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 앞마당에는 인조 잔디가 깔려있다. 언제나 변함없이 푸르른, 시들지 않는 인조 잔디.
우리가 이사오기 전에 이 집에 살았던 스위스 가족이 깔아놓았다 했다. 이사 온 이후 순식간에 정글화가 되어가는 뒤뜰을 보며 스위스 가족의 마음이 이해가 되었다. 비가 너무 자주 와서 잔디가 쑥쑥 자라는 바람에 관리가 어려웠던 것이다. 앞 뜰만이라도 신경을 안 쓰게 해 준 그분들에게 감사했다.
어느 날 아침에 인조 잔디와 바닥 타일 사이에 피어난 민들레를 보았다. 우연히 땅에 뿌리내린 씨가 살아 내겠다는 강한 생명력으로 인조잔디 밑 타일 사이의 틈을 비집고 피어 있었다. 기특했다. 민들레를 보고 있자니 나를 민들레라 표현했던 친구가 생각났다.
재희와 나는 2007년 독일 뒤셀도르프에서 만났다. 같은 회사에서 근무하지는 않았지만 두 계열사가 같은 건물에 있어 한국 직원들이 모여 점심을 먹으며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재희와 같은 회사를 다녔던 민수언니와 재희와 나는 그렇게 가끔 점심을 먹으러 다니며 친하게 지냈다. 2년 정도 일하다 첫째 아이를 낳은 후 휴직을 했다. 당시 경영 컨설턴트였던 남편은 주중에는 다른 나라에서 일을 했고, 주말에만 집에 왔기 때문에 나는 대부분 혼자서 아이를 돌보는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민수 언니와 재희는 경이롭지만 지극히 단순한 나의 일상에 단비처럼 들러주는 친구들이었다. 부엌에서 락앤락 용기를 여는 소리에도 잠에서 깨 버리는 예민한 아이 때문에 제대로 챙겨 먹지 못하는 날 위해 근무 후에 집에 들러 같이 음식도 해 먹고, 아이랑 놀아주기도 했다.
재희가 한국 본사로 돌아가게 되면서 가끔 연락만 하고 지내다가 내가 한국으로 다시 들어가면서 정기적으로 만나게 되었다. 아이들이 학교에 있는 시간에 나는 지유로웠고, 대학교 교수인 재희는 강의가 없는 날을 이용해 나를 만날 수 있었다. 삼십 대에 만난 인연이 사십 대에 다시 만나니 더욱 편안했다.
나라를 옮겨 다니며 살다 보면 현재 살고 있는 곳의 친구가 일상을 나누는 친한 친구가 되고, 가족이 되는 경우가 많다. 사는 환경이 달라지면서 자연스럽게 걸러지는 인연도 있고, 새로이 단단해지는 인연이 있다. 재희와 나의 관계는 후자였다. 일 년에 한 번을 연락할까 말까 하던 시기에 우리가 굳이 친구와 친구가 아님을 구분했다면 어쩌면 잃었을지 모르는 인연이었다. 우리가 서로가 가진 것을 부러워하고 시기했다면 또 멀어졌을 인연이었다.
재희야,
<우리는 우리를 잊지 못하고>의 김민철 작가는 가장 좋았던 순간을 가장 다정한 방식으로 기억하고 싶어서 편지를 쓴다고 했어. 그 순간의 오롯한 진심을 고이 접어 고스란히 상대의 손에 쥐어주고, 과거의 따스한 온기 앞에 지금의 나를 데려다 놓고 싶어서 편지를 쓴다고. 멋지지?
우리 집 앞마당에 민들레 하나가 피어있더라. 민들레는 내 마음을 홀씨처럼 날려 네가 주었던 따뜻한 편지에 가 닿게 해 주었어. 한국을 떠나기 전 너와 마지막으로 만났던 그날 네가 이 편지를 들고 나왔잖아. 꽃이 지고 막대 솜사탕처럼 생긴 솜털 씨앗이 생기면 '후~'하고 부는 것만 좋아했지, 민들레를 보고 한 번도 예쁘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거든. 네 편지를 받은 이후로 민들레가 아주 좋아졌지 뭐야. 그 당시의 감동을 기억하며 나도 너에게 다정한 몸짓을 보여주고 싶어서 이렇게 편지를 쓰고 있어.
넌 나를 민들레라 불렀지. 그것도 평범한 노란색의 인생을 황금빛으로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다고 칭찬을 해줬잖아. 그날 난 네 덕에 황금빛 민들레가 되었어. 한국에서 너와 함께한 지난 시간이 생각나더라. 너와 나는 다른 삶을 살고 있잖아. 나는 아이 둘을 낳고 사는 가정주부이고, 너는 싱글의 대학교수이고. 일하는 너의 모습, 사회에서 인정받는 너의 모습을 보면 난 대리만족이 되더라. 그것으로도 족한데 너는 나의 장점들을 봐주고, 나를 격려해 줘서, 일도 안 하는 가정주부인 내가 너를 만나면 특별해진 느낌이었어.
"어머, 그래, 네 말이 맞다"하며 내 말에 감탄하며 수긍해 주는 널 보며 잠시나마 교수님을 가르치는 대단한 실력자가 된 것 같았지.
깊이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이 나라 저 나라에 흩뿌려지는 나 같은 민들레가 그래도 중심을 잡고 이 정도로 살아가는 건 너 같은 친구가 따뜻한 눈빛으로 지켜보고 격려해 주기 때문이지 않을까? 나 너의 찬사가 부끄럽지 않게 반듯하고 빛나게 살려고.
너 기억나? 너랑 너희 엄마랑 나눴던 대화. 어떤 친구와의 관계 때문에 실망해서 네가 엄마한테 "얘가 친구가 맞아?" 하니까, 너희 엄마가 "엄마 나이쯤 되면, 건강하면 다 친구야"라고 하셨다고. 80세 정도 되면 이미 돌아가신 분들도 계시고, 치매에 걸려 친구를 친구로 못 알아보는 분들도 계시고, 또 아파서 외출을 못 하는 분들도 있으니까 좋고 싫고 할 친구 없이 건강하면 그저 다 친구라고 하셨던 말씀. 우리에게도 사소한 것을 따지지 않고 친구가 살아남아 있어 줘서, 건강하게 있어줘서 고마운 그런 때가 오겠지. 오랫동안 살아줘. 건강하게.
아참, 우리 집 앞마당 민들레에 얽힌 슬픈 얘기를 마지막으로 해 줄게. 네가 나를 민들레로 표현한 이후에 앞마당 민들레를 볼 때마다 기특해서 남몰래 아끼고 있었는데, 어느 날 남편이 정원을 정리한답시고 분주하게 왔다 갔다 하더니 그 소중한 민들레를 잡초인 양 확 뽑아버렸어. 남편은 내가 민들레인지 알고 그런 걸까?
<친구가 나에게 줬던 편지>
유진이에게
민들레. 너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꽃이야. 강렬한 노란 빛깔의 꽃이 흰색 솜털이 되어 멀리멀리 날아가는 너무나도 현실적이면서도 너무나도 이상적인 꽃. 봄이 되면 바위틈을 비집고 피어나 모두에게 희망을 전해주듯이 유진이 너도 주위의 사람들에게 그런 존재인 것 같아. 하루하루 바쁜 생활 속에서 내가 하는 일의 의미를 잊고 지낼 때, 너는 항상 그 평범한 일상의 소중함과 의미를 일깨워 주었어. 너를 만나면 삶의 생동감과 활기를 느끼게 돼. 양지바른 곳에 피어난 민들레가 자신의 노란색을 황금빛으로 빛나게 하는 것처럼 넌 평범한 노란색의 인생을 황금빛으로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어.
이제 홀씨가 되어 떠날 시간이네. 현실에 뿌리박고 사는 평범한 사람들이 가보지 못한 멀고 먼 곳으로 또다시 너의 생명력을 전하러 가는구나. 아무런 미련 없이 홀연히 떠날 수 있는 너의 용기가 참으로 대견하다. 그곳에서 또다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더 많은 경험을 쌓고, 너를 더욱 단단히 할 것을 생각하니 나도 함께 흥분이 되는구나. 우리가 다시 만날 때 여전히 같지만 새로운 너의 모습이 기대된다.
사람의 마음을 잇는 본질은 무엇일까? 30대 초반 독일에서 너를 만나고, 15년이라는 세월이 흘러 한국에서 다시 너를 만났음에도 항상 옆에 함께 있었던 친구 같은 느낌이야. 앞으로 얼마의 시간이 흘러 너를 다시 만나게 될지 모르겠지만, 아마 그때도 지금처럼 허물없이 편하게 느껴질 것 같아. 짧은 2년 여의 시간이었지만, 나의 독일 생활을 편하게 얘기할 수 있는 사람이 가까이에 있어서 참 행복했어. 그리고 무엇보다 인생의 소중한 가치와 행복을 함께 나눌 수 있어서 좋았단다. 우리의 몸은 쇠하겠지만, 더 성숙하고 아름다운 사람이 되어 다시 만나자. Adios Amig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