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갑이 되고 싶다.
결혼을 하고 처음 살았던 독일 뒤셀도르프의 집에는 방이 하나 있었다. 돈은 없었지만 꿈이 있던 시절이었다. 첫째가 태어나기 전, 방이 두 개 있는 집으로 옮겼고, 남편의 새로운 직장을 따라 바인하임으로 이사를 하면서 방이 세 개 있는 집을 구했다. 그곳에서 둘째가 태어났고, 네 식구가 살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남편이 미국 지사로 파견되면서 방이 네 개 있는 집으로 이사했다. 오렌지, 레몬 나무가 있는 단층의 단독주택이었다. 하나 더 생긴 방은 늦게까지 일하는 남편의 사무실로 사용했다. 3년마다 방을 하나씩을 늘린 셈이었다. 처음부터 큰 집에 산 것이 아니라 넓혀가는 재미가 있었다. 다시 찾은 한국에서도 방 네 개짜리 집에서 살았다. 코로나로 인해 남편의 재택근무, 아이들의 온라인 수업이 이어지면서 집이 벅적거렸고, 나는 책상으로도 활용하던 식탁을 삼시 세 끼를 위해 수시로 정리해야 했다. 그 이후로 내 방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꿈을 꾸게 되었다. 책상 위에 노트북을 올려놓고 온라인 수업도 듣고, 글도 쓸 수 있었으면 했다. 식사시간마다 물건을 안 치워도 되는 책상이라는 정체성을 가진 물건을 갖고 싶었다. 조각보를 만들 때 색 조합을 맞추기 위해 펼쳐 놓았던 천을 수시로 정리할 필요가 없는 내 공간이 있었으면 했다.
싱가포르에서 집을 찾아다닌 지 2주가 지났다. 컨테이너에 실려 싱가포르로 오고 있는 짐을 쑤셔 넣을 적당한 크기의 집을 좋은 가격에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번에는 내 방을 꼭 갖고 싶었는데, 지난 2년간 4-50%까지 급상승했다는 월세를 보니 그 꿈은 포기해야 할 듯했다.
싱가포르의 집은 국토가 넓지 않아서 그런지 고층의 아파트 같은 콘도가 많았고, 일반 하우스도 대지가 좁고 층이 많은 편이었다. 내가 방문한 집들은 대부분 타운 하우스(Town House)나 클러스터 하우스(Cluster House)였다. 타운 하우스는 여러 채의 집이 나란히 벽을 붙이고 있는 형태의 집으로 지하층이 없는 복층 이상의 구조의 집이었다. 단독 주택처럼 거주하는 사람이 단독으로 해충, 정원, 수영장 관리를 해야 했다. 클러스터 하우스는 여러 채의 집이 벽을 붙이고 있으나 단지 규모는 타운 하우스보다 컸고 지하 주차장이 있었다. 집의 지하층 바로 앞에 자기 차를 주차할 수 있는 주차장이 제공되고, 피트니스 센터와 수영장을 단지 주민들과 공유했다. 관리인이 있어 해충 관리나 공동시설 관리를 해 주는 구조였다.
싱가포르 집에는 신기한 구석이 많았는데 방마다 욕실이 딸려 있다는 점과 집집마다 헬퍼/메이드 방이 마련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헬퍼 룸은 보통 부엌 뒤쪽이나 지하층에 있었는데 성인 남성은 눕기에도 불편할 것 같은 작은 크기에 에어컨은 물론이고 창문도 없는 경우가 많았다. 대부분 상주하는 헬퍼가 있기 때문에 헬퍼에게 요리를 시키거나 주문해서 먹기 때문인지 집 크기에 비해 부엌도 작았고, 식기 세척기도 없는 집이 많았다. 나는 욕실이 많은 집 구조를 보고 청소를 어떻게 하려고 이렇게 지었지 하는 생각을 제일 먼저 했는데, 헬퍼가 있는 것도 그것과 상관이 있을 것 같았다. 욕실이 많은 것도 모자라 여러 층으로 이루어진 구조 때문에 집 안에 엘리베이터가 있는 집도 있었다. 그러니 방이 작을 수밖에. 또 하나 신기했던 것은 1996년도 이후에 지어진 집과 건물은 반드시 Bomb Shelter(폭탄 대피소)를 두도록 규정이 되어있다는 점이었다. 한국에도 공공건물이나 지하철에 대피소가 있는 것을 보았지만 이렇게 개인 집에 대피소를 두도록 규정해 둔 것은 아주 새로웠다. 대부분의 가정은 이 대피소를 창고로 사용하고 있는 것 같았다.
2주간 10개 정도의 집을 보았고, 그러다 남편이 코로나에 확진되면서 더 이상 집을 보러 다닐 수 없게 되었다. 제일 마음에 들었던 집은 타운 하우스 형태의 집이었는데, 수영장은 없었지만 방이 넓어 좋았다. 집주인 아줌마가 아들을 위해 사 둔 집이라 했다. 갑자기 집주인 아줌마의 딸이 되고 싶었으나 아줌마의 탐욕을 본 이후에는 그런 마음이 싹 가셨다.
서울에서 보낸 컨테이너가 7월 31일에 도착할 예정이고, 세관을 통과하는데 4-5일이 소요되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8월 8일이 되어야 이사가 가능했다. 이사 들어가는 날부터 계약을 하고 싶었는데, 집주인은 우리가 그 이전에 이사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8월 1일부터 계약하기를 원했다. 한 달 월세 중 일주일도 손해보기 싫다는 의도였다. 렌트 시장에 나와있는 물건보다 렌트하고자 하는 세입자가 넘쳐나 경쟁이 심한 상황이라 세입자가 임대인의 의견을 따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집주인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남편이 아파 계약서 검토가 지연되니 그 하루를 기다리지 못해 그날 안으로 계약서를 받지 못하면 다른 세입자에게 넘기겠다고 했다. 인정사정이 없었다.
싱가포르에 와서 우리가 제일 많이 들은 말은 "Singapore is a very easy going country." 였는데, 집주인의 갑질을 보면 이곳이 모두에게 쉬운 나라는 아닌 것 같았다. 구석으로 몰리는 기분이었고, 환대 받지 못하는 느낌이었다. 결혼 이후 3개국에 걸쳐 월세 계약서를 많이 써 봤지만 이번에 작성한 월세 계약서가 집주인 위주로 작성된 가장 불공평한 계약서였다. 월세를 충분히 받으면서도 세입자가 사는 동안 자기 주머니에서는 1센트도 내지 않으려는 의도가 계약서에 빤히 드러나 있었고, 우리가 운이 없다면 중국에서 유학하고 있다는 서른 살의 집주인 아들이 2년 후에 장가를 가면서 우리에게 나가라고 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집주인도 마음에 들지 않고, 이런 상황도 불안했지만 우리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한국에서도 이태원과 한남동 일대에 외국인을 대상으로 월세를 올리려고 법의 테두리를 피해 세입자를 내보내는 집주인도 보았고, 월세는 많이 받으면서 고장이 나면 연락을 받지 않거나 안 고쳐주고 버티는 갑질하는 집주인들도 보았는데, 싱가포르도 별로 다르지 않은 것 같았다.
찝찝한 마음을 안고 계약을 마쳤다. 이제 남은 일은 사는 동안 집에 고장이 많이 나지 않기를 바라는 일이며, 집주인 아들의 결혼 운이 빨리 생기질 않기를 바라는 것뿐이다.
집주인 아드님, 연애중이시라면 연애를 충분히 오래 해 주세요. 잘 모르고 결혼하면 망할 수 있습니다. 공부를 하고 계신다면, 그 분야의 전문가가 되어 돌아와주세요.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