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으로 마주한 현실, 베니스 교환일기 EP10]
함께 교환학기를 보내던 친구들이 '돌로미티'에 가고 싶다는 이야기를 했을 때까지만 해도 난 돌로미티가 무엇인지도 몰랐다. 유럽에는 워낙 많은 관광지가 있으니까, 사람들이 많이 찾는 유명 관광지 중 하나이겠거니 생각했다. 한 친구가 나에게도 돌로미티에 함께 가지 않겠냐며 물었고, 나는 그제야 인터넷에 돌로미티를 검색해 보았다.
그때 발견한 것이 바로 빨간 산장 사진이었다. 대자연 속에서 대놓고 존재감을 뽐내는 저 빨간 산장이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 순간, 다른 것들을 생각지도 않은 채 돌로미티행을 결정했다(앞선 글에서도 알 수 있듯이, 나는 꽤 즉흥적인 편이다). 나의 목표는 당연히 저 빨간 산장이었다. 직접 돌로미티에 올라 저 빨간 산장 사진을 찍고 오리라 마음먹었다. 그 후에 찾아본 바, 돌로미티는 돌산으로 산세가 험해 장비를 단단히 챙기고 가는 사람들이 많았다. 내가 가진 장비라고는 트레이닝복에 운동화가 전부였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이미 내 머릿속에는 빨간 산장만이 가득했으니까.
돌산 트레킹을 겁내는 친구들도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직접 산에 올라 산장에서 하루를 보낼 '산장파'와, 산은 풍경으로만 즐기고 근처 도심에서 하루를 보낼 '도심파'로 나뉘었다. 나는 발 빠르게 산장파를 자처하며 함께 트레킹 할 친구들을 끌어 모았다. "이런 때가 아니면 언제 산장에서 자 보겠냐"며 친구들을 꼬셨다. 그때까지도 나의 목표는 빨간 산장 하나뿐이었다.
목표가 확실했던 나는 직접 나서서 트레킹 코스를 짰다. 1박 2일의 짧은 트레킹이었기 때문에 첫날에 무조건 저 빨간 산장에 도착해야만 했다. 해가 지기 전에 빨간 산장에 도착해 저녁을 먹고, 저 산장에서 하루 묵는 것이 목표였다.
처음 만난 돌로미티는 말 그대로 장관이었다. 함께 산장행을 택한 친구들도 "역시 오길 잘했다"며 감탄해 마지않았다. 철저히 사람에 의해 만들어진 베니스에 있다가 온전히 자연이 만든 돌로미티를 만나니 새로웠다. 이때 우리는 깨달았어야 했다. 보기 좋은 것은 '볼 때나 좋다'는 것을.
앞서 말했듯이 돌로미티는 돌산이다. 걷기 좋은 풀밭을 지나면 곧바로 경사가 높은 바위들이 나타난다. 그 바위들을 밟으며 올라야 하는 곳이 돌로미티이다.
물론 나는 괜찮았다. 평소에도 걷는 걸 좋아하고 한국에 있을 때에도 종종 등산을 했기 때문에, 카메라가 무겁기는 했지만 충분히 버틸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다른 친구들은 그렇지 않았다. 체력이 부쳐 낙오되는 친구들이 생겨났다. 계획된 루트의 중간쯤에 다다랐을 때부터는 불만 섞인 목소리도 나오기 시작했다. 내가 왜 산장파를 선택했을까, 이젠 돌아가기 어렵겠지, 도대체 언제 도착하는 거야, 여기가 도대체 어디야, 배고프다.
이때부터 나는 조금씩 불안해졌다.
'오늘 안에 빨간 산장에 도착할 수 있을까?'
돌로미티에 온 유일한 이유가 빨간 산장이었던 나에게는 꽤 중요한 문제였다. 뒤쳐지는 친구들을 열심히 북돋우면서도 내 머릿속은 빨간 산장으로 가득했다.
한참을 걷다 보니 시간은 오후 5시를 지나고 있었다. 해는 뉘엿뉘엿 지고 있었고, 배도 고파 왔다. 식사시간이 다가오기도 했고, 계속해서 체력을 썼으니 허기가 지는 게 당연했다. 다행히 이름 모를 푸른 산장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고, 우리는 일단 이 산장에서 저녁식사를 해결하기로 결정했다.
우연히 찾은 산장 치고는 대체로 좋았다. 따뜻한 국물요리와 빵 몇 조각을 먹으며 속을 데울 수 있었고, 오랜 트레킹에 지쳐 잃어버렸던 대화도 이어갈 수 있었다. 대화 주제는 주로 '죽을 것 같다'라던지, '더 갈 수 있을까?'같은 것들이었다. 식사를 마칠 쯤엔 이미 노을이 지고 있는 상태였다.
물론 나에게 선택권이 있는 건 아녔지만, 산장파를 이끌고 온 사람으로서 나는 선택을 해야만 했다. 어떻게든 1시간을 더 걸어 빨간 산장에서 묵을 것이냐, 아니면 지금 이 푸른 산장에서 묵을 것이냐. 푸른 산장의 주인은 "휴대폰 불빛으로 바닥을 비추며 갈 수는 있겠지만 밤 트레킹을 추천하지는 않는다"며, 푸른 산장에 빈 방이 있다는 사실을 강하게 어필했다.
어려웠다. 내가 돌로미티에 온 유일한 이유가 빨간 산장이었는데, 파란 산장에서 묵어야 한다니. 산장 색깔도 참 절묘했다. 빨간 산장과 파란 산장이라니.
한참을 고민하다가 창밖을 보았다. 근데, 너무 예뻤다. 창밖으로 보이는 뷰가 너무 예뻤던 거다. 그때 마음이 확 바뀌었다. 빨간 산장은 아니지만 이 곳도 산장이긴 하니 산장에서 묵겠다고 했던 큰 목표가 바뀐 건 아녔다. 방값도 빨간 산장보다 저렴했고 주인장도 꽤 친절했다. 무엇보다, 푸른 산장에서도 충분히 멋진 뷰를 볼 수 있었다. 급하게 빨간 산장을 향해 떠났더라면 볼 수 없었을, 창밖으로 시시각각 변하는 돌로미티의 모습들을 충분히 즐길 수 있었다. 그래서 친구들에게 말했다.
"우리 그냥 오늘 여기서 묵을까?"
돌아오는 대답은
"오빠가 그렇게 말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어."였다. 내가 너무 확고하게 빨간 산장을 이야기하니, 아무도 멈추자는 말을 못 했던 거였다. 멋쩍게 미안하다는 말을 건넸고, 곧장 빨간 산장에 전화를 해 예약을 취소했다.
우리는 '여기에서 멈춤'을 자축하며 술을 한 잔씩 마셨고, 밤에는 다 같이 검은 하늘에 촘촘히 박힌 별을 보러 나갔다. 자연 앞에서 인간의 계획이란 게 애초에 얼마나 의미가 있겠냐마는, 계획대로 되지 않았어도 충분히 행복했던 밤이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