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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띵프 Sep 09. 2020

내가 만난 건
기예르모, 알폰소 쿠아론이었다

[낭만으로 마주한 현실, 베니스 교환일기 EP08]

 잠시 2020년 8월의 이야기를 하려 한다.

 불과 몇 주 전이었다. 나는 친구의 추천을 받아 영화 <판의 미로 - 오필리아와 세 개의 열쇠>를 보게 되었다. 다소 기괴한 영상미에 다양한 해석이 열려 있는 작품이라 퍽 마음에 들었다. 감독을 찾아보니 '기예르모 델 토로', 여기저기서 몇 번 들어본 적 있는 감독이었다. 넉넉한 풍채에 희끗한 수염이 덥수룩한 게 예술가의 향기가 물씬 풍겼다. 

 혹시 여기까지 읽고서 '영화 본 거랑 베니스가 무슨 관련이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조금만 기다려 주시라. 이제 시작이니까!

 아무튼 그렇게, 영화를 추천해 준 친구와 함께 영화에 대해서, 또 감독에 대해서 카톡을 나눴다. 그런데 이 얼굴, 수염으로 뒤덮인 둥그스름한 기예르모의 얼굴이 왠지 모르게 낯이 익은 거다.  친구와 카톡을 하는 내내 기예르모의 얼굴에서 강력한 기시감을 느꼈다. 

 '어디서 봤더라...?'

 하고 세 번쯤 곱씹었을까? 갑자기 무언가가 머리를 스쳤다. 나는 부리나케 자리에서 일어나 내 카메라의 전원을 켰다. 그리고 한 컷, 한 컷 과거로 거슬러 올라갔다. 백 장 가까이 넘겼을까, 카메라 화면에 2018년 베니스 국제영화제에서 찍었던 사진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내, 내가 기예르모의 얼굴에서 느꼈던 익숙함의 원인을 찾아낼 수 있었다.

내가 찍은 기예르모 델 토로. 장난기 넘치는 표정이 인상적이었다(그래서 코미디언인 줄 알았다지...)

 그렇다. 베니스 국제 영화제에서 기예르모 델 토로의 사진을 찍었던 것이다. 기억을 더듬어 보니,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유쾌한 것을 보니 코미디 배우쯤 되나 보다!'하고 사진을 찍었던 것 같다. 

 '기예르모 사태' 이후, 나는 직감적으로 내가 베니스 국제 영화제에서 찍었던 또 다른 이름 모를 사람들도 유명인일 가능성이 높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즉시 SD카드를 털어, 베니스 국제 영화제에서 찍었던 사람들의 사진을 친구에게 보냈다. 그리고 말했다.

 "이중에 아는 사람 한 명이라도 더 있는지 봐줘봐..."

내가 찍은 알폰소 쿠아론. 이탈리아의 중견 배우 정도로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아니나 다를까, 내가 찍은 사람들은 하나 같이 유명한 사람들이었고, 그중 한 명은 영화 <그래비티>와 <로마>의 감독인 알폰소 쿠아론이었다. 알폰소 쿠아론은 알았지만 그의 얼굴을 알 리가 없었던 나는 알폰소 쿠아론을 보며 '모르긴 몰라도 사람들이 저렇게까지 호응하는 걸 보니 이탈리아의 유명한 중견 배우인가 보다!' 생각했더랬다.

 물론 그들은 코미디언도, 이탈리아 중견 배우도 아닌 '기예르모'와 '알폰소 쿠아론'이었다. 이렇게 나는 다시 만나기도 어려운 거장 2명을 찍어 와서는 2년이나 묵혀두었다.  나는 이 2년짜리 뒷북에  '200820 베니스 국제영화제 사건'이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나의 현실은 늘 이렇게나 뒷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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