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자도 울고 구급대원도 울고 우리 모두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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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형외과 1년차 전공의로서 제 주요 업무 중 하나는 응급실 당직이었습니다. 3명의 동기와 함께 3일에 한 번씩 24시간 동안 응급실 콜을 받았습니다. 응급의학과 전공의 선생님 또는 인턴 선생님으로부터 연락을 받으면, 환자의 상태를 듣고 필요한 X-ray 검사를 지시합니다. 그리고 X-ray촬영이 끝나면 직접 응급실로 내려가 환자를 진찰하고 추가 검사나 수술 준비를 하게 됩니다. (그림 1)
하루 24시간이 모자랄 정도로 바쁜 나날이었지만, 그 속에서 환자를 돕는 보람도 있었습니다. 때로는 힘들고 지치기도 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약간 무자비한 면도 있었지만, 이 집중적인 수련기간 동안 한 명 한 명의 환자를 치료하며 의사로서 성장해 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무릎 골절 환자가 응급실에 오셨다고 가정해 볼까요? 먼저 X-ray를 처방하고, 10-20 분 후 응급실로 내려가 진단을 내립니다. (거의 모든 대학병원 응급실은 1층입니다.) 필요하다면 CT 촬영까지 하게 되죠. 이제부터 수술 준비가 시작됩니다.
가장 먼저 확인하는 건 금식 시간입니다. 전신마취를 위해 8시간 금식이 필요하거든요. 이를 통해 오늘 오후에 수술할지, 내일로 미룰지 결정합니다. 그다음엔 기저질환을 확인하고, 문제가 있다면 해당 과에 진료를 의뢰합니다. 피검사 결과에 이상이 있어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준비가 끝나고 교수님께서 응급 수술을 결정하시면, 마취과에 올라가 마취 가능 여부를 확인합니다. 이 과정에서 추가적인 의학적 문제가 발견되면 해당 과의 협진을 다시 의뢰해야 합니다. 모든 과 선생님들이 바쁘시다 보니, 이런 과정에서 가끔 어려움을 겪기도 합니다.
이 모든 과정이 수술 전 준비에 해당합니다. 수술이 끝난 후에는 또 다른 일들이 기다리고 있죠. 수술 후 회복을 위한 처방, 2주간의 매일 또는 이틀에 한번 정도의 상처 소독, 그리고 교수님과 함께하는 회진까지. 입원 중 발생하는 모든 상황에 대한 대처 또한 저희 1년차 전공의의 몫입니다. 힘들지만, 이 과정을 통해 의사로서 큰 성장을 할 수 있었습니다.
때로는 제가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넘어서는 상황들이 찾아오곤 했습니다. 외상 환자가 동시에 여러 명 오거나, 1시간 간격으로 계속해서 들어오는 경우엔 정말 눈앞이 캄캄했습니다. 헛웃음이 나오기도 하였습니다. 수련의 입장에서 환자의 치료를 경험하는 것은 좋은 수련이 될 수도 있지만, 너무 많으면 힘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구급대원 분들은 우리 사회의 안전망으로서 꼭 필요한 분들이지만, 정형외과 전공의 입장에서는 때로 두려움의 대상이 되기도 했습니다. 대기 환자가 너무 많이 몰리면 "정말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습니다. (그림 2) 특히 100일 당직 기간 동안에는 하루 일당이 10만원 정도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3달 넘는 기간 동안 24시간 병원에 상주하면서 쉴 새 없이 일하는데 최저시급에도 못 미치는 급여를 받는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무거워졌습니다.
3개월 동안 집에 한 번도 가지 못하면서, 이렇게 열악한 조건으로 일하는 상황이 때로는 너무 힘들게 느껴졌습니다. 하지만 어디에 하소연할 곳도, 하소연할 시간도 없었습니다. 그저 묵묵히 견뎌내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이런 경험들이 의사로서의 소명의식을 더욱 강하게 만들어주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시기를 버티는 동안 인내와 의지가 강해진 것 같았습니다.
특히 기억에 남는 날이 있습니다. 오후 5시 3분부터 7시 45분까지 무려 6명의 수술이 필요한 환자들이 연이어 내원했던 날이었습니다. (사진 1) 평소 하루 10여 건의 예정된 수술에 6개의 응급 수술이 추가된 상황이었습니다. 그날의 기억이 너무나 생생해 응급실 대장 화면을 사진으로 찍어두기까지 했습니다.
이런 날엔 정말 '아... 이건 좀 아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환자 한 분 한 분을 여유를 가지고 제대로 케어하고 싶은데, 시간은 한정되어 있고 몸은 하나뿐이니까요. 그래도 지금 돌이켜보면, 이런 '미친 경험(이라 쓰고 valuable experience라 읽습니다)'을 통해 그 어떤 외상 환자를 보게 되더라도 어떤 순서로 일을 해야 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인지 나만의 체계가 잡혀가기 시작했습니다. 전문가가 되어가는 과정은 고된 과정인 것 같습니다.
응급실에서 일하다 보니 점점 외상 환자들을 대하는 제 모습이 변해가는 걸 느꼈습니다. 처음엔 심하게 다친 환자의 모습에 놀라고 긴장했지만, 점차 그런 광경에 무뎌져갔습니다. 한 번은 교통사고로 다리가 심하게 손상되어 피부, 근육, 혈관 등이 그냥 개방되어 온 환자를 보게 되었습니다. 이때 제가 무감각해져 가고 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환자분이 극심한 고통 속에 계신데, 저는 마치 일상적인 업무를 수행하듯 기계적으로 처치를 하고 있었습니다. 오염된 부분들을 멸균된 물로 씻어내고, 어디가 골절인지 찾고, 어느 신경이 손상되었는지 확인하고 이런 작업들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순간 제 자신에 대해 놀라움을 느꼈습니다. 아마도 이런 감정의 변화는 제가 이 힘든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한 일종의 방어 기제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의사로서의 공감 능력을 잃어가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도 들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저는 의외의 방법으로 균형을 찾아갔습니다. 인터넷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귀여운 강아지와 고양이 영상을 보는 것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단순히 스트레스 해소용이라고 생각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이는 제 뇌가 찾아낸 일종의 자기 치유 방법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런 영상들을 통해 잠시나마 따뜻함과 순수함을 느끼곤 하였습니다. 물론, 지금도 좋아합니다.
대퇴부 골절 환자를 치료할 때면 특별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수술이 바로 불가능한 상황에서는 3~4mm 두께의 핀을 대퇴골에 박아 견인을 하는 처치를 하게 됩니다. 이때 사용하는 것이 바로 수동 핸드 드릴입니다.
환자분의 고통을 줄이고자 국소마취를 하지만, 뼈에 구멍을 뚫는 과정은 여전히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환자의 대퇴골에 드릴로 구멍을 뚫는 장면은 처음 접했을 때는 마치 공포영화의 한 장면 같았습니다. 하지만, 어느새 무덤덤하게 이 작업을 해내고 있는 제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환자분의 고통스러워하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저는 그저 "원래 아픈 거예요. 조금만 참으세요"라고 무심하게 말하고 있었습니다. (그림 3)
이런 제 모습에 스스로도 놀랐습니다. 아마도 이런 극한의 상황을 매일 겪다 보니, 제 마음도 어느새 단단해진 것 같았습니다. 환자의 고통에 공감하면서도 동시에 빠르고 정확하게 시술을 마쳐야 한다는 압박감 사이에서, 저도 모르게 감정을 차단하는 법을 배운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경험을 통해 의사로서의 전문성과 인간미 사이의 균형을 찾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았습니다. 효율적으로 일하되, 환자의 아픔에 무감각해지지 않는 의사. 그것이 제가 앞으로 지향해야 할 모습이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응급실은 언제나 예측불가능한 곳이었습니다. 마치 시간의 흐름이 다른 차원에 들어선 듯한 느낌이었죠. 가끔 병동 업무를 처리하다가 응급실에 한 번 내려가면, 그날의 계획은 물거품이 되곤 했습니다. 다시 병동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경우가 심심치 않게 있었거든요. 심지어 응급의학과에서 충분히 처리할 수 있는 경증 외상환자 건도 "정형외과 선생님이 여기 계신 김에 한 번 봐주세요"라는 부탁을 받곤 했습니다.
그렇게 정신없이 응급실 업무를 끝내고 병동에 올라가면, 또 다른 세계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병동일은 병동일대로 산더미처럼 쌓여있었죠. 한숨 돌릴 틈도 없이 밀려오는 업무의 파도 속에서, 저는 하루하루를 버텨냈습니다.
당시 정형외과 병동의 평균 재원환자 수는 약 100명. 이는 단순한 숫자가 아니었습니다. 저녁 당직 시간이 되면, 이 100명의 환자분들에 대한 모든 책임이 제게로 쏟아졌습니다. 어느 날 밤, 제가 있는 병원에서 모든 정형외과 입원 환자분들이 동시에 통증, 불면, 변비 등의 증상을 호소하시거나 그 외의 이유로 당직의사 면담을 요청하는 상황을 상상해 보세요. 병동 간호사실을 통해 이론적으로는 100개의 전화가 동시에 올 것입니다. 그와 동시에 응급실의 모든 정형외과 환자도 동시에 봐야 합니다. 대학병원 전공의의 당직은 그런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 직면할 때마다 저는 깊게 숨을 들이쉬고, 차분히 상황을 정리해 나갔습니다. 다행히 병동 간호사님들도 전공의들의 상황을 잘 이해해 주셔서, 가능한 한 전화를 모아서 해주시려 노력하셨습니다. 전공의의 노고를 인정하고 배려해 주셨던 분들께 지금도 감사합니다. 그 덕분에 그나마 버틸 수 있었죠. 지금 돌이켜보면, 그때의 힘든 경험이 현재의 제 모습을 만들어주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이런 상황들은 때로는 부담스럽고 힘들었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나쁜 의미로 두근두근 합니다. "다시는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절로 듭니다. 그 시기는 극도로 고된 시간의 연속이었습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모든 순간이 제게는 값진 경험이었습니다. 다양한 케이스를 접하면서 임상 경험을 쌓을 수 있었고, 여러 과의 의료진들과 협력하는 법도 배웠습니다.
전공의 시절은 정말 힘들었습니다. 다시 겪으라면 못 겪을 것 같은 시간들이었죠. 하지만 그 시간들이 지금의 전문성을 만들어 주었다고 자신 있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환자의 아픔에 공감하면서도 냉철하게 판단하고 행동하는 법, 극한의 상황에서도 침착함을 유지하는 법, 그리고 무엇보다 의사로서의 사명감을 잃지 않는 법을 배웠습니다.
이러한 경험들은 제가 정형외과 의사로서 성장하는 데 큰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정형외과는 과의 특성상 필수의료과로 분류되는 과는 아닙니다. 하지만, 정형외과 중에서도 외상을 담당하는 의사들은 필수의료에 해당하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외상만을 전문적으로 담당하려는 정형외과 의사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분야의 전문가들은 사명감으로 밤낮없이 환자를 받아 치료하고 계십니다. 특히 골절 수술은 수술장에서 방사선 노출이 잦아 의사 본인의 건강을 장기적으로 위협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환자의 생명과 건강을 위해 헌신하고 있습니다.
이름 있는 정형외과 교수님들 중에는 젊으셨을 때는 외상 치료도 적극적으로 하셨다가 너무 지치셔서 지금은 하고 싶어도 못하시는 분들도 많습니다. 외상 치료의 고된 특성상 많은 의사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정형외과 외상 외의 다른 질환 분야로 전향하게 되는 것이 현실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여러 전문과 중에서도 응급의료 또는 외상을 담당하는 분들의 노고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분들의 헌신 덕분에 많은 생명을 구할 수 있었고, 의료 시스템이 원활하게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제가 수련을 받던 영남대병원 정형외과의 일곱 분 지도교수님들을 지금도 존경합니다. 당시 영남대병원은 지역사회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습니다. 병원의 수용 능력을 최대한 활용하여 가능한 한 많은 외상 환자를 치료하려 노력했습니다. 때로는 병원의 물리적 수용 한계를 넘을 때도 있었습니다. 그 시절은 정말 힘들었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그 병원이 지역 사회에 얼마나 큰 기여를 했는지 더욱 깊이 깨닫게 됩니다.
특히 원내에서 외상 환자를 가장 많이 담당하시던 영남의대 손욱진 교수님의 모습이 기억에 남습니다. 하지 전반의 외상을 전문적으로 다루시며, 밤낮없이 헌신적으로 환자를 치료하시는 교수님의 모습은 저에게 특별한 영감이 되었습니다. 교수님 환자를 담당하는 전공의로서 정말 많이 힘들었지만, 교수님의 끊임없는 노력과 환자를 향한 따뜻한 마음은 제가 의사로서 지향해야 할 모델이 되었습니다. 모든 교수님들의 각기 다른 전문 분야와 접근 방식, 그리고 끊임없는 노력이 합쳐져 우리 병원이 지역 사회의 중추적인 의료 기관으로 기능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경험들은 제가 정형외과 의사로 성장하는 데 큰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단순히 의학적 지식과 기술을 넘어, 의사로서의 사명감과 지역 사회에 대한 책임감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지금도 환자를 대할 때마다, 그때의 경험과 교수님들의 모습이 제 진료의 근간이 되어주고 있습니다. 현재 의료계가 직면한 여러 도전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헌신적인 의료진들의 노력이 우리 사회의 건강을 지키는 중요한 버팀목이 되고 있음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환자도 울고 구급대원도 울고 우리 모두 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