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백혈병이 나에게 왔다. - 대학병원에서 3

대학병원에서 3

by 근쌤

오전 일찍 병원에 다시 갔다.

담당교수는 젊은 남자 교수로 바뀌어있었다.

누가 봐도 너무 착하고 환자에게 친절할 것 같은 인상.


하지만 모니터를 뚫어지게 보는 건

어제 그 교수와 똑같았다.

나는 이때까지만 해도

백혈병이라는 단어를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 요즘 많이 어지럽고 하셨다고요."


"네."


" 원래 운동을 많이 하셨어요?"


" 농구나 러닝을 꾸준히 해오긴 했어요.

근데 최근엔 못할 정도로 숨차고 어지러웠어요."


" 현재 적혈구 수치가 많이 떨어져서

심한 빈혈 증상, 산소 부족이 있었을 거예요."


" 아, 네. 그럼 빈혈약 먹으면 되나요?"


여기서 끝났어야 했다.

진짜 빈혈인 줄 알고 있었으니까.

여기서 끝났다면,

이런 글을 쓰고 있지도 않았겠지.



" 음.. 근데 혈액 속에서 더 안 좋은 결과가 하나 더 있는데. 골수에서 나오면 안 되는 미성숙한 세포들이

많이 보이네요."



무슨 말이지? 골수? 미성숙?


" 그럼 어떻게 해야 돼요? "


" 정확한 진단은 골수검사 - "



여기에서부터 모든 사고가 정지되었다.


내 몸엔 온전히 시각만 살아남아 교수와

그의 주변이 그저 눈에 맺힐 뿐이었다.

주위 환경과 사람들, 그 의사의 말이

나에게 어떤 정보를 전달하지는 못하였다.

설령 내가 동물적인 신경으로 그것들을 수용했다고 한들

그 정보들을 통해 생존에 있어서

어떤 판단을 내리지 못하는 상태.


머릿속에

뭉게구름이

가득 찬듯한 느낌이다.



교수의 말이 끝나고 나서 나는 잠깐의 침묵이 필요했다.


나의 침묵을

잠시나마 지켜주는 젊은 교수가

적어도 영업하는 사람처럼

서둘러 말하지 않아서 고마웠다.


그 짧은 침묵 사이에

정지된 내 사고와 판단을

짧게라도 다듬을 수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어떤 말이 필요한지 가늠되지 않았고,

그냥 이 말이 나와야 할 것 같은 느낌에

전혀 생각해보지 못한 단어를 꺼내어 물어봤다.


" 그래서 백혈병이라는 말씀.. 이신가요? "




사실 나는 백혈병이라는 단어와 어렸을 때 보았던 드라마에서 나온 이미지만 피상적으로 기억한다.

약 30여 년 세월 간 백혈병이라는 단어를

꺼내어본 적도 없고 생각해본 적도 없으며

실제로 눈앞에서 목격한 기억도 없다.

그런데

그냥 본능적으로 튀어나간 그 말에

스스로 놀랐다.




" 아직은 확진이 아니니까 검사를 해봐야 제가 말씀드릴 수 있어요. 오늘 짐 챙겨 오시면 바로 입원 후 내일 골수검사 진행해드리겠습니다."


" 아니.. 저 말이 안 되는 거 같은데. 제가 왜 걸려요? "


" 현재 의학으로는 원인을 특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냥 교통사고 당하신 거랑 똑같다고 보시는 게 마음 편하십니다."


" 아니 안되는데. 지금 당장 치료해야 되는 거죠? 말기인가요? "


" 백혈병은 따로 몇 기로 나누진 않고..

급성이라서 치료 시기를 놓치면 빠르면 3개월 ~ 6개월 안에 감염으로 사망할 수도 있습니다.

최대한 치료 빨리 받으셔야 해요. "


" 무슨... 3개월이요? 말도 안 돼.. 치료받으면 살 수 있나요? "


" 최근에는 치료성적이 많이 좋아져서

3분 중에 2분은 일상생활 계속 이어가십니다. "


나를 안심시키려는 듯 말인가?

교수의 말이 끝나고,

내 귀와 머릿속에 맴도는 것은

'3명 중 2명'이라는 말이었다.

그럼 나머지 1명은 어떻게 되는 거지?

내가 그 1명이라면?


" 환자분 받아들이기 쉽지 않으실 거예요.

지금은 어느 병원을 가던 표준 치료방식으로 똑같이 진행이 될 거니까,

가족과 상의해보시고 어디서든 빨리 치료받는 게 중요합니다.

입원 수속은 미리 해두시고 만약 서울로 가실 거면 간호사님께 접수해드리면 바로 진료의뢰서 써드릴게요."



이 말을 끝으로도 나는 일어나지 못했다.


간호사의 부축을 받아 겨우 진료실을 나왔다.

담당 간호사가 입원 수속을 일단 진행하라고 이것저것을 안내해주었는데

이미 나는 판단력을 상실한 상태였고

그냥 잠깐이라도 혼자 앉아있고 싶었다.

그러나 아직 그럴 정신은 있었는지

차마 바닥에 주저앉지는 못하고 앉을자리가 없는지 봤다.


자리를 찾아 둘러보다가

로비에 앉아 대기 중인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들은 어제와 다르게 너무 친근하게 느껴졌다.

나도 이제 여기 이 사람들의 일원,

그것도 백혈병 환우가 되었다는 것이 명백함에도

믿고 싶지는 않아서

애써 부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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