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으로 마주한 현실, 베니스 교환일기 EP01]
당신에게 베니스는 어떤 곳인가?
나에게는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관광지', 딱 그 정도였다.
2018년 5월 전까지는 말이다.
베니스에서 교환학기로 반년을 보내고 돌아온 지 벌써 2년 가까이 흘렀다. 그동안 나는 대학을 졸업했고, 밥벌이를 위해 이곳저곳 면접을 보러 다녔다. 면접을 볼 때면 면접관들은 꼭 이렇게 물었다.
"영문과이신데 이탈리아로 교환학기를 다녀오셨네요?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요?"
그러면 나는 이렇게 답했다.
"독특하잖아요! 다른 사람들은 관광지로 놀러 가는 곳에서, 저는 살아보고 싶었습니다."
물론 남들과 다른 경험을 하고 싶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교환학기를 결심했던 것은 아니다. 사방이 물로 둘러 쌓인 섬에서 살아본다는 것 자체로도 충분히 매력적이었고, 외국인 친구들과 어울려 밤새 파티를 즐기고도 싶었다. 하지만 나의 결심에 결정적인 한 방이 되어준 것은, 다름 아닌 영화 한 편이었다.
영문과 시문학 수업 첫날. 교수님은 다짜고짜 학생들에게 질문을 던지셨다.
"요즘 세상에 시는 왜 필요할까요?"
그러게요, 왜 필요할까요? 시를 좋아하는 나였지만, 집중력이 짧은 탓에 빠르게 읽을 수 있었던 시를 좋아했던 것이지 시가 꼭 필요하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흥미로운 질문이었다. 정말 시는 왜 필요할까? 시가 필요하지 않다면 나는 지금 이 수업을 왜 듣고 있을까? 교수님은 질문에 대한 학생들의 대답을 듣고 싶어 하셨으나, 그 누구도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대답할 수 없었다고 표현하는 게 맞을 것 같다. 그 누가 생각이나 해봤겠는가? 교수님께서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는 학생들을 향해 살짝 웃어 보이시고는, <일 포스티노>라는 영화를 추천해 주셨다. 그날 이후 영문학도인 내 머릿속에는 '정말 이 시대에 시는 왜 필요한 것일까?' 하는 질문이 한 자리 크게 자리 잡았고, 한 학기 수업을 듣는 내내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일에 많은 신경을 쏟았다. 교수님께서 추천해 주신 <일 포스티노>라는 영화를 보게 된 것도 질문에 대한 답 찾기의 일환이었다. 이 영화가 내 인생에 미칠 영향 따위는 생각도 못했었지.
<일 포스티노>. 이탈리아의 작은 섬으로 오게 된 유명 시인과, 그 시인에게 도착한 우편물을 전달하는 배달부의 이야기. '이 시대에 시가 왜 필요한가'에 대해서 고민하던 나에게, 은유가 무엇인지도 몰랐던 이 우편배달부가 사랑을 알고, 은유를 알고, 시를 알고, 나아가 자신만의 시를 찾는 모습은 그 자체로 큰 울림이었고 깨달음이었다. 주인공 우편배달부의 정신적, 정서적 성장을 지켜보며 나는 '정말 시는 왜 필요한가?'에 대한 나름의 답을 내릴 수 있었고, 내가 내린 답은 다음과 같았다.
'요즘 세상에 시가 필요하냐고 물으면
시는 필요한 게 아니라 그냥 있는 것이고
있는 것을 찾아낼 뿐이라고
곁에 있는데도 모르고 사는 건 너무 슬프지 않냐고'
이렇게 답을 내리고 나니 슬퍼졌다. 나는 아직 그 어떤 시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내 곁에 분명 멋진 시가 존재할 텐데, 한 번 찾아볼 생각도 안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시를 한 번 발견해내고 싶어 졌다. 분명 내 주변에 존재할 그 시를 모른 채 살아가고 싶지 않았다. 내 모든 것을 던져 넣어 내 인생의 가장 멋진 시 한 편을 찾아내고 싶었다.
게다가 <일 포스티노> 속 이탈리아는 너무 낭만적이었다. 나폴리 근교 프로치다 섬과 시칠리아의 살리나 섬을 배경으로 찍었다는데, 물론 그 이름들은 나에게 너무나 낯선 것들이었지만 영화 한 편으로 마음의 거리만은 훅 가까워진 느낌이었고, 이 곳을 한 번 찾아가 봐야겠다는 알 수 없는 고집 같은 게 마음속에 자리 잡았다. 무엇보다, '일 포스티노'의 배경이 되는 이곳에서라면 왠지 나의 시를 찾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은유가 무엇인지도 모르던 영화 속 주인공도 자신만의 시를 찾아낸 곳이니까 말이다.
이런 마음이 들었을 무렵, 때마침 내가 다니는 대학교와 베니스의 한 대학교가 교환학생 프로그램을 체결해, 베니스로 갈 1기 교환학생을 급하게 선발하고 있었다. 모집 공고를 발견하는 순간 나의 머리는 빠르게 굴러갔다. 물론 프로치다 섬이나 살리나 섬은 아녔지만 어쨌거나 이탈리아에 위치한 섬이고, 또 한국에 있는 것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그 섬들 가까이에 머물게 되는 거니까 충분히 비슷한 기분을 느낄 수 있으리라 지레짐작했다.
그렇게 나는 나의 시를 찾겠다는 다짐과 영화를 통해 느낀 낭만만으로 베니스 행을 결정했다. 졸업까지 고작 두 학기를 남겨놓은 상태에서 말이다. 2018년 5월이었다.
앞으로 전개될 이야기는 낭만만을 좇아 베니스로 떠나버린 내가 현실과 부딪히며 겪은 슬픔과 좌절에 관한 것들이다. 내가 직접 찍은 사진들은 덤으로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