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도착하고, 샤워를 마치고는 침대에 누웠다.
눈을 감으니까, 민성이 생각이 났다.
우리 사이를 그렇게밖에 끝낼 수 없었을까?
바보 같은 내 모습에 원망과 후회가 밀려와 눈물이 났다.
며칠이 지나니, 민성이의 빈자리를 실감하게 되었다.
슬프고 힘들다기보단, 그냥 허한 마음이 들었다.
아무도 없는 외딴섬에 홀로 떨어진 기분.
그 기분은 별로 좋지 못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잊고 있던 졸업 준비라는 이벤트가 내게 찾아왔다. 다가오는 시험과 졸업논문 준비는 내가 그런 생각을 할 틈조차 주지 않았다.
다만, 늦은 밤 집에 혼자 걸어갈 때, 민성이의 생각이 날 때가 있었지만... 틈을 주지 않기 위해 무던히 애를 썼다. 그 틈 사이에 빠지면 어떻게 될지 아니까.
*
그 후로, 민성이와는 더이상 연락하지 않았다.
내가 어떤 욕심을 부렸는지를 알기 때문에.
심지어 우리 이별도 내 욕심이 앞당겼기 때문에.
잘 지내냐는 안부 인사를 보내는 것마저 욕심처럼 느껴졌다.
*
그렇게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고, 정신없이 현실에 치이며 살아갈 때쯤, 집에 해외 배송 택배가 하나 도착했다는 문자가 왔다. 보낸 사람은 민성이었다.
집에 도착한 나는 한동안 택배 상자를 열지 못하고, 멍하니 바라만 보았다. 상자를 열면, 민성이에 대한 그리움이 순식간에 방 안을 채울 것 같았다. 그동안 버텨왔던 내가 무너질 것만 같았다. 그걸 알기 때문에, 쉽게 상자를 열어볼 수가 없었다.
상자는 며칠이 지나서야 열어볼 수 있었고, 그 안에는 기념품들과 간식거리들, 그리고, 우리가 함께 찍었던 사진들이 들어있었다.
추운 겨울, 붕어빵을 입에 물고 밤거리를 산책하던 나.
꽃 하나 없는 벚꽃 거리에서, 덥다며 인상을 쓰고 있는 나.
마지막으로 보러 간 바다에서, 민성이를 바라보고 있는 나.
민성이는 그동안 나를 이렇게 바라보고 있었구나.
그리고, 마지막 사진 뒤편에 짧은 편지가 적혀있었다.
누나. 누나가 이 사진을 받고 어떤 마음일지는 모르겠지만.
난 우리가 나눈 마음들 모두 소중했던 추억으로 간직할 거고, 전부 잊지 않고 살아갈 거야. 누나도 좋은 기억만 간직하길 바래.
건강히 잘 지내고. 행복해.
민성이가 어떤 마음으로 이 사진을 보냈을지, 이런 말을 남겼을지, 눈에 훤히 보여서 너무나도 마음이 아팠다.
돌이켜보면, 민성이와 우연한 계기로 만나고, 겹치는 시간을 즐겁게 보냈다. 헤어질 때가 다가오자, 그러고 싶지 않아 발버둥 쳤지만, 우리는 그것을 막을 수 없었다.
결국 우린 남이 되었지만, 민성이와 나누었던 사랑에 후회는 없다. 민성이 말처럼, 함께했던 시간은 우리 머릿속에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눈물을 꾹꾹 참으며 편지지에 민성이에게 보낼 답장을 썼다. 떨어진 눈물에 편지지가 다 젖어버렸다. 하필이면, 편지지 여분도 다 떨어졌다.
편지지를 사러 나가려다가, 그래도 지금 남겨놓는 게 좋을 것 같아 카톡으로 답장을 대신했다. 쓰다 보니 길어져 장문의 메시지를 보냈지만, 민성이에게 답장은 없었다.
*
그렇게, 몇 년의 시간이 흘렀다.
어느덧 돌아왔던 봄도 또다시 끝나갔다.
나이가 들수록 시간 가는 게 무섭게 느껴졌다.
벌써 몇 살을 더 먹었다는 게 실감이 나지 않았다.
졸업 후,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겠다며 작은 출판사에 취업했다. 할 일은 산더미에, 돈은 쥐꼬리만큼 주는 게 이 업계의 특성이지만...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산다는 것에 만족하는 요즘이다.
그사이에 연애도 몇 번 했었다. 뭐 말할만한 연애는 아니다.
그냥 눈이 맞아 사귀다가, 때 되면 헤어지는 그런 뻔한 연애였지만... 뭐 그래도 나름 괜찮았다. 그것도 다 추억이라면 추억이라 생각한다.
단지, 만남과 헤어짐에 익숙해진 것일까? 아니면 더이상 사랑이라는 감정에 무뎌진 것일까. 좀처럼 예전같이 마음을 주는 게 참 어렵게 느껴졌다.
오늘도 업무에 치이고 있던 때, 대학 동기에게 오랜만에 카톡이 왔다.
-살아있냐? 살아있으면 나랑 술 먹자.
술집에 도착하니, 먼저 도착한 동기가 나를 반갑게 맞이했고, 우리는 안주가 나오기도 전에 술 한 병을 비웠다.
"요새 연애는 안 하냐?"
"하겠냐?"
"하긴......"
동병상련인 우린, 그렇게 만취할 때까지 술을 연거푸 들이마셨다.
그런데 그때, 내 앞에 나타날 수 없는 사람이 눈 앞에 나타났다.
"...취했나?"
키도 크고, 어깨도 직각에 넓고... 꽤 잘생긴 얼굴.... 민성이었다.
"...오랜만이네."
"너가 어떻게......"
"내가 불렀다."
동기는 취한 나를 민성이에게 맡기고는 자리를 떠났다.
난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내 뺨을 몇 대 쳐보았다. 아팠다.
"잘 지냈어?"
민성이가 내게 컨디션을 건네며 물었다. 난 민망한 마음에 황급히 컨디션을 들이켰고, 그제야 정신이 들기 시작했다. 민성이가 한국에 왔다는 소식은 들었지만, 우리가 마주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나야 뭐... 잘 지냈지."
오랜만에 보는 민성이는 그때와 변한 게 없었다.
민성이를 보고 있자니, 그때가 떠올라 괜히 눈가가 시큰거렸다. 민성이도 같은 마음인지, 눈가에 눈물이 고여있었고, 나는 휴지 몇 장을 뽑아 민성이에게 건넸다. 민성이는 눈물을 닦고 한참동안 나를 보다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자리 만들어달라고 했어."
"...왜?"
"보고 싶어서."
너무 놀라 민성이를 바라보았다. 민성이의 볼이 터질 것 같이 빨개져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그런 민성이가 너무 사랑스러웠고, 고맙고,
"나도 보고 싶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