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呼吸-4]

by 김명구

*

수진의 물음을 애써 무시했다. 마침, 수업 시작을 알리는 종이 울렸고, 수진은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수업 중, 선생님의 목소리는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교과서를 넘기는 시늉이라도 했지만, 글자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학교가 끝나자마자 책가방을 들고 서둘러 계단을 내려갔다. 오늘은 소희와 같이 있으면 안 될 것 같았다. 수진이 또 무슨 일을 꾸미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이미 무언가 시작된 것만 같은 불안이 밀려왔다. 나는 도망치듯 학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다음 날, 아침부터 분위기가 묘하게 달랐다. 교실에 들어서자 몇몇 애들이 나를 힐끔 쳐다봤다. 익숙한 시선이었다. 원래도 이런 눈길은 많았으니까. 그런데 이번에는 달랐다. 속삭이는 소리 사이에 ‘소희’라는 이름이 섞여 있었다. 그리고… 귓가를 스치는 한마디.


“여진이가 말해줬대.”


그 말을 듣는 순간, 숨이 턱 막혔다. 정수리까지 피가 쏠렸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내 입에서 시작됐단다. 아니, 애초에 나는 그 이야기를 그들한테 처음 들었다. 어떻게 그 말이 나한테서 나왔다고 말하는 거지? 순간, 머릿속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어제, 수진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소희, 소문이 진짜야?”


분명 나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때 수진의 비릿한 웃음이 떠올랐다. 그 웃음이 무슨 의미였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애초에 수진은 내 대답 따윈 신경도 쓰지 않았겠지. 그저 나를 이용해 확신을 심어주려 했을 뿐이다. 결국 출처 없이 떠돌아다니던 소문의 근원지는 내가 되어버렸다.

정신이 아득해졌다. 무너질 것 같은 마음을 가까스로 부여잡고, 고개를 돌려 소희를 찾았다. 소희는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여느 때처럼 조용히, 무표정하게... 다만, 나는 그걸 더 이상 ‘무표정’이라 볼 수 없었다. 소희의 시선은 분명 어딘가 닿지 않고, 그저 허공을 맴도는 것 같았거든.

숨을 가다듬고, 소희 앞으로 걸어갔다. 소희 앞에 섰다. 교실에서 소희에게 이렇게까지 가까이 다가가 본 적이 없었다.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숨을 삼키고, 최대한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 아니야.”


소희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아니,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표정으로.


“너도 알잖아. 나 그런 말 한 적 없어.”


분명 소희는 내 말을 들어줄 거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말하면, 소희는 고개를 끄덕이고, 알고 있다고 말해줄 거라고 믿었다. 그런데, 소희는 나를 보더니, 아주 가볍게 웃었다. 그 웃음이 어딘가 익숙하면서도 낯설었다.


아, 이건 분명 다른 애들을 대할 때와 똑같았다.


“알아.”


소희는 아무렇지 않게 내게 말했다. 그게 마치 “그래서?”라고 되묻는 것 같았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입술을 깨물었다. 소희는 다시 책으로 시선을 내렸다. 마치 내 말을 들을 필요조차 없다는 듯 말이다. 나는 이 말을 듣기 위해 온 걸까? 이런 식으로 끝나도 되는 걸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돌아섰다.

자리로 돌아왔지만, 마음이 가라앉지 않았다. 수진에게 향했던 분노는 이미 머릿속에서 사라진 지 오래였다. 오히려, 남은 건 소희에 대한 배신감뿐이었다. 내가 그런 게 아니란 것도 다 알면서. 나한테 그런 말을 해준 적도 없으면서. 왜 나한테 그렇게 차갑게 대한 거지? 정말 나를 다른 애들과 똑같이 생각했다면... 처음부터 내게 말을 걸지 않았어야 했잖아.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우리가 옥상에서 나누었던 것들은 뭐였을까. 소희가 했던 말들, 나를 보며 웃던 표정, 함께 맞던 바람. 다 내 착각이었나? 나만 혼자 의미를 부여했던 건가? 갑자기 모든 것이 허무해졌다. 마음속 무언가가 훅 꺼져버리는 느낌이었다.

그래. 따지고 보면, 우린 친구도 아니었겠지. 친구가 뭐 이래. 생각해 보니, 나는 소희에 대해 아는 것도 없었다. 소희가 뭘 좋아하는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떤 사람인지, 아무것도 말이다. 어쩌면, 나보다 다른 애들이 소희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

종례 시간. 창밖의 해질녘 하늘이 유난히 붉었다. 교실 안, 사람들의 시선은 차가웠다. 나는 가만히 앉아 있었다. 이제야 모든 게 정리된 것 같았다. 이런 풋내기 감정 때문에 이렇게 실랑이를 벌이는 게, 얼마나 유치하고, 무용한 짓인 것인지 말이다. 역시, 거지 같은 동네를 떠야 한다. 꼭 서울에 있는 대학에 가야겠다.


*

학원으로 가는 길, 일부러 멀리 돌아갔다. 혹시라도 소희와 마주치면, 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나를 대할까 봐. 그러면 나는 또다시 뭘 기대하게 될까 봐. 그게 견딜 수 없이 싫었다.나는 그냥…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애정을 가졌는데. 처음으로, 누군가를 신경 쓰게 됐는데. 그 사람은 나를 아무렇지도 않게 무시했다. 마치, 아무 사이 아니라는 듯. 신경 쓸 필요조차 없다는 듯 말이다. 그게 너무 비참했다. 그래서 도망치는 거다. 나 자신에게서도, 소희에게서도 말이다.

그냥, 소희도 나를 조금이라도 신경 써줬다면. 아니, 적어도 처음 그 도로변에서 만났을 때처럼만 대해줬다면... 내가 이렇게까지 힘들지는 않았을 텐데.그런데 뭐? “알아.” 그 짧은 한마디로, 모든 걸 너무 쉽게 넘겨버렸잖아. 내가 나 좋자고 너한테 가서 말한 거야? 적어도, 너는 그렇게 생각 안 했으면 좋겠어서... 그래서 그런 거잖아. 그렇게 말하면 나는 뭐가 돼. 여지껏 나 혼자 감정 낭비하고 있는 거였잖아.

그 생각이 드니까, 갑자기 다 한심해 보였다. 호르몬에 의해 이성을 잃고, 함부로 감정을 던지는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냥, 이 모든 게 유치했다. 그래서 없던 일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렇다고 마음이 덜 상하는 건 아니었지만 말이다.


*

학원에서 나왔다. 깜깜한 거리, 가로등 불빛이 번져 흐릿하게 깔려 있었다. 길을 걸었다. 집으로 가는 길보다 멀리 돌았다, 그냥 무작정 걷고 싶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걸으면, 조금만 더 생각하면, 이 감정도 덜해질까 싶어서...... 차가운 공기가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어느새, 소희와 함께했던 건물 앞에 와 있었다. 옥상... 그냥 한 번만 올라가 볼까? 아냐. 소희가 있을 리가 없잖아. 이 시간에 거기 있을 리 없잖아.. 그런데, 어쩌면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는 내가 싫었지만, 이미 발걸음은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조명이 들어오지 않았다. 앞이 보이지 않아 다리에 힘이 풀릴 것 같았지만, 어찌저찌 옥상까지 올라갔다.

낡은 철제문을 밀어 열자, 쇠 긁히는 소리와 함께 바람이 내 머리칼을 쓸고 지나갔다.소희는 없었다. 바닥에 버려져 있는 담배꽁초, 며칠째 같은 자리에 있는 쓰레기들. 바람 소리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어쩌면 당연한 거였다. 이 시간에 소희가 있을 리가 없잖아….

그런데도, 혹시나 하고 왔던 내가 한심했다. 소희처럼 난간에 기대어보았다. 저 멀리, 도시 불빛이 점처럼 깜빡였다. 지금쯤 소희는 뭐 하고 있을까. 나는 소희가 어디 사는지도 모른다. 소희가 뭘 좋아하는지, 뭘 싫어하는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른다. 정말, 아무것도 모른다. 소희는 나를 신경 쓴 적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냥, 나 혼자 의미를 부여하고, 혼자 서운해하고, 혼자 화내고 있었던 거다. 그렇게 생각하자 가슴이 갑자기 답답해졌다. 숨을 한번 깊게 들이마셨다. 그리고, 내뱉었다.


"…그만하자."


나는 몸을 돌려 계단을 내려갔다. 그때, 벽에 기대 있던 플라스틱 병이 쓰러져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며칠째 같은 자리에 있던 거였다. 나는 한동안 난간을 바라보다가, 다시 계단을 내려갔다. 이름 석 자밖에 모르는 사이였다.


*

집에 도착했다. 식탁 위에는 언제나처럼 영양제가 한가득 놓여 있었다. 이제는 굳이 엄마가 말하지 않아도 안다. 여기 놓인 건, 내가 삼켜야 하는 것들. 이것만 넘기면, 하루를 끝내도 된다.소희처럼, 알약을 손바닥 위에서 가볍게 굴리다가, 입에 털어 넣고 레몬차를 마셨다.

그런데, 약이 목에 걸렸다. 숨이 턱 막혔다. 작은 알약이 목구멍을 꽉 틀어막은 것 같았다. 뜨거운 레몬차를 벌컥벌컥 마셨다. 어떻게든 삼켜내려고 했지만, 목구멍은 오히려 더 꽉 막힌 느낌이었다.


화장실로 뛰어갔다. 세면대에 물을 틀었다. 일단, 소리가 필요했다. 그래야 엄마가 듣지 못할 테니까. 변기 앞에 고개를 숙이고, 손가락을 목 안으로 넣었다. 한 번. 두 번. 몸이 움찔거렸고, 마침내 약이 튀어나와 변기 안으로 떨어졌다.

그런데, 분명 약을 뱉었는데도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계속 개워내도 혀끝, 입 안, 목구멍 안쪽까지 전부 다 꽉 틀어막혀진 느낌이었다. 어디서부터 시작된 건지도, 뭐 때문인지도, 뭔지도 모를 것들로 가득 말이다. 비워도 비어지지 않는 속을, 그냥 끝까지 뒤집어 까버리고 싶었다.

그때, 무언가가 입 밖으로 쏟아졌다. 그제야 숨을 들이마셨다. 그런데 이번엔 눈물이 터져 나왔다. 다리에 힘이 풀려 벽에 등을 붙였다. 그대로 주저앉았다. 팔로 입을 닦고, 숨을 들이마셨다.그런데도,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도대체 왜 이러는지, 무엇 때문에 눈물이 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숨이 엉켜서, 목이 떨리고, 눈물이 계속 나왔다. 그냥 약을 삼켰다면, 어떻게든 삼켜내고 말았더라면, 이렇게까지 숨이 막히진 않았을까. 이렇게까지 눈물이 나지는 않았을까. 아니, 처음부터 삼킬 필요가 없었더라면... 괜찮았을까.세면대가 막혔나 보다. 물이 차오르다 못해 넘쳐흘렀다.

넘친 물은 바닥으로, 내 발끝까지 흘러내렸다. 나는 물을 틀어둔 채 그냥 그대로 있었다. 넘쳐흐르는 물이 발바닥을 적셨다.


*

창밖에서 햇빛이 얼굴에 드리웠다. 스르르 눈이 떠졌다. 그때, 엄마가 출근 준비를 하며 방문을 두드렸다.


“밥 차려놨으니까 먹고 가. 학교 늦지 말고.”


엄마는 그 말 한마디만 남기고, 다시 내 방문을 닫았다. 이내, 현관문이 열리고 다시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제야 안심하고 눈을 감았다. 학교에 가야 하지만, 가고 싶지 않았다. 아니, 가야만 한다는 사실 자체가 싫었다. 그래도 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건 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조금만 더 이대로 있고 싶었다. 나는 다시 눈을 감았다.눈을 감으면 시간이 느리게 흐른다. 이불의 감촉은 피부에 천천히 느껴지고, 숨을 내쉴 때마다 마음도 함께 가라앉는다. 세상이 멈춰 있는 듯한 기분. 지금 이대로 멈춰버린다면, 조금 더 이대로 있을 수 있을 텐데.

10분쯤 지났을까. 슬쩍 눈을 떠 시계를 보았다. 아직 5분밖에 지나지 않았다. 괜히 기분이 좋았다. 그러면, 조금 더 이러고 있어도 되니까. 나는 다시 눈을 감았다. 그런데, 이번엔 눈을 감아도 소용없었다. 햇빛이 계속 내 눈꺼풀을 찌르며, 억지로 나를 깨우려 들었다.

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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