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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띵프 Jul 20. 2020

베니스 국제 영화제에서
나오미 왓츠를 만났다.

[낭만으로 마주한 현실, 베니스 교환일기 EP06]

믿기지 않겠지만, 제가 직접 찍은 것 맞습니다.


 베니스에 오자마자 노트북을 망가뜨린 나였지만 이런 나에게도 아직 낭만은 남아 있었으니, 바로 ‘베니스 국제 영화제’였다. 영화를 잘 모르는 사람이라도 ‘세계 3대 영화제’에 대한 이야기는 한 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베를린 국제 영화제, 칸 영화제, 그리고 베니스 국제 영화제. 때마침 나는 베니스였고, 내가 베니스에 도착한 그 주말에 2018 베니스 국제 영화제의 폐막식이 예정되어 있었다. ‘이 기회를 놓치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다!’ 생각하며 곧장 리도 섬으로 향했다.

 리도 섬. 베니스 국제 영화제가 열리는 베니스 근처 섬이다. 베니스 본섬에서 배 버스인 바포레토를 타고 20~30분 정도를 가야 한다.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같은 바포레토를 타게 되는데,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어떻게 헤치고 내려야 하나?’ 같은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왜냐하면, 8월 말에서 9월 초에 리도 섬을 향하는 바포레토를 탄 사람의 99%는 영화제를 찾는 관광객이라, 그들이 우르르 내리는 곳에서 함께 내리면 되기 때문이다! 그냥 바포레토 밑바닥에서 튀어 올라오는 물방울과 바포레토 천장이 만드는 선선한 그림자를 즐기면 그만이다.


이게 바로 '스프리츠'이다. 베니스에 간다면 꼭 마셔 보시라!

 부푼 마음으로 도착한 리도 섬은 생각보다 조용했다. 좁은 땅덩어리에 사람들로 가득 찬 서울 살이에 익숙해진 탓인가, 국제적인 행사치고 소박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물론 영화제 행사장은 멋졌다. 흰색에 빨간색으로 포인트를 준, 깔끔하면서도 모던한 느낌이었다. 사람들도 손에 빨간색 와인 같은 음료를 하나씩 들고 있었는데, 바로 베니스에서 즐겨 마시는 ‘스프리츠’이다. 화이트 와인에 빨간색을 띤 술인 아페롤, 혹은 깜빠리를 더한 후 탄산수로 마무리한, 가벼운 술이라고 보면 된다. 결과적으로 붉은색을 뗘, 베니스 국제 영화제의 전체적인 무드와도 잘 어우러졌다. 깔끔하면서도 고급스러웠다. 이게 바로 내가 느낀 베니스 국제 영화제의 첫인상이다.

 그러나, 그게 전부였다. 매표소에서 받은 팸플릿을 아코디언처럼 열어 봐도 도대체 어떤 작품이 상을 탄 작품인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너무 많은 영화가 나열되어 있었고, 나는 마치 정보의 홍수 속에서 허우적대는 느낌이었다. 일단 폐막식 티켓은 현장에서 구할 수가 없는 것 같았고, 가장 빨리 시작하는 영화를 보기로 함께 간 친구와 결론을 내렸다. 대신 폐막식장에 들어가는 배우들의 레드카펫 현장을 구경하기로 했다. 사실 우리의 목적은 한국에서 쉽게 볼 수 없는 외국 배우들을 보는 것이었다. 영화 속에서만 보던, 그 멀게만 느껴지던 배우들을 내 두 눈으로 직접 볼 수만 있다면! 내가 고른 영화는 알고 보니 단편영화 모음이었다. 뭐, 괜찮았다. 레드카펫이라는 새로운 목표가 생겼으니 말이다.


 레드카펫 앞은 오후 2시부터 붐볐다. 우리와 같은 생각을 한 사람들이 그 뙤약볕 아래에서 맨 앞줄을 차지하고 있었고, 커다란 카메라를 든 사람들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나와 친구는 4시쯤부터 기다리기 시작했고, 앞에서 2번째 줄에서 폐막식장으로 들어가는 배우들을 볼 수가 있었다. 오후 6시쯤 되었을까, 배우들이 하나둘 레드카펫을 밟고 지나가기 시작했으나, 대체로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유럽인들을 익히 잘 아는 얼굴들인 것 같았으나, 한국인인 내가 아는 배우들은 아녔다. 분명 아까 맨 앞 줄에 서있던 사람이 엠마 왓슨이 온다고 했던 것 같은데, 엠마 왓슨은커녕 얼굴을 알아볼 수 있는 배우조차 없었다.

 기약 없는 기다림에 지쳐갈 때쯤, 앞줄 왼쪽 끝에서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NAOMI!! NAOMI!!!!”

 나오미? 나오미가 누구야?

 “NAOMI!! HERE!!!”

 사람들은 나오미를 카메라에 담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까만 드레스를 멋지게 차려 입고 여유 있는 미소를 짓던 나오미는 알고 보니 ‘나오미 왓츠’라는 배우였다. 이름깨나 들어 본 배우였으나, 그가 출연한 영화를 본 기억은 없었다. 그러나, 일단 카메라를 들었다. 내가 이름을 아는 유일한 배우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외쳤다.

 “NAOMI!!!! HERE!!!!”

 그렇게 일면식도 없는 나오미를 목청껏 외쳐 건진 사진이 위에 보이는 저 사진이다. 나를 본 것인지, 내 왼쪽에 있는 내 친구를 본 것인지 알 수는 없으나, 어쨌거나 나의 “HERE!”에 반응한 나오미. 이게 마지막이었다. 그 뒤로도 내가 기대했던, 내가 아는 배우는 한 명도 등장하지 않았다. 

 누군가가 나에게 ‘베니스 국제 영화제에서 무엇을 보았냐’고 묻는다면, 내가 할 수 있는 대답은 황금사자상 수상작도 아니고 엠마 왓슨도 아닌, 얼굴도 모르고 찍은 ‘나오미 왓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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