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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를 하려면, 우선 엉킨 머리카락부터 풀어야 한다. 살아가기만을 위해서, 엉킨 줄도 모르고 단단히 묶어놓은 내 머리카락을 풀면, 어깨 밑으로 떨어지는 느낌과 함께 비로소 과거의 향기가 코끝에 스친다.
오늘도 떠난다. 음산한 기억의 골짜기를 넘어, 처음 너와 마주했던 그곳까지. 너는 여전히 조금씩 나를 헤집어 놓는다. 너를 만난 기쁨, 너를 보낸 애달픔보다 더 견디기 어려운 것은, 아직 내 안에 네가 잔뜩 살아있다는 것. 도착한 곳에는 무엇이 남아있을까. 그냥, 살면서 잊어버린 어떤 단어 하나일까. 흐릿해진 색, 혹은 사라진 시간. 그 밖에도···
수많은 사람과 다를 바 없던, 아니 어쩌면 내 우주의 시작, 영혼의 끝이라 여겼던 너에 대한 말로 이 이야기를 시작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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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와 만난 건 아마도 열여섯이었을 때, 벚꽃잎이 천천히 떨어지던 계절. 그때의 난 교실 자리에 앉아 턱을 괴고, 창밖을 보며, 사색에 잠기는 게 유일한 취미였던 조용한 아이였다. 물론 깊이 있는 생각 따위는 하지 않았다.
한참을 그렇게 있으면 흩날리는 커튼 사이로 늦은 오후의 햇살이 들어왔다. 너무 밝아 눈을 감고, 다시 뜨는 순간 아지랑이 너머 운동장이 보였다. 한 남학생과 수진이가 싱글싱글한 미소를 지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게 보였다. 저들은 도대체 뭐가 그렇게 재밌을까? 좁아터진 동네, 한 다리 건너면 다 아는 얼굴들. 이곳에서 재밌는 일이라고는 눈 씻고 찾아봐도 없는데.
물론 내가 학교생활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냥, 평범하게, 같은 반 친구들과 대화를 나누고, 같이 급식을 먹고, 이따금 방과 후에 함께 어울려 놀기도 했다. 사실 혼자 다니는 게 더 편했지만, 그러면 눈에 띄니까. 괜히 귀찮아지거든.
그때 비둘기 한 마리가 낮게 날았다. 잿빛 깃털이 태양 아래서 희미하게 반짝였다. 나는 본능적으로 시선을 따라갔다. 멀어져 가는 새, 푸르게 번지는 하늘. 순간적으로 숨이 막혔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너무 강한 빛이 눈을 덮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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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뒤, 해가 쨍쨍한 점심시간. 운동장 구석에서, 그 남학생에게 고백을 받았다. 몇 번 마주친 적은 있었지만, 제대로 된 대화조차 한 번 나눈 적 없는 아이였다.
“여진아, 나 정말 오래전부터 너 좋아했어. 내 마음을 받아주지 않아도 괜찮지만, 난 정말 네가 첫사랑이야.”
꽤 인기가 많은 아이로 알고 있는데, 대체 왜 나에게 이런 말을 할까.
“너, 내 이름은 어떻게 알았어?”
“어? 아, 그게, 그 수진이가 알려줬는데...”
“오늘 얘기는 못 들은 걸로 할게.”
나를 잡으려는 남학생의 손을 뿌리치고는 교실로 올라왔다. 상대가 누군지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호르몬에 의해 이성을 잃고, 함부로 감정을 던지는 그 행위가, 조금 불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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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수진과 수진의 무리가 내 자리 앞에 왔다. 그들은 내 앞에 바짝 서 나를 노려보았고, 수진은 한 발짝 멀리 떨어져 팔짱을 낀 채 나를 내려다보았다.
"야, 최여진. 넌 수진이가 민구 좋아하는 거 알면서, 그럴 수 있는 거야?"
“뭐가?”
“얘 봐. 모르는 척하는 게 더 기분 나빠.”
도통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영문도 모르겠어서, 가만히 있었다. 그들은 내가 다 아는 듯 따졌지만, 원래도 말이 많은 이들이었기에, 짧은 이야기만으로도 얼추 맥락을 유추할 수 있었다.
듣자 하니, 수진이 그 남학생을 좋아했었는데, 그 놈이 내게 고백 한 뒤에, 내 이야기를 지어내서 하고 다녔나 보다. 내가 자기한테 꼬리를 쳤다느니, 자기가 거절했다느니... 첫사랑이니 뭐니 지껄일 땐 언제고, 자기 체면 세우려고 나를 팔아먹는 게 참 유치하게 느껴졌다. 그때, 수진이 내 앞으로 다가와 몸을 바짝 들이밀며 말했다.
“내가 얼마나 잘 해줬는데, 이렇게 놀려먹으니까 좋아?”
“내가 걔랑 뭘 했다고 그래?”
“네가 그렇게 발뺌하면 내가 모를 것 같아?”
“너넨 걔 말을 믿니?”
“그래. 그럼 입이 있으면 말을 해보던가.“
되려 묻고 싶었다. "애초에 내 말을 들을 생각은 있어?" 라고. 나를 죄인이라 낙인을 찍어놓고는 나에게 말해보라니, 지어내서라도 사과를 해야하는 걸까? 그냥 무시하고 싶어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무리 중 한 아이가 내 머리채를 잡았다. 순간 짜증이 나서 그 아이의 손목을 있는 힘껏 잡고 한마디 했다.
“근데, 당사자는 그렇다 쳐도, 그 옆에서 나불거리는 너희들은 뭐야?”
그러자, 시끄러웠던 교실에 정적이 흘렀다. 아이들은 전부 당황한 눈빛으로 서로를 보았다.
“최여진, 너 진짜 독하다.”
그냥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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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례 시간. 창밖 해질녘 하늘은 빨갛고, 교실 안 모두의 시선은 차가웠다. 하굣길.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게 그럴 일이야? 고작 남자애 마음 하나 얻지 못해 벌일 일이냐고. 풋내기 감정 때문에 이렇게 실랑이 한다는 게, 얼마나 유치하고, 무용한 짓인 거야.
역시, 거지 같은 동네를 떠야 한다. 서울에 있는 대학에 가야겠다.
늦은 밤. 학원을 마치고 집에 도착했다. 엄마는 내가 다녀왔다는 인사를 하기도 전에, 영양제 한 움큼과 레몬차를 내어주셨다. 우스워 보일 수 있지만, 이건 하루를 마무리하는 의식 같은 거다. 엄마가 만들어준, 하루를 끝내도 괜찮다는 신호. 알약들을 다 입에 털어 넣고 뜨거운 레몬차를 꿀꺽 삼키고 나면, 비로소 자유가 되었다.
씻기 위해 화장실로 들어갔다. 거울 속 표정 없는 내 얼굴 생김새가, 참 딱해 보였다. 미소를 지어도, 어쩔 방법이 없었다. 세면대에 물을 담고, 얼굴을 씻고, 다시 거울을 봤다. 여전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곳에선 내가 존재하는 의미가 없어'
그즈음부터, 숨이 잘 안 쉬어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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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은 점점 나를 다르게 대했다. 처음에는 그냥 같이 먹던 급식을 먹으러 가지 않는다거나, 쉬는 시간에 내 주변에 맴돌지 않는 정도였다. 딱, 없는 사람 취급이랄까. 뭐, 나도 마침 이들과의 억지스러운 관계가 귀찮았던 터라, 차라리 좋다고 생각하고는 창밖을 보았다. 창밖 풍경은 불안할 정도로 평온했다.
내가 별 반응을 보이지 않자, 그 행동들은 점점 더 유치해졌다. 내 물건을 하나씩 훔치기도(사소해서 말하기도 뭐한), 필통에 핸드크림을 잔뜩 짜놓기도, 내 책상에 입에 담기 부끄러운 말을 낙서해놓기도 했다.
나와 기싸움하려는 걸 알았지만, 나는 다수와의 기싸움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그냥 흘려보내고 싶었지만, 이제는 뭘 해도 그들이 의식되었다.
한 번은 체육 수업이었다. 체육 선생은 공 하나를 우리에게 던져주며 피구를 시켰다. 그리고, 너무나도 당연하게도 아이들의 타깃은 나였다. 비 온 뒤 축축해진 모래 운동장에 삐뚤빼뚤 그려놓은 사각형 안에서, 피하는 것도, 일부러 맞는 것도 웃겨 보여서, 가만히 있었다. 공이 나를 향해 날아왔다. 가볍게 맞았다. 아프지 않았다. 그런데, 아이들은 웃으며 내가 공을 피했다며 도로 사각형 안에 가둬놓았다. 그 후로 꼼짝없이 공을 맞았다.
쉬는 시간. 화장실 변기에 앉아 옷에 묻은 흙먼지를 털던 중, 밖에서 익숙한 소리가 들렸다.
"성격이 얼마나 거지 같으면 편 들어주는 애가 한 명도 없냐."
“이 와중에 담임은 또 불러서 같이 놀아주래. 짜증나."
"너가 걔 엄마야? 불쌍하다고 챙겨주게.”
손끝이 저렸다. 순간적으로 뭔가 끓어올랐다. 문을 열고 천천히 나갔다. 창밖의 빛이 너무나 강하게 쏟아졌다.
“내가 성격이 거지 같아서 너네랑 같이 안 놀겠다는데, 그게 문제야?”
아이들이 입을 열기 전에, 내 손이 먼저 움직였다. 그리고, 그 이후는 기억나지 않는다. 내가 아이들을 때리다가, 숨이 쉬어지지 않았고, 순간적으로 모든 것이 사라졌다가, 정신이 다시 돌아왔을 땐 나는 보건실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결국 엄마가 학교까지 찾아왔다. 조퇴를 하고, 흙투성이가 된 체육복을 입은 채 엄마와 함께 길을 걸었다. 엄마는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차가운 손으로 내 손을 감싸며 아주 조용히 “다 괜찮아질 거야.”라고 말하셨다. 엄마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엄마는 우리 집 유일한 어른이니까. 나도 빨리 어른이 되고 싶다. 어른이 되는 것. 그것이 정말 구원이 될 수 있을까. 결국 살아남을 방법은 하나뿐이다. 떠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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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구원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쪽에서 왔다.
소희가 우리 학교로 전학을 왔다. 서울에서 왔다는 소희는 새하얀 피부 때문인지, 가녀린 듯 늘씬한 체형 때문인지, 아니면 차분한 말투 때문인지, 우리 반 학생들, 그리고 나까지도 소희를 주목하게 만들었다.
"안녕, 유소희라고 해."
그 짧은 인사 하나가, 어른 같아 보였다. 왠지 성숙해 보였다고 해야 할까. 소희는 전학 첫날임에도, 자리에 앉아 책을 보았다. 누군가 말을 걸어도, 희미하게 웃고 난 뒤 다시 책으로 돌아갔다. 귀에는 줄 이어폰을 끼고, 턱을 괴고, 햇볕을 맞으면서 말이다. 나는 자꾸만 소희를 힐끗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여튼, 유치한 아이들 사이에서 소희는 충분히 눈에 띄었다. 친해지고 싶다거나 그런 건 아니었다. 반대로 왠지 거부감이 들기도 했다. 소희는 나보다 훨씬 우월하고, 이곳에 속하지 않는 존재. 마치 미지에서 온······ 방금, 소희와 눈이 마주쳤다.
'소희가 나를 보고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