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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ujin Kim Jan 19. 2023

독일 시할머니가 남긴 앤틱 재봉틀

할머니 이제 편안하세요?

2006년 1월. 결혼 후 슈트케이스 두 개를 달랑 들고 도착했던 독일은 추웠다. 한국에서 보낸 짐은 20박스. 2022년 7월 싱가포르로 이사하면서 보냈던 짐이 318개였던 것에 비하면 결혼했을 때 우리 살림은 그야말로 단촐했다.


남편의 친가 친척들을 처음 만났다. 마가렛 대처 수상처럼 생긴 시할머니는 겨울처럼 차가웠다. 프랑스 며느리를 넘어서 이번에는 어디에 붙어있는지도 모르는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온 손주 며느리라니.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한국으로 간 손자가 딱 1년 일하고 결혼을 했다. 서른도 안된 손자가 그것도 독일도 아닌 한국에서. 시할머니에게 나는 독일 영계를 잡아먹은 한국 여우였을지도 모르겠다. 이상하게도 나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던 할머니가 별로 밉지도 않았다. 시어머니도 아니고 시할머니라서 그랬을까? 아니면 한국 시댁이 아니라 외국 시댁이라 그랬을까? 할머니의 황당한 마음이 이해가 되기도 했고,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거라는 믿음도 있었다. 게다가 당시의 난 다른 사람의 시선에 크게 개의치 않았다. 그런 것이 신경 쓰였다면 경제적 기반이 전혀 없는 연하 외국인과 결혼을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서른 살의 난 뭐든지 잘해 낼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과 호기가 있었다.


할머니와 같은 동네에 사는 큰 고모 가족과 막내 고모 가족이 나를 만나러 할머니댁으로 왔다. 십여 명이 커다란 식탁에 않아 식사를 하면서 대화를 나눴다. 독일어를 하나도 못했던 나는 그저 미소를 짓고, 남편이 통역해 주는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식탁에는 처음 맛보는 적양배추로 만든 롯크라우트(Rotkraut)와 소고기로 만든 룰라덴(Rouladen) 등 신기한 음식이 많이 있었다. 처음에 시선을 주지 않던 할머니도 자기 음식을 말없이(아니 말을 못 해서 조용히) 잘 먹는 동양의 손주며느리가 신기한 듯 눈길을 주기 시작했다.


그 이후 정기적으로 할머니댁을 방문하면서 천천히 늘어가는 어설픈 독일어로 할머니를 웃기기도 했고, 할머니의 음식들을 여전히 잘 먹어치웠으며, 할머니의 케이크에 반해 레시피까지 물어가며 꼼꼼히 노트에 적기도 했다. 첫 만남에서 싸늘했던 할머니가 나의 안부를 묻기 시작했고, 동네에서 일어난 이런저런 얘기도 해주더니 어느새 나도 할머니의 '사랑하는 유진이'가 되어 있었다. 할머니 댁에 들렀다 집으로 돌아갈 때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직접 만든 사과 주스며 잼을 가득 챙겨 주시기도 했다. 까탈 부리지 않고 잘 먹는 사람이 사랑받는다는 건 전 세계 공통의 진리였다. 이 진리를 일찍이 터득한 난 독일 영계보다 노계를 잘 다루는 한국 여우였을지도 모르겠다.


2021년 12월, 할머니가 90세의 나이로 돌아가셨다. 코로나 사태가 슬슬 진정되면서 3년간 못 뵌 할머니를 찾아뵐 계획을 세우고 있었는데 결국 만나 뵙지 못했다. 이번 겨울에 유럽의 친지들을 방문하면서 할머니 무덤 앞에서 늦은 인사를 드렸다.  


"할머니, 그곳에서는 좀 어떠세요?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6년 동안 많이 슬퍼하셨잖아요. 이젠 할아버지를 만나 편안하세요?"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할머니는 자주 우셨다. 잘 지내시냐 물으면 언제나 힘이 없었고, 더 이상 소리를 내며 웃지도 않으셨다. 지난해부터는 몸 상태도 많이 안 좋아 요양병원에 계셨고, 많이 아파하셨다고 했다. 돌아가시기 전에 뵙지 못한 것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할머니가 지금은 아픔 없이 편안하실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그리운 할아버지를 만나 웃고 계실 것 같다.


이제 곧 다른 사람의 소유가 될 할머니댁에 마지막으로 가 보았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사셨던 연두색 집과 할머니, 할아버지의 부모님이 사셨던 노란색 집은 마당을 공유하며 서 있었다. 할머니가 마지막까지 사셨던 연두색 집 부엌에는 내가 만들어 드렸던 2019년의 달력이 여전히 걸려 있었다. 잘 안 보이는 할머니를 위해 우리 가족의 인물 사진 위주로 A3 크기의 달력을 보내드렸는데, 해가 지나도 달이 지나도 나의 딸 루나가 들어있는 7월의 달력이 보이도록 걸어 두셨다고 했다. 다른 식구 얼굴도 보라고 고모가 다른 페이지로 넘겨 놓으면 어느새인가 다시 루나 얼굴로 바꿔 놓으셨다 했다. 할머니에게는 손주가 12명, 증손주가 6명 있는데, 파란색 옷을 입고 남산에서 찍은 증손녀 루나의 사진이 그렇게 마음에 드셨나 보다. 멀리 있어 자주 못 보는 증손녀를 그렇게 그리워하셨다는 것을 이번에 처음 알았다.


할머니를 처음 방문했을 때 우리 부부가 머물렀던 노란색 집은 여전히 박물관 같았다. 전통적인 구조를 하고 있어 정부가 보호 차원에서 리모델링을 제한한 집이라 언제인가부터는 비어 있었다. 천정도 낮고, 오븐도 오래된 것이었고 심지어 집게손가락을 껴서 다이얼을 돌리는 전화기도 있었다. 거실로 들어서자 할머니가 나에게 물려주신 재봉틀이 있었다. 할머니가 나를 콕 집어서 물려줘라 하신 것은 아니었지만 할머니의 유품 중에 갖고 싶은 게 있으면 말하라는 Annette(아네테) 고모의 연락에 할머니의 재봉틀이 갖고 싶다고 했었다. 다행히 할머니의 네 자녀와 열명이 넘는 손자, 손녀들이 아무도 재봉틀에 관심을 갖지 않아 손주며느리인 내가 받을 수 있었다.


시할머니의 재봉틀_Haid & Neu


눈금자까지 새겨져 있는 정교함


"바느질을 좋아하는 네가 엄마의 재봉틀을 가지게 되어 참 다행이야. 너라면 이 재봉틀을 아끼며 잘 간직해 줄 거야."


이렇게 말하며 아네테 고모는 할머니의 어머니가 이 재봉틀을 중고로 사셨다는 얘기도 들려주었다. 짐작컨대 대략 1930년대 제품인 것 같다고 했다. 당장 집으로 가져와 한국 친할머니의 100년 된 고가구 옆에 두고 싶지만 싱가포르로 보내는 비용이 만만치 않을 것 같았다. 일단 우리가 유럽으로 다시 돌아올 때까지 고모가 재봉틀을 잘 보관해 두기로 했다.


재봉틀 다리 부분에 Haid & Neu라는 상표가 보였다. 모르는 이름이라 찾아보니 이 브랜드는 1860년도에 재봉틀을 수리하는 가게로 시작을 했다고 한다. 그러다 1862년에 처음으로 자체 재봉틀을 만들었고, 1958년에 재봉틀 브랜드로 잘 알려진 미국 Singer(싱어) 사로 인수되었다 한다.


Haid & Neu라는 상표를 달고 있는 것을 보니 싱어 사가 인수하기 전 적어도 70년은 된 제품인데, 아직도 작동한다는 본체와, 탁자 위에 새겨진 정교한 눈금자, 탁자 양쪽의 귀여운 서랍 그리고 철제 다리까지, 모든 것이 고풍스럽고 아름다웠다. 서랍을 열어보니 할머니가 쓰시던 천 조각이 들어있었다. 할머니는 저 재봉틀과 얼마나 많은 시간을 보내셨을까? 알뜰살뜰하게 뭔가를 수선하고 있는 할머니의 모습이 그려진다.


유품을 간직한다는 것은, 특히 누군가의 손때가 묻은 소중한 물건을 간직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삶에 묻어있는 시간과 이야기에 경의를 보내는 것이다. 갑자기 할머니가 아닌 꿈 꾸던 막달레나의 젊은 시절이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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