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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띵프 Sep 20. 2020

베니스에서 해와 달은
낮게 뜬다

[낭만으로 마주한 현실, 베니스 교환일기 EP09]

 베니스 여행을 해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베니스의 해와 달은 유독 낮게 뜨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실제로 낮게 뜨는 건 아닐 테고, 건물이 낮은 탓이리라.

 베니스엔 높은 건물이 없다. 지반이 무게를 견디지 못하기 때문일 수도 있고, 굳이 높은 건물을 올릴 필요가 없기 때문일 수도 있다. 어차피 베니스는 관광도시이니까. 어쨌거나 고만고만한 높이의 건물들 덕분에, 서울에 있을 땐 고층 건물 끝에 걸려 절대 닿을 수 없을 것만 같던 해와 달이 손으로 잡고 싶은 욕망이 생길 만큼 가까이 다가온다.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모든 것은 상대적이라는 건데, 이는 해와 달만의 문제는 아니다.

 베니스에 있는 반년 동안 나는 배를 타고 학교를 다녔다. 베니스 본섬에서 배로 10분 거리에 있는 작은 섬에 학교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해가 뜰 때마다, 그리고 해가 질 때마다 배를 타고 바다 한복판을 가로질러 등하교를 했다.

 처음엔 마냥 좋았다. 등굣길에 일출을 볼 수 있다니! 하굣길에 일몰을 볼 수 있다니! 시시각각으로 바뀌는 바다색을 들여다보며 바다는 마냥 파란색이 아니라 분홍색이기도, 보라색이기도, 또 검은색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배우곤 했다.

 그러나 하루 이틀이었다. 이내 바다가 질렸다. 반복되는 배 타기에 무료함을 느꼈다. 배가 아니면 육지로 나갈 방법이 없다는 사실에 더욱 진절머리가 났다. 나를 베니스에 가둬 놓고서는 '배'라는 선심을 쓰는 것 같아 괜한 거부감이 들었다. 배라면 더 이상 타고 싶지 않았다. 배 타면 10분이면 갈 거리를 뺑 돌아 1시간을 걸었다. 그러면서 서울을 그리워했다. 서울에선 버스, 지하철만 타면 어디든 갈 수 있었는데. 인왕산에 올라 즐기는 일몰도 예술이었는데.

 그리고 그때부터 바다는 더 이상 파란색에서 분홍색, 보라색, 검은색으로 변하지 않았다. 내가 흥미를 잃으니 바다 역시 자신이 변하는 과정을 보여주지 않았다. 배를 탈 때 파란색이었고, 내릴 때 검은색이었다. 베니스 살이 한 달째부터 나에게 베니스 앞바다의 색은 파란색과 검은색뿐이었다.


 서울로 돌아온 요즘, 그때 사진들을 다시 들여다보며 깜짝깜짝 놀란다. 베니스 앞바다가 이렇게나 예뻤나? 색이 이렇게나 다채로웠나? 윤슬이 이렇게나 아름다웠나? 뭐 이런 것들. 곁에 두고서 지루함을 느꼈던 것들에 다시 매력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있을 때 잘하라'는 말은 얼마나 촌철살인의 말인가.


 사람 마음에 비해면 해와 달이 낮게 뜨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닌 게 된다. 마음이란 게 이렇게나 상대적이고 간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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