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띵프 Jul 08. 2020

베니스에서 노트북을 고치는 데 드는 비용, 120유로

[낭만으로 마주한 현실, 베니스 교환일기 EP04]

독서를 위한 최고의 환경. 노트북에게는 영 아닌 환경.

 다음 날. 눈을 뜨자마자 생각났다. 내 노트북! 어젯밤, 와인에 푹 절여진 내 노트북 말이다.

 14시간 거리 타지에서 갑자기 노트북이 고장 난다면 당신은 침착할 수 있겠는가? 아쉽게도 나의 경우는 그렇지 않았다. 아침부터 친구들에게 온갖 걱정과 투정이 뒤섞인 카톡을 보냈다.

 ‘이야, 이거 어떡하지?’

 ‘이거 얼마나 들까?’

 ‘아니 애초에 노트북 수리 센터가 있긴 한가? 베니스에?’

 뭐 이런 것들. 일단 급한 대로 네이버 검색창에 ‘베니스 노트북 수리’를 쳐봤지만, 역시 나오는 건 없었다. 어느 한국인 여행객이 베니스에 와서 노트북을 고치겠는가. 설사 베니스 여행 중에 노트북이 고장이 났다고 하더라도 ‘에이!’ 아쉬운 소리 한 번 하고는 한국에 가져가서 고칠 테지. 검색 결과가 다시 한번, 나는 베니스에 살기 위해 온 사람이라는 것을 일깨워 주었다. 

 다음 타깃은 ‘구글 맵스’였다. 구글 맵스 검색창에 ‘laptop fix’를 검색했고, 3개 정도의 결과가 나왔다. 정확히 무얼 하는 곳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내 처지에 따지고 가릴 게 없었다. 세 군데 중 가장 가까운 곳부터 찾아 나섰다.


 골목골목을 지나 작은 운하 옆에 자리한 첫 번째 수리센터. 베니스에 와서 첫 번째로 찾은 매장이 노트북 수리 센터라니. 억울했고, 또 불안했다. 한국에서도 몇 번 가본 적 없는 노트북 수리 센터를 베니스에서 오다니. 게다가 말도 통하지 않는데! 건너편 운하에서 수리센터 안쪽을 슬쩍 살펴보니 이미 손님이 와 있었고, 이탈리아어로 무어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당연하다, 여기는 ‘이탈리아’이니까. 이탈리아어를 못하는 내가 이상한 것이었다. 교환학기 떠나기 전 학교에서 제공한 무료 이탈리아어 강의를 조금 더 열심히 들을걸, 후회했다.

 한 15분쯤 밖에서 기다렸나, 앞선 손님이 수리센터를 떠났다. 쭈뼛쭈뼛 주변을 살피던 나는 조심스럽게 수리 센터의 문을 열었다.

 “차… 챠오!”

 할 줄 아는 몇 안 되는 이탈리아어 중 하나인 인사말을 조심스레 건네며, 수리센터 사장님의 눈치를 살폈다. 그리고선 가방에서 다짜고짜 노트북을 꺼내 보여주었다. 짧은 영단어 몇 개를 조합해, 내가 노트북에 와인을 쏟았고 전원이 켜지지 않는다는 말을 전했다. 이탈리아어 하나도 할 줄 모르면서 이탈리아에서 노트북을 고치겠다는 내 모습이 얼마나 우스워 보일까, 생각했다. 다행히 사장님은 친절했고, 여기서 고칠 순 없지만 다른 곳을 알려주겠다고 하셨다. 매장에서는 15분 정도 걸어가야 했다.

 “그라찌에! 그라찌에 밀레!”

 역시나 할 줄 아는 몇 개의 이탈리아어 중 하나인 감사 인사를 남기고 첫 번째 매장에서 나왔다.


 두 번째 매장은 섬 중심부 깊은 곳에 위치한 작은 가게였다. 통유리로 된 진열장엔 햇빛에 바랜 노트북 몇 대가 특가로 나와 있었고, 벽면에는 중고 키보드며 마우스까지 줄줄이 달려 있었다. 어딘가 께름칙했지만, 앞서 말했듯 내가 뭘 가리거나 따질 처지가 아녔다. 첫 번째 가게에서 느꼈던 친절함에 용기를 얻은 나는 조금은 힘차게, 두 번째 수리센터 문을 열었다.

 두 번째 수리센터의 사장님은 레게머리를 하고 축축 늘어진 옷을 입은 히피였다. 다행히 이 사장님은 영어를 조금 할 줄 아는 분이었다. 영어로 어제 있었던 일련의 사건을 전달했고, 사장님은 내 노트북을 이리저리 살피더니, 나에게 겁을 주기 시작했다. 와인은 끈적끈적하기 때문에 안에서 어떻게 노트북을 망가뜨리고 있을지 모른다, 열어봐야 결과를 알 수 있다, 내가 볼 땐 배터리 문제인 것 같은데 여기서 내가 직접 열어볼 수는 없고 내가 아는 수리센터에 보내서 확인해보겠다. 그러고선 작은 종이에 영수증 비슷한 걸 써주었다. 내용은 이러했다.


 ‘노트북 열어서 확인하는 비용 : 40유로

  배터리 이상으로 확인되면 배터리 교체 비용 : 80유로

  인건비는 받지 않음!’


 120유로는 한국 돈으로 약 16만 원. 그러니까 나는 베니스에서 도착하자마자 길바닥에 16만 원을 날린 셈이다. 그러나 그때의 나에겐 고칠 수 있다는 희망 자체가 필요했다. 16만 원을 내서 고칠 수만 있다면, 고친 노트북으로 글도 쓰고, 사진도 편집할 수만 있다면! 아침을 시리얼로 때우고, 점심은 생략하고 저녁을 간단하게 먹으면서 식비를 줄여야겠다, 다짐했다. 눈물을 머금고 선금 40유로를 먼저 전달했다. 그렇게, 40유로로 베니스에서의 낭만을 유지할 희망을 구입했다. 

 곧 알게 되겠지만, 그 희망은 나의 구원이 되어 주지는 못했다. 


이전 03화 베니스에 도착한 이튿날,
 노트북에 와인을 쏟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