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요한 변화였지만, 우리에겐 도전이었던 그 시간
#전공의 #의료개혁 #전공의특별법 #20161223 #끼인세대 #수련환경개선 #세대간협력 #세대갈등 #의료인권 #워라밸 #수련 #교육
우리나라 전공의 수련체계는 수십 년간 도제식 구조를 유지해왔습니다. 각 계층에 속한 의사들이 묵묵히 자신의 역할을 수행했기에 대학병원들이 유지될 수 있었죠. 전공의의 삶에서 업무의 내림은 있어도 올림은 없었습니다. 매년 특정한 날, 4년차의 일은 3년차에게, 3년차의 일은 2년차에게, 2년차의 일은 1년차에게 내려가는 시스템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시스템에도 어려움은 있었습니다. 저년차가 일에 익숙하지 않아 맡은 업무를 수행하기 힘들면, 중간 연차의 전공의들은 위에서 추가 업무를 받으면서도 본인의 일을 아래로 내리지 못하는 상황에 처하기도 했습니다.
저와 동기들이 3년차가 되었을 때, 1년차 때 받던 응급실 당직콜이나 병동당직콜은 더 이상 받지 않아도 되는 위치에 올랐습니다. 아마 대부분의 전공의 선생님들이 공감하실 거예요. 4년간의 힘든 과정 중에서도 '조금만 더 버티자'라는 생각으로 저년차 시절을 견디고 나면, 고년차가 되어 조금은 편해질 거라는 기대가 있었거든요. 저 역시 그렇게 생각했고, 3년차 반이 지나니 삶에 작은 여유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2016년 12월 23일, '전공의의 수련환경 개선 및 지위향상을 위한 법률', 일명 전공의 특별법이 시행되었습니다. (그림 1) 이 법은 전공의들의 근무 시간을 주 80시간 이내로 제한하고, 불가피한 경우에도 88시간을 넘기지 못하도록 규정했습니다. 1년차 때 3개월 동안 주 168시간을 병원에서 모든 전화를 받으며 근무했던 제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이 법의 필요성에는 공감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왜 하필 제가 고년차일 때 이 법이 시행되었을까요?"라는 아쉬움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변화는 누군가는 겪어야 했고, 우리가 그 주역이 되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습니다.
이 법을 지키기 위해 당직표를 새로 짜는 일은 쉽지 않았습니다. 의국의 전공의 대표를 맡고 있던 제 동기는 1년차부터 4년차까지의 당직표를 주 88시간 이내로 맞추느라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그림 2) 갑작스러운 변화에 우리 모두가 혼란스러웠죠. 더군다나 이 법대로라면, 수술에 참여하다가도 근무시간이 끝나면 그냥 집에 가야 하는 상황이 생길 수 있었습니다. 3년간의 수련 동안 정형외과 모든 교수님들의 수술이 끝나기 전에는 언제 어떻게 연락을 받고 수술에 참여해야 할지 모르는 불안함 속에 살았던 우리에게, 이런 변화가 과연 가능할지, 그리고 교수님들께서 이를 받아들이실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습니다.
어느새 저도 4년차가 되어 전문의 시험을 준비하는 시기가 왔습니다. 의예과에 입학한 후 10년 넘게 쉼 없이 달려온 긴 여정의 마지막 단계였죠. 달리는 열차에서 뛰어내릴 수 없는 기분이었습니다. 4년차 전공의는 병원에서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인턴 때부터 함께 고생한 동기들과 함께 각 과의 업무를 조율하고, 때로는 의국 간 분쟁도 중재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전공의 특별법 시행으로 예상치 못한 변화가 찾아왔습니다. 정형외과는 평균 100명의 입원 환자를 돌보는 바쁜 과였습니다. 게다가 응급실을 통해 꾸준히 새 환자가 입원했습니다. 갑자기 4년차인 저희도 당직을 서야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응급실 콜과 병동 콜을 받아야 했었습니다. 실제로 저는 4년차가 되어 일정 간격으로 대학병원에 혼자 남아 정형외과를 지키는 의사가 되었습니다. 한번은 새벽에 응급실 콜을 받고 내려갔는데, 주변에 1, 2년차들만 보이는 상황에 마음이 복잡해졌습니다. 이런 변화는 우리가 그동안 익숙해져 있던 수련 체계와는 너무나 달랐고, 과연 이 새로운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할 수 있을지 걱정되었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단기적으로는 어려움을 주었지만, 장기적으로는 전공의들의 삶의 질 향상과 더불어 의료 서비스의 질 개선에도 크게 기여할 것입니다. 충분한 휴식을 취한 의사들이 더 나은 진료를 제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근무 시간 제한으로 인해 의사들의 피로도가 감소하고 집중력이 향상되어 의료 사고 예방에도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는 결국 환자 안전과 의료 서비스 질 향상으로 이어질 것입니다.
전공의 특별법은 우리에게 새로운 도전을 안겨주었습니다. 이론적으로는 근무시간이 끝나면 수술 중이라도 퇴근해야 하는 상황이 생길 수 있었죠. 하지만 현실은 달랐습니다. 그날 이후에 갑자기 "교수님, 제 근무시간이 끝나서 이만 가보겠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을 리 없었습니다. 3년간 수술이 끝나기 전에는 언제 어떻게 연락을 받고 참여해야 할지 모르는 불안함 속에 살아온 우리에게, 이런 급격한 변화는 상상하기 어려웠습니다. 결국 우리는 법과 현실 사이에서 계속해서 고민하고 타협점을 찾아야 했습니다. 이는 단순히 시간을 지키는 문제를 넘어, 의료의 질과 환자의 안전, 그리고 우리의 교육 사이에서 균형을 찾아가는 과정이었습니다.
변화는 늘 새로운 시각과 의견 충돌을 가져옵니다. 그 해 연말, 의국 송년회 때 이런 변화에 대한 다양한 시각을 직접 경험했습니다. 의국 출신 한 선배님께서 "너희는 이제 수술이 다 끝나지 않아도 집에 간다며? 대학병원이 그렇게 돌아갈 수 있겠나?"라고 물으셨습니다. 그 말씀에는 우려와 함께 기존 시스템에 붕괴에 대한 걱정이 묻어있었습니다.
전공의 특별법은 분명 필요한 법입니다. 지금 잘 정착되어 운영되고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아쉬운 점도 있습니다. 왜 하필 제가 고년차가 될 무렵인 2016년 말에 이 법이 시행되었을까요? 어쩔 수 없는 '끼인 세대'가 된 것 같았습니다.
이제 와서 돌이켜보면, 전공의 특별법은 단순히 근무 시간을 조정하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었습니다. 이는 의료계 내에서 세대 간의 무게중심을 이동시키는 중요한 전환점이었습니다. 기존의 시스템에서는 선배 세대의 경험과 지식이 절대적인 가치를 지녔다면, 이제는 젊은 세대의 삶의 질과 권리도 동등하게 중요하다는 인식의 변화를 가져온 것입니다. 이는 의료계 문화의 근본적인 변화를 의미했고, 그 과정에서 우리 '끼인 세대'는 이 변화의 중심에 서 있었습니다.
우리는 '끼인 세대'였지만, 동시에 변화의 주역이기도 했습니다. 이전 세대와 다음 세대를 잇는 가교 역할을 하며, 의료계의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가는 선구자가 된 것입니다.
이런 법을 시행하면 반드시 어떤 해에 일하는 사람들은 더 큰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저년차 때는 저년차라는 이유로 거의 모든 일을 물려받아 했지만, 고년차가 되니 그 일이 다시 고년차에게 올라오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양쪽으로부터 보호받지 못하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우리가 양쪽을 이해하고 중재할 수 있는 유일한 위치에 있었다는 의미이기도 했습니다.
또 다른 우려도 있었습니다. 전공의가 해야 할 일이 근본적으로 줄어들지 않은 상태에서 근무 시간만 줄이면, 어쩔 수 없이 해야 할 일들을 몰래 처리해야 하는 상황이 생기지 않을까 걱정되었습니다. 계층화된 수련 체계에서 고년차 선생님들이 '나는 이 일을 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으면, 저년차 선생님들이 그 일을 몰래 대신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죠. 다행히 우리 의국에서는 그렇게 하지 말자는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변화에 적응하는 능력, 동료-선후배와의 협력, 그리고 어려운 상황에서도 묵묵히 견디는 인내심을 배웠습니다.
하지만 이런 변화는 필요했습니다. 전공의들의 근무 환경 개선은 오랫동안 미뤄져 왔던 과제였고, 누군가는 이 변화의 과도기를 겪어야 했습니다. 그 역할을 우리 세대가 하게 된 것이죠. 비록 힘들었지만, 이를 통해 후배 전공의들이 더 나은 환경에서 수련받을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하면 위안이 됩니다.
전공의 특별법 시행 이후, 전공의들의 근무 환경은 많이 개선되었습니다. 우리가 겪은 어려움은 미래 세대의 전공의들을 위한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경험과 피드백은 제도의 안정화와 개선에 중요한 역할을 했고, 이는 의료계 전체의 발전으로 이어질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변화가 가져올 수 있는 도전도 있습니다. 근무 시간 감소로 인해 전공의들의 임상 경험이 줄어들 수 있다는 우려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우리가 수련의 질을 높이고 효율성을 개선할 기회이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시뮬레이션 훈련, 구조화된 교육 프로그램, 그리고 멘토링 시스템의 강화 등을 통해 제한된 시간 내에서도 충분한 임상 능력을 갖출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이러한 새로운 접근 방식은 오히려 더 체계적이고 효과적인 의료 교육 시스템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변화의 한가운데에 있었습니다. 그 과정이 쉽지만은 않았지만, 이를 통해 의료계가 한 단계 발전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고 믿습니다. 앞으로도 전공의들이 더 나은 환경에서 수련받고, 더 나은 의사가 될 수 있도록 계속해서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경험과 노력이 의료계의 더 나은 미래를 만드는 데 기여했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낍니다. 이제 우리는 이 경험을 바탕으로 후배들을 더 잘 이해하고 지원할 수 있는 위치에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경험이 앞으로의 변화에 작은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필요한 변화였지만, 우리에겐 도전이었던 그 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