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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두연 Jan 13. 2021

[감상-시] 최승자의 자화상

시를 쓴다는 것은


나는 아무의 제자도 아니며
누구의 친구도 못 된다.
잡초나 늪 속에서 나쁜 꿈을 꾸는
어둠의 자손, 암시에 걸린 육신.


어머니 나는 어둠이에요.
그 옛날 아담과 이브가
풀섶에서 일어난 어느 아침부터
긴 몸뚱아리의 슬픔이예요.


밝은 거리에서 아이들은
새처럼 지저귀며
꽃처럼 피어나며
햇빛 속에 저 눈부신 天性의 사람들
저이들이 마시는 순수한 술은
갈라진 이 혀끝에는 맞지 않는구나.
잡초나 늪 속에 온 몸을 사려감고
내 슬픔의 毒이 전신에 발효하길 기다릴 뿐


뱃속의 아이가 어머니의 사랑을 구하듯
하늘 향해 몰래몰래 울면서
나는 태양에서의 사악한 꿈을 꾸고 있다.


-최승자, 자화상



아주 오랫동안 마음속에 품어온 시들이 있다. 낱말과 구절을 잘근잘근 씹어 넘겨 소화시킨, 나의 생각과 정신의 기초가 된 시들. 가장 좋아하는 시인이 누구냐고 물으면 두말할 것도 없이 외치는 이름. 감히 그녀의 시를 읽는 것만으로도 시가 가져다주는 즐거움과 깨달음에 정신이 번쩍 뜨이는.

나의 사랑, 최승자 님의 시들이다. 그중에서도 '자화상'이라는 시는 두고두고 되새겨 읽는 시 중 하나이다.




그녀의 시를 처음 접한 것은 대학교 현대 시론 수업 때이다. 그때의 나는 시의 'ㅅ‘자도 몰랐을 뿐만 아니라 내 정신의 바다에 파도를 몰고 온 시 구절이 단 하나도 없었다. 그러면서도 감히 시를 썼다. 그러면서도 학과 내의 시 쓰는 소모임 회장직을 맡았다. 그저 시를 쓴다는 행위와 시를 쓰는 나 자신에 도취되어 부끄러움이 무엇인지 잘 몰랐던 것 같다. 그리고 진심으로 그때 썼던 글들이 시인지는 모르겠다. (그렇게 부르고 싶지도 않다) 왜냐하면 외장하드에 저장되어 있는 그때의 글들을 읽노라면 땅 속으로 영영 꺼지고만 싶기 때문이다.


교수님은 수업을 한창 진행하며 내게 물으셨다. 최승자의 자화상을 읽고 어떤 느낌이 드느냐는 질문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 인생 탑 쓰리에 드는 인생 질문인데 무지했던 그때의 나는 제대로 된 감상을 하지 못했던 것 같다. 사용된 단어들이 과하다는 망언을 했기 때문이다.


후에 대학교 4학년이 되어 창작과 관련된 시 수업을 듣고 나서야, 그제야 시가 무엇인지 감이라도 잡을 수 있었다. 교수님께서는 다음 수업까지 시를 한 편씩 지어오라고 했다. 시 수업을 한번 듣고 나니 여태껏 써왔던 그딴 글들을 제출할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도 정말 부끄러웠다. 여태까지 시를 어떻게 생각해왔으며, 어떻게 대해왔는지 폭풍처럼 의문이 휘몰아쳤다. 단 한 번의 강의를 듣고서 말이다.


가족들이 모두 외출한 것을 확인한 뒤, 책상에 앉아 솔직해지기로 했다. 노트북에 한글 창을 켜놓고 깜빡이는 커서를 보며 어떤 이야기를 시작할 것인지, 내 치부와 고통을 들춰내야만 했다. 시는 솔직하지 못하면 나올 수가 없었다. 시를 쓴다는 것은 아주 힘든 일이었다. 태어나 처음으로 솔직하게 글을 썼다. 한 행, 한 행 적으며 마음에 불이 일었다. 나 자신을 비로소 마주한 계기가 된 것이다. 쓴다는 것은 거울보다도 투명한 일이었으며 우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 보다도 부끄러운 것이었다. 내 살점과 뼈와 근육을 굳이 굳이 들추어내어 온 곳에 전시하는 것. 그리하여 영혼이 성장하는 작업이었다.

밤을 새워 시를 마무리했다. 그리고 그 시를 프린트 해 제출하는 과정, 시가 내 손을 떠나는 과정에서 이전과는 다른 고독감이 밀려왔다. 시가 무엇인지 감이라도 잡은 이상,  삶을 바라보는 눈이 이전과는 달라졌다는 것을 알았다.




그 후 다시 최승자의 자화상을 읽어보았다. 대단한 시였다. 그제야 그녀의 시를 제대로 읽은 나 자신은 시 앞에서 한없이 작아졌다. 시인은 자신을 뱀에 비유하여 이야기했다. 그 누구와도 융화되지 못하고 섞이지 못하며 오로지 검은빛만을 내는, 어둠이 낳은 자손. 나쁜 꿈을 꿀 수밖에 없는 암시에 걸린 육신. 신이 세상을 창조했을 때부터 함께 예정되어온 고독감. 마음속에는 독이 있으며 아무도 쳐다봐 주지 않아 춥고 외로워 똬리를 튼 몸뚱이. 그럼에도 몰래 꾸어보는 맑은 꿈. 태양을 훔쳐보고 끊임없이 아름다움 앞에 머리를 조아릴 수밖에 없는 흉측한 뱀.


스스로를 뱀이라 칭하는 시인의 자기 고백은 구절구절마다 파격이다. 시인은 일찍이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였고 곰팡이, 오줌 자국, 심지어는 죽은 시체라고도 하였다. 무엇이 시인 스스로를 그렇게 칭하도록 만들었을까. 파괴적인 것들로 스스로를 칭함은 세상을 향한 냉소와 시위인 것일까?


아이가 어머니의 사랑을 구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을 원하는 것 같기도 하지만, 사랑을 받지 못한 자들의 결여는 평생이다. 사랑을 바란다는 것은 갓난아기들이 본능적으로 입을 쪽쪽거리는 것과도 같다. 사랑은 산다는 것과도 관련이 있다. 사랑은 생인 것이다. 나는 감히 시인의 생을 유추도, 이럴 것이다라고 안다고 말하지도 못한다. 시인은 '나는 너를 모른다'라고 했다. 떨어지는 유성처럼 우리는 잠시 스쳐가는 것일 뿐. 어떻게 감히 그녀에 대해 안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이따금 세상에는 가지고 있는 이상이 저 하늘 위에 있어 진정으로 아름다운 것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들이 있다. 윤동주가 어느 날 밤 우물 안을 들여다보았던 것과 같이, 종로 거리에서 서성이던 기형도와 같이, 소중한 친구와의 다툼에 마음이 깨져버려 귀를 자른 고흐와 같이, 가면을 쓰고 노래하는 오페라의 유령과 같이 말이다.

마음속에 드리워진 어둠이 그들을 창작하게 하고 내리쬐는 빛을 다른 이들보다 더 밝게 보게 하였으며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롭게 하였지만 쓰고 그리며 노래할 수밖에 없는 삶. 그것이 사명인 이들. 수많은 예술가들. 그리고 그것에 온몸을 빼앗겨버린 나 같은 자들.




최승자의 시가 나에게 와 닿았던 이유는 어쩌면 시를 쓰는 나의 모습이 그녀의 시 속 뱀과 같았고 태양을 바라보며 꿈을 꾸는 모습이 내가 글에 대해 가지는 열망과도 같았기 때문일 것이다. 뱀은 지금도 어딘가에 누워 몰래몰래 울고 있을까? 아직도 몸을 숨긴 채 태양을 바라보며 사악한 꿈을 꿀까? 무엇이든 나는 그녀가 스쳐 지나가는 이 찰나의 생에서 오래오래 시를 써주었으면 하는 바람뿐이다. 그녀의 시는 내 정신의 바다가 고이지 않게 하는 격렬한 파도임으로 나 또한 그녀의 시를 계속해서 흠모하고 계속해서 그녀에 대해 모를 것이다. 아름다운 시를 쓰는 이들을 훔쳐보며 몰래몰래 눈물을 흘리며 시를 읽어야지. [자화상]. 그녀의 자화상도 되지만 나의 자화상도 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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