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呼吸-6]

by 김명구
엉킨 머리카락을 풀면, 6 복사.jpg

*

버스에서 내리자, 짭조름한 바람이 코끝을 간질였다. 바람이 부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짙은 파랑으로 가득한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바다 위엔 태양이 내려앉아 황금빛 조각이 일렁였고, 파도가 밀려왔다가 부서지며 모래에 스며들었다. 우리는 가만히 서서 풍경을 눈에 담았다.

문득 생각이 들었다. 소희에게 내 이야기를 해볼까? 그러면 조금 더 가까워질 수 있을까? 하지만, 누군가에게 속마음을 털어놓는 건 익숙하지 않았고, 입을 열기도 전에 부끄러움이 먼저 밀려왔다. 나는 고개를 떨구고 나지막하게 말했다.


“난 있잖아. 너무 지긋지긋해…. 이 동네가.”


그러자, 소희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래서 꼭 서울에 있는 대학에 갈 거야.”


바닷바람에 휘날리는 머리칼 너머로, 슬쩍 소희를 보았다. 소희는 흥미롭다는 듯 입꼬리를 올리고는 내게 물었다.


“그다음엔?”

“음…. 그건 아직 생각 안 해봤는데.”

“서울 가면, 서울도 금방 지긋지긋해질걸?”

“그런가?”


나는 모래를 가볍게 발로 찼다. 바닷물을 머금은 모래가 한 웅큼 떠올랐다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 옆에서 소희는 모래를 끌어다 모으고는, 모래성을 쌓기 시작했다. 나도 모래 한 줌을 집어 들고, 소희의 모래성 위에 꾹꾹 눌러 올렸다. 이렇게 있으니, 마치 이 세상에 둘만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어느덧 모래성이 다 완성되었고, 우리는 그 옆에 나란히 앉았다. 소희의 손을 잡고 싶었다. 한참을 망설이다가, 조심스레 손을 뻗었다. 그런데, 내 손이 닿기도 전에, 소희가 먼저 내 손을 잡았다. 손가락 마디마디 사이로 소희의 온기가 느껴졌다. 순간,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여진아.”

“응?”

“제주도 가봤어?”

“아니, 아직.”

“난 어른이 되면 제주도에다 집 짓고 살 거야.”

“제주도에서? 왜?”

“그냥… 좋잖아. 바다도 있고, 숲도 있고...뭔가 자유로울 것 같지 않아?”

“그런가?”

"너도 같이 갈래?”



소희가 배시시 웃으며 나를 바라봤다. 장난스러운 소희의 표정에서 생기가 가득 느껴졌다.


“치…. 학교에선 나랑 말 한마디 안 하면서.”

“싫음 말던가~”


소희가 몸을 홱 돌려 바닷가 쪽으로 뛰어갔다.


“늦은 사람이 아이스크림 사는 거야!”

“야, 뭐야!”


나도 소희를 쫓아 뛰었다. 발밑에서 모래가 바스라졌다. 바람에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내가 소희의 그림자를 밟자, 소희가 깔깔 웃으며 더 빠르게 달려갔다. 소희의 웃음소리가 파도 소리에 섞여 이곳을 가득 채웠다.


*

우린 한참 동안 맞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소희의 피부가 보드라워서 자꾸만 만지고 싶었다. 슬쩍 소희의 손등을 간질였다. 소희는 간지럽지도 않은지 내게 손을 내어준 채 멍하니 바다를 보고 있었다.





하늘은 어느새 어둠으로 가득 찼다. 문득 생각이 들었다. 내일이 오면, 우리는 또다시 남처럼 지낼까? 모두 꿈이었던 것처럼, 서로 인사도 없이 지나칠까? 소희와 나누었던 모든 게 진짜인지 가짜인지 구별이 되지 않았다. 불안한 마음이 훅 밀려왔다. 나는 소희의 손을 더 꼭 쥐었다. 그러자, 소희가 내게 물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소희에게 내 마음을 전부 털어놓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말하는 순간, 지금, 이 순간이 깨질 것만 같았거든. 그때, 펑— 소리와 함께 하늘에 불꽃이 터졌다. 빨강, 파랑, 보라…, 형형색색의 불꽃이 검은 하늘을 환하게 수놓았다. 나는 불꽃이 시작되는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가, 슬쩍 소희를 보았다. 불빛들이 소희의 두 볼 위에도 가득 머물렀다. 그때, 소희가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카메라. 수진이가 들고 있던 카메라였다.


“…그거, 설마.”

“아, 김수진 꺼.”

“진짜 가져온 거야?”



소희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카메라를 보자, 곧바로 걱정이 밀려왔다. 가만히 있어도 우리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 난 수진인데, 우리가 스스로 먹잇감을 던져 주는 건 아닐까 싶었다.


“선생님한테 이르면 어쩌려구….”

“남의 사진 함부로 찍는 건 괜찮은 거고?”


문득 떠올랐다. 수진이가 찍어댔던 사진들. 소희를 괴롭혔던 그 표정들, 그 말들. 무리 속에서 쏟아지던 시선과 키득이는 웃음. 잊고 있던 분노가 다시금 차오르기 시작했다. 소희는 그런 나를 보더니, 내 뺨을 가볍게 쓰다듬었다.


“내일 가져다줄 거야. 걱정 마.”


소희가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그러더니, 카메라를 들어, 내 쪽으로 겨누고는 셔터를 눌렀다.


찰칵.


“찍지 마. 부끄러워.”

“왜, 예쁘기만 한데.”


갑작스러운 촬영에, 민망한 나머지 고개를 돌렸다. 소희는 피식 웃더니, 다시 카메라를 들었다. 나는 필사적으로 몸을 돌리며 카메라를 피했다.

그러다, 멀리서 불꽃놀이를 하던 커플과 눈이 마주쳤다. 그들은 웃으며 무슨 얘기를 나누더니, 우리가 있는 곳을 향해 다가왔다. 나는 무심결에 소희의 손끝을 슬쩍 잡아당겼다. 소희도 그들을 바라보았다.


“이거 해볼래요? 우리가 좀 많이 사서.”


여자분이 상냥한 목소리로 말을 걸며, 기다란 불꽃놀이 스틱 두 개를 우리에게 건네었다. 우리는 잠깐 마주 보았다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분은 기다렸다는 듯 라이터를 켜고, 스틱에 가져다 댔다. 스틱 끝에 불꽃이 옮겨붙었고, 탁탁 소리와 함께 작은 불꽃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저희가 사진 찍어줄게요!”


소희는 감사하다며 여자분께 카메라를 건넸다. 그러고는 스틱을 흔들며 카메라를 향해 웃어 보였다. 나도 카메라를 봐야 했는데, 그만 소희에게 시선이 고정되어 버렸다. 소희의 환한 미소가 너무 예뻐서, 그 미소를 언제 또 볼 수 있을지 몰라서... 불꽃이 너무 밝아 눈가가 시큰거렸다.


찰칵. 찰칵. 찰칵.


“진짜 잘 나왔어요.”


여자분이 카메라를 건네주며 말했다.


“예쁘다.”


소희가 화면을 들여다보더니, 해맑게 웃었다. 나도 고개를 기울여 화면을 들여다봤다. 사진 속에서, 우리가 흔들었던 불꽃이 커다란 원을 그리고 있었다. 여자분도 빙긋 웃으며 말했다.


“두 분 정말 친하신가 봐요.”

“네, 제일 친한 친구예요.”


소희가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그냥 웃었다. 남자분은 그런 우리를 뚫어져라 보더니 말했다.


“어릴 때 추억 많이 쌓아둬요. 크면 그걸로 먹고 살아.”

“감사합니다.”

“나도 어릴 때는 진짜 놀러 다니지도 않고 공부만 했었거든요. 그런데 나이 먹고 보니까 어릴 때 못 논 게 다 후회로…….”

“그만, 민재! 주책이야! 그럼 재밌게 보내요!”



여자분이 남자분의 팔을 잡고는, 서둘러 자리를 떠났다. 우리는 그들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었다. 그들의 모습에서, 나는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여유로움이 느껴졌다. 나도 어른이 되면, 저렇게 자유를 만끽할 수 있을까? 소희도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다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멋진 어른이다.”

“그러게.”


*

집으로 가는 버스 안, 창밖엔 깜깜한 어둠 속에서 가로등 불빛만 간간이 스쳐 지나갔다. 우리는 이어폰을 한 쪽씩 나누어 귀에 꽂았다. 소희가 들려주는 낯선 밴드의 음악은 여전히 내 심장을 두근거리게 했다. 그때, 소희가 내 어깨에 기대며 말했다.


“여진아.”

“응?”


소희가 손바닥을 펼쳐 보였다. 그 위에는 작은 메모리 카드가 놓여 있었다.


“이거, 너가 보관해 줘.”



“내가?”

“응, 잘 간직해. 우리 추억이니까.”


소희가 내 손목을 잡더니, 천천히 내 손을 펴서 그 위에 올려놓았다. 손바닥에 닿은 메모리카드엔 소희의 온기가 남아있었다. 나는 조용히, 손바닥을 꼭 쥐었다.



*

다음날, 학교는 여전히 소란스러웠고, 어제의 일은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흘러갔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교실을 둘러보다가, 슬쩍 소희를 바라보았다. 소희는 늘 그렇듯 창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 후에도, 모든 것은 평소와 같았다. 우리는 사소한 말도, 평범한 인사도 주고받지 않았다. 하지만 괜찮았다. 우리는 이제 서로 연결되어 있으니까. 난 주머니에서 소희가 준 메모리카드를 꺼내 손에 쥐었다. 메모리카드에선 여전히 소희의 온기가 느껴졌다.




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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