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으로 마주한 현실, 베니스 교환일기 EP11]
파란 산장에서 하루를 묵고 난 다음 날이었다. 돌로미티 1편을 읽은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애초에 내가 세웠던 계획은 보기 좋게 어그러진 상태였고, 이후의 모든 일정은 오로지 선택과 결단에 의해 결정되는 상황이었다.
'계획 없음'은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른다는 불안감과 동시에 어떤 것이든 해도 좋다는 안도감을 준다. 그 오묘한 감정들 속에서 내가 가장 먼저 내린 결단은 '돌로미티에서 뜨는 새벽 해를 맞이하자!'였다. 살면서 올라 본 가장 높은 곳에서 하루의 시작을 지켜보고 싶은 마음이었다. 다행히 마음이 맞는 친구들이 몇 있어서 새벽 이른 시간에 함께 파란 산장을 나섰다. 돌로미티에서의 일출이 특별했냐고 묻는다면, 그렇진 않았다. 다만 '그날 하루의 마음가짐에 변화를 주었다'는 정도로 말하고 싶다.
트레킹 루트를 정할 때에도 결단은 필요했다. 어제 가기로 '계획'되어 있던 빨간 산장에서 점심을 먹기로 '결정'했고, '계획'에는 없던 길이지만, 시간이 적게 걸리는 대신 험한 길을 걸어 하산하기로 '결정'했다. 계획이 없는 상황 속에서 결정과 결단은 계획 대신이었다. 계속된 선택을 통해 임시방편의 계획을 세웠던 것이다.
예측이 무의미한 상황에서 맞닥뜨린 낯선 것들은 색다른 즐거움을 주었다. 깊은 산중에 덩그러니 자리 잡은 집들을 보며 '무엇을 위한 집일까', '누가 살고 있을까', '음식은 어떻게 조달할까'를 상상했고, 풀을 뜯고 있는 두 마리의 말을 보며 '주인이 누구일까?', ' 누가 여기에 데려다 놨을까?', '풀을 다 먹으면 어디로 갈까?' 걱정했다. 산길을 걷는 친구들 머리 위로 압도적인 돌산이, 그리고 그 위로 대낮에도 지지 않은 달이 떠 있는 모습을 보며 셔터를 눌렀다.
계획이 어그러지며 내 돌로미티 여행도 어그러질 것 같았지만 연속된 선택과 결단으로 여행은 끊김 없이 이어졌고, 완벽했다고는 말할 수 없으나 돌이켜 생각해보면 어느 한순간도 버리고 싶지 않은 여행이었다. 계획대로였다면 못 보고 지나쳤을 것들과 느끼지 못했을 감정들이라 더욱 값지고, 결단과 결정으로 빈틈을 메운 임시방편의 여행이라 더 마음이 간다. 완벽한 사람보다는 조금은 허술한 면이 있는 사람에게 괜히 마음이 더 쓰이는 사람 심리가 여행을 대할 때에도 적용되나 보다.
가혹한 선택과 잦은 번복으로 여기저기 기운 누더기 같은 내 삶도 나중에 돌아보면 기운 조각 하나하나 더듬어 볼 만큼 소중한 것이겠지,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