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 '가난한 사랑노래, 신경림 / 시, 잠만 자는 방, 강건늘
가난하다고 해서 외로움을 모르겠는가
너와 헤어져 돌아오는 / 눈 쌓인 골목길에 새파랗게 달빛이 쏟아지는데.
가난하다고 해서 두려움이 없겠는가
두 점을 치는 소리 / 방범대원의 호각소리 메밀묵 사려 소리에
눈을 뜨면 멀리 육중한 기계 굴러가는 소리.
가난하다고 해서 그리움을 버렸겠는가
어머님 보고 싶소 수없이 뇌어 보지만 / 집 뒤 감나무 까치밥으로 하나 남았을
새빨간 감 바람소리도 그려 보지만.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내 볼에 와닿던 네 입술의 뜨거움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네 숨결
돌아서는 내 등 뒤에 터지던 네 울음.
가난하다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가난하기 때문에 이것들을 / 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가난한 사랑 노래>, 신경림, 실천문학사, 2013
시인 신경림이 서울 성북구의 길음동 산동네에 살 때의 일이다. 집 근처에 자주 들르던 술집이 있었단다.
거기에서 한 청년을 만났는데 그 집 딸과 연인 사이였다.
순박한 이 청년의 고민은 그 집 딸을 진심으로 사랑하지만, 너무 가난해서 결혼 얘기를 꺼내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청년은 그 집 딸과 헤어졌다가 다시 만나기를 여러 번 했다고 한다.
그 얘기를 듣고 시인은 청년에게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둘이 결혼하면 주례도 해 주고 결혼 축시도 써주겠노라고 약속했단다. 시인은 이들을 위해 '너희 사랑'이란 축시를 읽어 주었으니 청년의 사랑이 이루어진 것이다.
산업화 시기, 지방에서 올라온 가난한 청년, 가난하다고 해서 외로움을 모르고 두려움을 모르고, 사랑을 모르겠는가. 가난하기 때문에 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왜 모르겠는가.
감정은 살아있는 것이다. 젊은 감정을 가난하다고 죽여버리면 남아있는 것이 무엇일까.
가난하다고 해서 결코 모르지 않음을. 그도 알고, 그의 곁에 있는 이들도 안다.
사랑하지만 가난하기 때문에 너와 헤어져 누워있는 방, 그 방에 육중한 기계 굴러가는 소리 들려오고,
잠이 깬 청년은 어머니가 그립다. 집 뒤 감나무에 까치밥으로 남았을 새빨간 감 바람 소리 그려보며 사랑하는 사람의 숨결과 속사임, 울음을 떠올리는 청년의 방.
가난해서 그 모든 소중한 것을 버려야 했던 그가 결혼을 하게 되어 다행이다. 더구나 시인의 축시도 받게 되어 더욱 다행이다. 그가 가난하다는 이유로 감정을 버리거나 감추거나 누르지 않기를 바란다.
감정은 그만한 가치가 있고 소중한 것이다.
먼 훗날에 무엇이 남겠는가?
기억 속엔 감정만이 남는다.
처음 그녀와 만났던 날의 설렘, 스쳐 간 손길, 입술의 뜨거움, 그 모든 소중한 것을 가난하다고 버려선 안 된다. 1980년대의 산업화가 한창이던 어느 하루, 가난해서 모든 것을 버릴 뻔했던 젊은이의 방이었다.
골목길 안 초록색 대문
‘잠만자는방있읍니다’
추위에 떨며 한데 모여 있는 글자들 / ‘습’의 옛 추억인 ‘읍’을 간직한 채.
잠만, 오로지 잠만
아침부터 밤까지 / 씻고 먹고 생각하기도 거부하고 / 오직 잠만 자야 하는 방
잠을 깨울까 조심스럽게 낮은 도 음으로 문을 두드린다
집주인은 병명을 모르는 병자와 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
빛을 등지고 있는 어둑한 정원 /푸름을 잃은 줄기와 잎들
작은 새들은 노래를 부르지 않고 / 도도한 척하면서도 불안을 숨기고 있는 고양이는
깊은 숙면을 취하고 있다
말 그대로 잠만 자는 방이지요 잠 이외에 어떤 것도 해서는 안 됩니다 주제 없는 장편의 근심이나 슬픔 따위로 습기가 차서 곰팡이라도 생기거나 방이 무거워져 균열이라도 생기거나 하면 곤란하지요 그리고 되도록이면 친구나 티비 컴퓨터 핸드폰은 피해 주세요 당신을 더욱 외롭게 만들 뿐이니까요 이 방은 오로지 잠만 자는 방입니다 그래서 방세도 싸지요 대신 방음과 빛 차단은 확실히 해드립니다 보세요 단단하고 견고한 벽이지요
주인의 입에서는 오래된 눅눅한 낙엽 냄새가 났다
거실 벽 중앙에는
‘잠이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잠만 자는 방 있습니다>, 강건늘, 달아실, 2021
언제부터인가 ‘잠만 자는 방’이 등장했다.
대학가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잠만 자는 방’. 실로 ‘잠이 너희를 자유케’ 할까?
잠만 자는 방의 크기는 침대와 책상만 들어가는 크기라고 하니 그야말로 잠자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방이다.
어쩌다 이런 방이 생긴 걸까.
공간이라는 말의 의미를 보면 물질이 존재하고 여러 가지 현상이 일어나는 장소라 한다.
적어도 ‘방’이라는 이름을 가지려는 공간은 ‘잠만 자는 것’ 만으로는 방의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할 듯한데….
도도한 척하면서 불안을 숨기고 숙면을 취하는 고양이처럼 잠만 잘 수 있을까?
이 시에서 도드라지는 글자 ‘만’이라는 보조사다.
보조사는 우리말의 의미를 풍부하게 만들어주는 것이건만.
‘잠만’을 선택하고 나머지 다른 후보들은 자동적으로 배제시키는 ‘만’의 배타적 성격이 아쉽기만 하다. 몸도 마음도 살만한 공간으로서의 여유로운 공간의 방을 꿈꿔본다. 그들에게 만만한 가격으로 쓸 수 있는 ‘방’들이 많아지기를. ‘무엇이든 해도 되는 방 있습니다’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