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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띵프 Jul 01. 2020

베니스에 도착한 이튿날,
 노트북에 와인을 쏟았다.

[낭만으로 마주한 현실, 베니스 교환일기 EP03]

와인을 마실 땐 노트북을 조심하자. 특히 베니스에선!


 2018년 9월, 베니스에 도착하고 하루가 지난 날이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나에게 베니스는 아직 낭만이었다. 배를 타고 장을 보러 다니고, 거리에는 차 한 대도 없는 데다가, 골목골목 운하에선 곤돌리에들이 멋들어진 노래를 부르고 있다! 이게 낭만이 아니면 무엇이 낭만이겠는가?


 학기가 시작되기 전, 나와 다른 한국인 교환학생들은 아직 플랫을 배정받기 전이라 함께 에어비엔비에서 숙소를 예약해 머물고 있었고, 우리는 베니스가 겉으로 보여주는 낭만에 취해 와인을 마시기로 했다. 나에겐 인생 첫 와인이었다. 물론 한두 잔 마셔본 경험은 있지만 엄마 생일 때 옆에서 한두 잔 얻어마신 게 전부였지, 내 돈을 주고 직접 와인을 사서 마신 적은 없었다. 와인을 마시는 게 처음이라 어떤 와인이 좋은 와인인 줄도 모르던 때. 인터넷 검색으로 대충 찾아본 결과, DOCG가 붙어 있으면 좋은 와인이라고 했다. 우리는 무작정 coop이라는 슈퍼마켓에 찾아가 와인을 살펴보았다. 와인은 저렴했다. DOCG가 붙은 게 1만 원도 안 되는 가격이었고, 2~3천 원짜리 와인도 수두룩했다. 베니스에 있으니 좋은 와인도 이렇게 싸게 마실 수 있다며, 우리끼리 소소한 웃음을 나눴던 기억도 난다.


 숙소에 도착한 우리는 엉성한 솜씨로 와인상을 차려 냈다. 치즈도 잘라 내고, 파스타도 만들었다. 객관적으로 훌륭한 맛은 아니었지만, 그 분위기만으로 충분히 맛있게 먹을 수 있었다. DOCG라는 글자만 보고 고른 와인도 입에 맞았다. 맛있는 와인이란 이런 거구나! 머릿속에서 나름의 기준을 세우고 있었다.

 맛있는 와인에 흥이 오른 나는 방에서 노트북을 꺼내 왔다. '인생에 BGM을 깔면 영화가 된다'는 철학을 가진 나는 와인을 마시는 자리에 음악이 빠져서는 안 된다 생각했다. 와인 한 잔에 재즈 하나 곁들이면 그게 영화지! 싶었다. 내가 즐겨 듣는 유튜브 채널 'Postmodern Jukebox'에서 분위기에 맞는 재즈를 하나 틀었다. 음악에 취해 홀짝홀짝 와인을 마신 우리는 다들 어느 정도 알딸딸하게 취했다. 그때까진 좋았다.


 그런데, 별안간 노트북에서 흘러나오는 음악 소리가 작아졌다. 이게 왜 이래? 이상한 낌새에 노트북을 들었더니, 세상에, 와인이 노트북 바닥을 빨갛게 적시고 있었다! 친구들은 이미 거나하게 취해서 제정신이 아니었고, 대체 이 와인이 누구의 잔에서 나온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달짝지근한 와인에 취한 노트북이 제정신이 아니라는 것만은 확실했다. 나는 빠르게 노트북을 끄고 겉면을 닦기 시작했으나, 이미 노트북은 맛이 간 상태였다. 노랫소리는 점점 작아졌고, 화면도 점점 빛을 잃어 갔다.

 내 머릿속에는 많은 생각들이 스쳐 갔다. 나는 베니스에서 많은 것들을 하기로 계획한 상태였다. 글도 많이 쓰고, 내가 찍은 사진들도 열심히 편집해 나중에 책으로 엮어낼 생각이었다. 여력이 된다면 브이로그 영상도 만들어 보고 싶었다. 그러나 이 모든 계획들은 노트북 없이는 실행하기 어려웠다. 물론 손으로 글을 쓸 수는 있지만 노트북으로 빠르게 써내는 것에 비해 느릴 수밖에 없고, 사진이나 영상 편집은 노트북 없이는 아예 불가능한 것이니까. 내 모든 계획들이 시작도 전에 어그러지고 있다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그러나 또 다른 한편으로는, 이 분위기를 망치고 싶지 않았다. 이제 고작 이틀째였고, 친구들은 모두 낭만 속에 있었다. 내 낭만이 깨졌다고 남들의 낭만까지 깨뜨릴 순 없는 노릇이었다.

 "괜찮아! 내일 A/S센터 찾아가 보지 뭐!"

 걱정을 삼키고 웃으며 친구들에게 말했다. 그 노트북 때문에 내가 버리게 될 시간과 체력, 돈은 감히 상상도 못한 채 말이다. 베니스에 온 지 고작 이틀째였고, 베니스의 현실은 나의 낭만을 가만두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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