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으로 마주한 현실, 베니스 교환일기 EP12]
나의 주변 사람들은 다- 안다. 나는 커피를 좋아한다. 하루 서너 잔은 기본으로 마시고, 마음에 드는 카페에 가기 위해 장거리 여행도 불사하는 사람이다. 물론 여기서 커피란 '아이스' 커피를 의미한다. 주로 필터로 내린 필터 커피를 마시는데, 이 필터 커피라는 게 대체로 아메리카노처럼 물이 많은 편이다. 음료 마시는 속도가 빠른 편이라 양이 많은 걸 선호하는 경향이 있는 것도 같다. 그러니까 다시 말하자면 내 커피 취향은 1. 시원해야 하고 2. 벌컥벌컥 들이켤 수 있을 만큼 양이 많아야 한다.
베니스로 교환학기를 떠나기 전, 학교에서 교환 예정 학생들을 대상으로 초급 이탈리아어 수업을 진행했다. 그때 이탈리아어를 가르치던 선생님께서 가장 많이 했던 얘기 중 하나가 커피 얘기였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에스프레소 한 잔으로 아침을 연다, 에스프레소는 비싸야 1유로 정도이다, 에스프레소에는 설탕 두 봉지를 부욱- 찢어서 넣어 마신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같은 건 안 판다, 뭐 이런 얘기들. 내 마음을 사로잡았던 건, 아침마다 바에 서서 에스프레소 한 잔을 탁 털어 넣는 (상상 속) 이탈리아인들의 모습이었다. 매일 아침 찾는 단골 카페에 들어서서 바리스타와 가볍게 눈인사를 나누고선, 바에 서서 주문하지 않아도 알아서 갖다 주는 에스프레소 한잔을 빠르게 마신 후 1유로를 내고 나오는 그런 모습. 나도 베니스에 가면 현지인처럼 단골 카페도 만들고, 아침마다 에스프레소도 마셔야겠다는 다짐을 수도 없이 했더랬다.
그때는 몰랐다. 내가 주목했어야 하는 건 '에스프레소 한 잔으로 아침을 연다'가 아니라, '아이스 아메리카노 같은 건 안 판다' 였다는 걸.
베니스에 도착하고 하루 이틀은 좋았다. 도착한 첫날 바에 들어가 에스프레소 한잔 시켜서는 내 옆에 서서 에스프레소를 마시던 현지 아주머니 조언에 따라 첫 모금은 아무것도 넣지 않은 채로, 그다음엔 설탕 한 봉지를 넣어 마셨다. 이튿날엔 아침 일찍 눈곱만 겨우 떼고 아무도 없는 바에 찾아가 1등으로 에스프레소를 마셔보기도 했다.
문제는 그다음인데, 이 이 도저히 이 이... 에스프레소만 마시고는 못 살겠는 거다. 내가 베니스에 도착했던 게 9월이었고 한참 더울 때였는데도 이 나라 사람들은 뜨거운 에스프레소만 고집했다. 자리에 앉아도 에어컨 빵빵하게 틀어져 있는 실내보다는 햇빛 내리쬐는 야외 자리를 선호했다. 이열치열도 아니고, 곧 죽을 것처럼 후텁지근한 날에도 굳이 야외 자리에서 에스프레소를 홀짝이고 있었다. 그래,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내가 주목했어야 하는 건 '아이스 아메리카노 같은 건 안 판다'는 사실이었다.
그렇게 베니스에 도착한 지 3일째 되는 날부터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찾기 위한 나의 여정은 시작되었다. 우선 이탈리아에는 스타벅스가 거의 없다. 사실 카페라는 개념 자체가 없다. 밤에 술을 파는 바에서 아침에 커피를 파는 수준이었다. 처음 바에 들어가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문했을 때, 바리스타 아저씨가 보인 눈빛을 잊을 수가 없다. 눈으로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아니, 이탈리아에서 아메리카노를? 게다가 아이스를?'
커피에 물을 탄다고? 커피에 얼음을 탄다고?! 이탈리아에선 둘 다 있을 수 없는 일인 것이다. 관광객들이 그렇게 많이 찾는 베니스인데도 메뉴판에 아메리카노가 적혀 있는 카페는 손에 꼽았다. 정말 가뭄에 콩 나듯 아메리카노를 판매하는 곳이 있었는데, 내가 슬쩍 아이스를 부탁하면 뜨겁게 내린 아메리카노에 얼음 3,4개를 띄워서 줬다(즈기여... 아메리카노 안 드셔보셨냐구요...)(근데 안 드셔 보셨을 것 같긴 하다.)
베니스에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찾아다닌 지 한 달째 되던 날, 길을 걷다가 우연히 한 도넛 가게의 유리창에 'ice-americano'라고 쓰인 종이가 붙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미 당할 대로 당했던 나는 '보나 마나 물 탄 에스프레소에 얼음 두 개 띄워주겠지' 싶었다. 하지만 나는 잃을 게 없었고, 밑져야 본전이었기 때문에 가게로 곧장 들어가 "Un ice americano"를 외쳤다.
그런데 세상에. 점원의 손에 들려져 있던 건 '진짜' 아이스 아메리카노였다. 컵 가득 얼음을 채우고 에스프레소 투 샷에 적당히 물을 채운, 우리가 흔히 아는 그 아이스 아메리카노였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우리가 알고 있는 방식’으로 판매하는 유일한 카페를 발견한 것이다! 그날 이후, 나는 머물던 숙소에서 30분이나 걸어야 하는 그 가게에 매일 출근 도장을 찍었다. 그리고 노트에 적었다.
'한국 가면 할 일 1. 자주 가던 카페에서 아이스 아메리카노 시켜 놓고 시간 보내기'
그런데 한국에 돌아온 지금,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찾지 못해 바에 서서 에스프레소를 마셨던 그때가 가끔씩 생각난다. 처음 에스프레소를 마시던 날, 생각보다 더 작은 커피 잔 크기에 놀랐던 기억, 에스프레소 먹는 법을 알려주겠다며 설탕 한 봉지를 부욱 찢어 에스프레소에 넣어 주던 바 사장님, 두 모금이면 끝나는 에스프레소를 입에 털어 넣고 1유로를 쓱 내고서 "그라지에!" 외치던 그때가 아주 가끔씩 생각난다.
한 번은 그때 그 맛이 그리워서 에스프레소를 주문해보기도 했는데, 베니스에서 1 유로면 마시던 걸 한국에서는 5천 원을 받는다. 아메리카노보다 천 원이나 더 비싸다. 나오는 구성을 보니 에스프레소 한 잔에 물, 우유가 한 잔씩 딸려 나온다. 맛도 뭔가 다르다. 지나치게 시큼한 게, 베니스에서 먹던 것처럼 설탕을 한 스푼 넣어서 마셔도 그때 그 맛이 안 난다.
낭만이란 결국 현실과 유리되어 있을 때 빛을 발하고, 현실에서 낭만을 찾기란 불가능한 것인가 싶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