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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띵프 Jul 09. 2020

베니스에서 노트북 수리를 맡겼더니,
데스크톱이 왔다

[낭만으로 마주한 현실, 베니스 교환일기 EP05]

노트북 수리에 120유로를 날린 후 자주 걸었던 늦은 밤 산마르코 광장


 한 달하고도 120유로. 내가 베니스에서 노트북을 고치기 위해 들인 노력 값이다. 그리고 그 노력 끝에 돌려받은 노트북의 상태는? 키보드가 작동하지 않아 별도의 키보드를 연결해서 사용해야만 했고, 충전기를 꽂아두지 않으면 곧바로 전원이 꺼져 버렸다. 노트북을 맡겼는데, 데스크톱이 되어 온 셈이다.


 자, 이제 어떻게 된 일인지 하나하나 말씀드리겠다. 이전 글을 읽은 사람이라면 알다시피, 나는 그 히피 같은 수리업자에게 40유로 선금을 내고 노트북 수리를 맡겼고, 그 업자가 ‘다 되었다!’는 연락을 어서 해주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딴 얘기이긴 하지만, 이 대목에서 나는 또 한 번 한국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한국이었으면 노트북을 맡기고 한두 시간 만에 전화가 와서는, 이것이 문제다 저것이 문제다 말해줬을 것이다. 그러나, 이젠 모두가 알다시피, 나는 이탈리아에 있었고, 이탈리아의 행정 처리나 서비스 속도는 한국의 절반도 채 되지 않는다. 기다리고 기다려도 그 수리업자는 연락이 없었고, 3주쯤 기다렸을 때, 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먼저 왓츠앱을 통해 메시지를 보냈다. 물론 영어로 보냈고, 공손하지만 나의 언짢음은 적당히 드러나도록 심혈을 기울여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보냈다.


 ‘노트북을 맡긴 지 벌써 3주가 되었다. 나의 노트북은 어떻게 되고 있는가?’


 돌아온 대답은 가관이었다.


 ‘거의 다 됐다. 내가 연락할 테니 걱정 마라.’


 3주를 기다렸는데 또 무작정 기다리라니! 이탈리아의 일처리 속도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지만, 한편으론 ‘이게 이탈리아의 스타일인가’ 싶어 따져 물을 생각도 못했다. 그렇게 나는 ‘알겠다’는 마지막 메시지를 보냈고, 그 후로 일주일이나 더 지나서야 노트북을 찾으러 오라는 연락을 받을 수가 있었다.


 수리업자는 역시나 배터리가 문제였다며, 배터리값으로 80유로를 요구했다. 나는 기쁜 마음으로 지급했다. 노트북을 고쳐 줬다는데, 와인에 적신 내 노트북이 다시 작동한다는데 그깟 80유로가 문제겠는가! 그러나, 그렇게 찾은 노트북의 상태는? 사용할 때마다 충전기를 연결해야 했고, 노트북 자판을 누를 때마다 전원이 재부팅이 되었다. 나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자그마치 한 달이다. 자그마치 120유로, 16만 원이다. 그런데 이 모양이라니?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번엔 분노에 찬 메시지를 보냈다.


 ‘난 당신에게 120유로나 지불했다. 그런데 자판을 누를 때마다 재부팅되고, 충전기도 계속 꽂아 놔야 한다. 이게 무슨 일이냐?’


 ‘난 최선을 다했다. 미안하다. 대신 무료로 키보드를 주겠다. 하지만 환불해 줄 순 없다. 너의 노트북 안에 새로운 배터리가 들어 있다. 배터리 연결선에 문제가 있는 것 같은데, 너희 나라 돌아가서 A/S센터에 맡겨 봐라.’


 정확히 저런 내용의 메시지를 답으로 받았다. 그 수리업자에게 나는, 한 달 정도 길게 여행을 온, 그리고 좀 있으면 자기네 나라로 돌아갈 동양인이었던 것이다.

 그 상황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선택은? 무료로 준다는 그 키보드를 받아 오는 일뿐이었다. 그렇게 나는 한 달을 들이고 120유로를 들여, 내 노트북을 데스크톱으로 만들었다. 휴대성이라는 제 장점은 갖다 버린 채 충전기 선이며 키보드 선에 칭칭 감겨버린 내 노트북을 보며, 나의 베니스 생활은 어쩌면 낭만이 아닐 수 있겠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했던 것 같다. 그리고 이제서야 하는 얘기지만, 온갖 선에 칭칭 감겨 책상 위에 묶여버린 노트북에서, 제대로 된 항의 한 번 못한 채 키보드나 받아 온, ‘낯섦’을 핑계로 이 억울한 상황을 그냥 받아들인 나의 비겁함이나 무능함을 보았던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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