식을 전해주셨다.
"좋은 소식이 있어요. 아내가 임신했는데 이제 5개월이 됐어요."
5년 전 처음 뵙을 때, 아이가 없다고 하셔서 더 이상 물어보지 못했었는데, 기다리던 아기가 드디어 생겼나 보다. 아이들을 대하는 모습을 보고 좋은 아빠가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는데 정말 기쁜 소식이었다. 조금만 일찍 알았더라면 우리 아이들이 쓰던 물건을 싱가포르로 보내기 전에 나누어 드릴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안타까운 마음에 몬드리안 호텔 지하에 있는 '아크 앤 북'이라는 서점에서 여름에 어울리는 그림책을 하나 골랐다. 그림도 귀엽고 내용도 기발해서 좋아하는 <수박 수영장>이라는 그림책은 오래 소장하기 좋은 책이었다. 책을 받아 든 사장님의 기쁨은 깜짝 놀라 커진 눈으로 나타났다가 시원한 웃음소리로 번졌다. 마스크로 가린 입이지만 얼마나 크게 웃고 계신지 알 수 있었다.
한국에서의 마지막 저녁 식사는 기쁜 소식과 함께 따뜻한 마음으로 마무리할 수 있었다. 다음에 한국에 가서 다시 들를 때는 세븐일레븐 사장님의 아기 사진과 칠백식당 사장님의 결혼 사진도 볼 수 있으면 좋겠다.
아이들은 왜 칠백식당에서 마지막 식사를 하고 싶었을까? 한남동으로 이사를 간 이후에도 우리는 왜 이곳을 꾸준히 찾았을까? 고기가 맛있는 식당은 이곳 말고도 많았다. 이곳을 찾은 이유는 음식 맛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한국에 와서 살면서 우리 가족이 처음으로 정을 붙인 곳, 따뜻한 마음을 느낄 수 있었던 곳. 우린 그런 곳에서 마지막 저녁을 보내고 싶었던 것 같다.
칠백식당의 영업 기밀은 '진심'이었고, 그 진심이 우리에게 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