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전라도에서 나고 자랐다고 들었다. 할아버지는 할머니와 결혼 후 서울로 올라오셨고 마포에 자리를 잡으셨다. 할아버지의 여동생들, 나에겐 고모할머니들도 같은 동네에 자리를 잡았다. 그 동네는 친가 친척들이 가까이 사는 집성촌 아닌 집성촌이 되었다.
엄마와 아빠가 결혼한 지 3년쯤 되었을 때, 아빠는 아직 국가고시를 준비하는 고시생이었다. 아빠는 고시원에서 살고 할머니는 일본에 잠시 일하러 간 상태라 할아버지와 엄마, 언니, 나까지 네 식구가 같이 살았다.
아빠가 고시생 시절 언니와 나에게 쓴 편지 : 참고로 나는 유치원 갈 나이도 아니었으며 한글도 읽지 못했다. 아마 어린이집과 착각한 게 아닐까 싶다.
할아버지는 어느 날 엄마와 우리를 데리고 집을 보러 다니셨다고 한다. 할머니와 아빠가 돌아오기 때문인지, 엄마한테 마음을 여셔서 인지는 잘 모르겠다. 엄마는 마포에 있는 집을 할아버지가 사주셨다고 말하곤 했다.
할아버지는 건축일을 하셨다. 그래서 좋은 집을 잘 알아보셨다고 한다. 그럼에도 엄마에게 집을 고르라고 하셨다. 그때 할아버지와 엄마는 투자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이 없었다. 지금의 할머니 집 근처에서 한강 쪽으로 조금 더 들어가면 있는 동네도 보았지만, 마을버스를 타고 들어가야 해서 맘에 안 들었다고 했다. 그 동네는 지금 재개발이 되어서 집값이 훨씬 많이 올랐다.
엄마는 집은 잘 모르겠고 원래 살던 동네에서 가장 널찍한 집을 골랐다고 했다. 할아버지는 잘 지어진 집이라며 엄마가 고른 집을 만족해하며 사셨다. 방 세 개에 23평(전용면적 74.4㎡)인 그 집은 반지하를 포함해 4층이 전부인 빌라에 위치해 있다. 내가 이사를 준비하면서 등기부등본을 떼어보니 그 집은 91년도에 지어져서 나랑 동갑이다.
약 30년 전에는 그 빌라가 새로 지은 건물이었고 동네에서 가장 큰 평수였다고 한다. 동네에 어울리지 않게 크고 비쌌던 탓에 2년 정도 팔리지 않았고, 우리가 그 빌라에 마지막으로 들어갔다고 했다. 아직도 그 동네는 개발이 되지 않아 아파트가 없고 10평대의 빌라가 많은 곳이다.
내가 세 살 때 그 집으로 이사를 갔고, 나는 그 집에서 6살 때까지 살았다.부모님은 아빠가 직장을 경기도로 옮기면서 자연스럽게 분가하게 되었다. 그 집에는 할머니와 할아버지만 사셨고, 분가한 지 얼마 안 되어서는 부모님이 바쁘셨기에 할아버지 댁에 자주 가지 못했다.
내가 너무 어릴 적에 살았기 때문에 그 집에서의 기억은 그리 많지 않다. 그래도 나는 그 집에서 많은 처음을 경험했을 것이다. 첫 심부름, 첫 한약, 첫카레라이스... 그리고 또 할아버지가 사탕을 사 먹으라고 오백 원씩 주시던 것, 할아버지가 드시던 목캔디의 맛, 계단에서 넘어져 미간을 꿰맸던 일, 아파서 안방에 누워있던 일 등이 드문드문 기억난다.
어린 시절 할머니 집에서
할아버지가 엄마와 고르고 구입했던 집을 할머니 집이라고 부르게 된 이유는 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갈 때쯤에 할아버지가 사고를 당하셔서 병원에만 계셨기 때문이다. 할아버지의 부고 소식을 들은 건 초등학교 2학년 때였다. 할아버지는 일 년 넘게 병원에 계시다가 돌아가셨다. 그 후로는 할머니가 그 집에서 혼자 사셨다. 그래서 우리는 그 집을 할머니 집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할머니가 쭉 그곳에 사시다가, 10년 전에 할머니의 친가 친척들 근처로 이사 가시면서 세입자를 받았다. 그리고 할머니가 그 사이에 나이가 드시고 다리 수술을 몇 번 하시면서 부모님과 다시 같이 살게 되었다. 내가 26살이었고, 나는 그때부터 자취를 시작했다. 처음 받은 세입자가 4년을 살고, 다음 세입자가 지금까지 6년을 살았다. 지금 세입자의 요청으로 6년 전에 화장실 세면대와 변기, 부엌의 싱크대, 도배를 바꿔줬다고 한다.
그 후 6년 동안 세입자와 한 번도 연락하지 않았다. 당연히 집세도 올린 적이 없고 수리도 해준 적이 없다. 그 집은 우리 가족의 기억 속에 지워진 채였다. 내가 6년의 자취 생활 동안에도 그 집에 들어갈 생각을 하지 못할 정도였다.
6년 전에도 싸게 내놓은 집이었는데 서울의 전셋값이 훌쩍 뛰면서 이제 할머니 집은 내 원룸보다 싼 전세가 되었다.
전세 기간이 만료를 앞두고 다음 집을 걱정하고 있는 나에게 엄마는 할머니 집으로 들어갈 것을 권유했다. 나는 할머니 집을 낡고 오래된 집으로 인식하고 있어서 걱정이 되었다. 기억 속에 할머니 집은 할머니 냄새가 가득하고 먼지 또한 가득했다.
엄마는 그 집은 잘 지어져서 냄새도 안 나고 장판도 자재도 다 좋은 걸로 되어 있다고 꼬셨다. 할머니 냄새는 할머니가 워낙 청소를 하지 않으셔서 그런 거라고 말했다. 어디 하나 부서지거나 고장 나지 않은 튼튼한 집이라고. 엄마의 말은 믿음직스럽지 못하지만, 할아버지가 인정한 집이니만큼 쓸만한 집인 건 맞지 않을까 싶다.
우리가 그곳에 살지 않는 동안 동네도 많이 바뀌었다. 여전히 재개발은 되지 않았지만 지하철역도 생겼고, 음식점이 즐비한 거리도 유명해졌다. 그래도 걱정인 것은 아무리 기억을 떠올려도 그 집의 구조밖에 기억나는 게 없다는 것이었다. 채광이나 습기, 방의 크기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또한 내 경제력에 비해 너무 큰 집이 부담스럽기도 했다.
내 생각이 바뀐 건 서른한 살이 되고 나서부터였다. 2년마다 이사를 다니는 게 한층 더 지치기도 했고, 언제까지 전세난민 생활을 해야 하는지 우울한 기분을 느낄 때도 많았다. 나이는 먹어가는데 내 삶은 언제 나아질까 하는 막막함도 종종 괴롭혔다. 좁은 자취방에 누워 나는 이렇게 원룸에서 썩어가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 원룸에서 마저 쫓겨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도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