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에서 시작하는 글로벌 의료인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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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3월, 고향 대구의 영남대학교병원에서 인턴 수련을 시작하며 저는 의사로서의 첫 발걸음을 내디뎠습니다. 그로부터 5년간의 여정은 제게 지방 의료의 현실과 가능성을 동시에 보여주었습니다.
의학과 4학년 때, 여러 수련병원에서 의과대학에 방문하여 본인들이 근무하는 병원에 인턴 지원을 많이 해달라고 설명회를 많이 개최하였습니다. 대체로 강조하는 점들은 비슷하였습니다. 복지제도가 어떤지, 경쟁률은 어느정도 되는지, 인기과에 지원하면 합격 가능한지 등의 설명이었습니다.
그중에서도 전국적으로 유명한 병원들의 자신감 넘치는 태도가 특히 기억에 남습니다. 이들 병원은 마치 "우리 병원은 말 안 해도 잘 아시죠?"라는 듯한 태도였어요. 물론 원하는 과를 보장할 순 없지만, 공정한 경쟁의 기회는 제공하겠다는 자신감 넘치는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반면 저희 모교 병원의 접근 방식은 조금 달랐습니다. 그들은 더 인간적이고 따뜻한 방식으로 우리에게 다가왔어요. "우리가 남이가?"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분위기였죠. 한 명 한 명 직접 만나 대화를 나누며, 모교 병원에 남아 함께 즐겁게 일해보자고 권유했습니다.
저 역시 제 미래를 고민하며 신중히 선택을 내려야 했습니다. 5년 이상의 앞날을 내다보며 계획을 세웠고, 결국 모교 병원에 인턴으로 지원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원하던 대로 정형외과 전공의 수련을 시작할 수 있었죠. 이제부터 제가 경험한 지방 병원에서의 전공의 수련 생활의 장단점을 솔직히 나누어보고자 합니다.
전공의 저년차 시절은 어느 지역에서 수련을 받느냐보다는 병원 자체가 삶의 중심이 되는 시기입니다. 집이 가까이 있어도 자주 가지 못하고, 식사와 잠자리를 병원에서 해결하는 날들의 연속이었죠. 사실상 병원에 '거주'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습니다.
전공의의 영어 표현인 'Resident'가 '거주자'라는 뜻이라는 걸 아시나요? 우리말로 하면 '병원 거주자'쯤 됩니다. 누가 이 용어를 만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전공의의 삶을 꽤나 정확하게 표현한 것 같아요. 우리는 말 그대로 '병원 거주자'였습니다. 24시간 병원에 붙박여 사는 우리를 보고 누군가 우리의 집 주소를 물으면 'OO병원 OO병동'이라고 대답해도 무방할 정도였습니다.
이런 면에서 보면, 저년차 때는 지방이든 수도권이든 큰 차이가 없었어요. 그저 생활이라기보다는 '생존'에 가까운 나날들이었습니다. 하루하루를 버티며 의사로서의 기본을 다지는 시간이었죠.
고년차가 되면서 새로운 도전이 시작되었습니다. 바로 학술활동이에요. 정형외과 전문의가 되기 위해서는 최소 1회 이상 학회나 분과학회에서 구연 또는 포스터 발표를 해야 합니다. 학술활동에 관심 있는 전공의들은 이를 넘어 추가로 학회에 참석하고 발표를 하곤 했죠.
정형외과 학회는 보통 춘계와 추계, 일 년에 두 번 열립니다. 대체로 한 번은 수도권에서, 다른 한 번은 지방에서 개최되는 식이에요. 학회에서는 석학들의 강의와 연구자들의 발표를 들을 수 있어요. 주로 주말을 포함해서 열리곤 합니다.
이외에도 워크숍과 연수강좌 같은 프로그램들이 있어요. 워크숍에서는 실제 술기를 배우거나 심도 있는 공부를 할 수 있고, 연수강좌는 경험이 부족한 의사들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이에요. 이런 프로그램들은 대부분 서울에서 열리며, 주로 주말에 진행됩니다.
이러한 학술활동은 단순히 지식 습득을 넘어 의료계 네트워크 형성의 기회이기도 했습니다. 다양한 병원의 동료들과 교류하며 시야를 넓힐 수 있었고, 이는 제 의료 철학 형성에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정형외과는 전문의 시험 과목 기준으로 크게 10개의 분과로 나뉩니다. 척추, 어깨, 손, 엉덩이, 무릎, 발의 6개 관절별 분과와 소아, 종양, 외상, 정형외과 기초의 4개 질환군 분과로 구성되어 있죠. 이 10개 분과 모두가 전문의 시험 직전인 가을과 겨울 사이에 서울에서 연수강좌를 개최합니다.
이 연수강좌들은 전문의가 되기 위해 꼭 알아야 할 내용들을 담고 있어서, 참석하면 정말 도움이 많이 됩니다. 실제로 시험 출제에 관여하시는 분들이 와서 강의를 해주시니까요. 하지만 여기서 지방 전공의의 고충이 시작됩니다.
이 모든 연수강좌에 참석하려면 약 2~3개월에 걸쳐 매주 서울을 오가야 합니다. 생각만 해도 피곤하죠? 게다가 주말에 응급 수술이 잡히면 고년차인 저로서는 병원을 비우고 가기가 정말 어려웠습니다.
매번 서울로 올라가는 일이 쉽지만은 않았어요. 주말 첫 기차를 타고 가도 연수강좌 첫 강의를 놓치기 일수였죠. 동대구역에서 새벽 5시 50분 첫 기차를 타고 서울역에 도착해 택시를 잡아타도 8 ~ 9시 사이에 시작하는 첫 강의에는 늘 아슬아슬했습니다.
아침 일찍 출발해 저녁 늦게 돌아오는 이 여정을 10주 가까이 반복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체력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상당한 부담이 됩니다. 게다가 매주 들어가는 기차비와 학회 등록비를 생각하면 경제적 부담도 만만치 않았죠.
이런 상황을 겪으면서 자연스럽게 드는 생각이 있었어요. '아, 서울에서 근무하면 얼마나 편할까?' 하는 거죠. 지하철이나 자가용으로 이동하면서 이런 양질의 교육을 쉽게 받을 수 있다면 정말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의문도 들었어요. 지방에서 수련받는 것의 장점은 과연 무엇일까요? 이런 교육의 기회에서 오는 격차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요? 의료 지식과 기술의 발전 속도가 빠른 요즘, 이런 교육 기회의 차이가 결국 의료 서비스의 질 차이로 이어지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도 들었습니다.
이런 고민들이 제 마음 한편에 자리 잡으면서, 앞으로 지방 의료의 발전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생각하게 되었어요. 어쩌면 이런 경험들이 나중에 제가 의료 교육이나 지방 의료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방에서 수련을 받는 것에는 분명 장단점이 있습니다. 먼저 장점을 말씀드리자면, 수도권 병원에 비해 전공의 모집 경쟁이 덜 치열합니다. 그래서 원하는 인기 과에 지원했을 때 합격할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높죠. 또한, 대부분의 동료들이 모교 출신이라 아는 사람들과 함께 일할 수 있다는 것도 큰 장점입니다. (물론 이것은 단점일 수도 있다는 것!)
하지만 단점도 있어요.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학회 활동이나 연수 참여가 물리적으로 어렵습니다. 이는 최신 의학 지식을 습득하는 데 어려움을 줄 수 있죠. 또 다른 단점은 대체로 의사 본인의 인적 커뮤니티가 그 지역에 한정된다는 점입니다.
특히 연구를 하고 싶어 하는 의사들에게는 이 점이 큰 장벽이 될 수 있어요. 요즘 최신 연구는 혼자 하기보다는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과 협업하는 경우가 많거든요. 이런 협업을 위해서는 다양한 전문가들과 자주 만나 친밀한 관계를 쌓는 것이 중요한데, 지방에서는 그런 기회가 상대적으로 적습니다.
예를 들어, 제가 의학과 공학의 융합에 관심이 있어 융합의학 연구를 하고 싶다고 가정해 볼까요? 서울이라면 여러 병원의 전문가들, 기초의학자들, 심지어 공학자들과도 쉽게 만나 아이디어를 교환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지방에서는 그런 기회가 훨씬 적어요. 이는 결국 연구의 질과 양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또 하나 아쉬운 점은 시간이 갈수록 지방 대학병원에서 수술을 받지 않고 서울의 대형병원으로 가시는 환자분들이 늘어난다는 거예요. 특히 SRT와 KTX 같은 고속철도의 개통으로 서울의 대형병원 접근성이 크게 개선되면서 이러한 경향이 더욱 두드러지고 있습니다. (그림 1)
실제로 삼성서울병원이나 강남세브란스병원 같은 대형병원들은 SRT 수서역에서 직접 셔틀버스를 운행하고 있어요. 이는 지방 환자들이 서울의 대형병원을 더욱 쉽게 이용할 수 있게 만들었죠. 결과적으로 지방 대학병원들은 점점 더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제가 수련받은 영남대학교병원 정형외과에서도 이러한 경향이 나타났습니다. 우리 병원에는 전국에서 손꼽히는 골종양 수술의 대가이신 신덕섭 교수님이 계셨습니다. 하지만 몇몇 환자분들이 지방에서 진단을 받고 난 후, 수술은 서울에서 받고 싶어 하는 경향이 있었어요. 저 역시 전공의 시절 이런 환자분들을 위해 진료의뢰서를 작성해 드린 적이 몇 번 있었습니다.
사실 이해는 됩니다. 큰 수술을 앞두고 더 유명한 병원, 더 큰 병원을 찾는 것은 당연한 마음이겠죠. 하지만 의사로서 저의 생각은 조금 달랐어요. 수술은 경험이 많은 의사가 할 때 성공 확률이 높습니다. 그런 면에서 서울에 있지만 상대적으로 젊은 교수님보다는 오랜 경험을 가진 저희 병원의 교수님께 수술을 받는 것이 환자에게 더 좋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이러한 현상은 지방 의료기관에 위기이자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환자들의 선택을 받기 위해 의료 서비스의 질을 높이고, 특화된 진료 분야를 개발하는 등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장기적으로 이는 지방 의료의 전반적인 수준 향상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반면에 외상 환자의 경우는 달랐습니다. 아무래도 급한 상황에서 아픈 몸을 이끌고 서울까지 가기는 힘들기 때문에, 지방에서 수술을 받는 경우가 많았어요. 그 덕분에 저는 다양한 외상 수술을 경험할 수 있었죠. 물론 환자가 많다 보니 정말 바빠서 고생도 많이 했지만요.
이런 경험 덕분에 제가 전공의 때 쓴 논문의 대부분이 외상을 주제로 하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지방 병원의 특성이 전공의 시절 제 연구 관심사에도 영향을 미친 셈이죠. 이는 제게 의사로서, 그리고 연구자로서 성장할 수 있는 귀중한 기회였습니다. 지방 병원에서의 이런 경험이 없었다면, 외상 분야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와 연구 경험을 쌓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전공의 시절 딱 한 번, 수술 후 환자분이 돌아가신 적이 있습니다. 90세가 넘은 고령의 환자분이셨는데, 대퇴골 골절로 오셔서 수술을 받으셨어요. 수술 자체는 성공적이었지만, 며칠 후 돌아가셨죠.
이런 상황에서 늘 환자 보호자분들과 의사들 사이에 비슷한 대화가 오갑니다. "수술은 성공적이었는데 왜 돌아가셨나요?" 충분히 하실 수 있는 질문이죠. 하지만 의학적으로 볼 때, 고령 환자의 대퇴골 골절은 그 자체로 생명을 위협하는 중대한 상황입니다.
연구 결과를 보면, 대퇴경부 골절 환자 중 수술을 받지 않은 분들의 30일 및 1년 사망률이 수술을 받은 분들보다 약 4배나 높다고 합니다. (Al-Mohrej, Omar A., et al. Geriatric Orthopaedic Surgery & Rehabilitation, 2020) 이런 근거를 바탕으로 의사들은 수술을 권하게 되죠. 하지만 수술을 하더라도 사망 위험은 여전히 존재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환자나 보호자분들과 충분히 소통하는 것이 정말 중요해요. 수술의 필요성과 위험성을 모두 설명드리고, 동의를 구한 후에 수술을 진행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타까운 일이 발생할 때가 있죠.
사실 이런 상황은 의사에게도 정말 힘든 순간입니다. 우리도 환자분의 치료 결과가 좋기를 간절히 바라거든요. 환자분이 건강을 되찾으실 때 의사도 비로소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어떤 의사도 고의로 환자에게 해를 끼치려 하지 않아요. 오히려 최선을 다했음에도 결과가 좋지 않을 때 의사들도 깊은 좌절감을 느낍니다. 이런 마음을 환자분들과 보호자분들이 이해해 주시면 정말 감사할 것 같아요.
제 경험상, 지방에서는 이런 상황에서도 환자분들이나 보호자분들이 의료진을 조금 더 이해해 주시는 것 같았어요. 물론 슬픔은 크셨겠지만, 큰 원망 없이 받아들여 주시는 모습에 감사함을 느꼈습니다. 이러한 경험들은 제게 의사로서의 책임감과 겸손함을 깊이 새겨주었습니다. 동시에 환자와 보호자와의 소통, 그리고 의학적 결정에 대한 윤리적 고민의 중요성을 일깨워주었습니다.
20대의 첫 직장을 선택할 때, 많은 분들이 독립을 고민하실 거예요. 저도 마찬가지였죠. 하지만 전공의 생활이 얼마나 고된지 알고 있었기에, 가족의 지원을 받을 수 있는 환경에서 수련을 받는 것이 큰 장점이 될 거라고 판단했습니다.
또 하나의 솔직한 이유는 성적이었어요. 지방에서 의대를 졸업한 새내기 의사가 수도권의 대형병원에 인기과 전공의에 합격하려면 내신 성적과 의사국가고시 성적이 상당히 뛰어나야 합니다. 고등학교에서 내신과 수능이 중요하듯 의사들에게도 이 두 가지 성적이 매우 중요하답니다. 냉정하게 제 성적으로는 국내 유명 수련병원에서 인기과에 합격할 가능성이 그리 높지 않다고 판단했습니다.
하지만 지방에서 전공의로 일하면서 느낀 가장 큰 어려움은 역시 교육 기회의 부족이었어요. 앞서 말씀드렸듯이 대부분의 연수강좌나 워크숍이 서울에서 열리다 보니, 참석할 때마다 상당한 시간과 비용이 들었죠.
더 아쉬운 점은 월급마저 서울의 유명 수련병원들보다 적다는 거예요. 전공의 월급 자체가 너무 적은데, 거기에 비해 상대적으로 더 적으니 지방에서 수련받는 의사 입장에서는 정말 속상할 수밖에 없었죠.
지방 수련병원의 또 다른 특징은 병원이나 의국의 선후배 관계가 대부분 대학 선후배 관계와 겹친다는 거예요. 이게 장점이 될 수도 있지만, 때로는 단점이 되기도 해요.
예를 들어, 전공의 수련 중에 불합리한 일이 있어도 자기주장을 하기가 쉽지 않아요. 그동안 쌓아온 모든 인간관계가 무너질 수 있다는 부담감 때문이죠. 이런 환경이 의국의 생산성과 효율성에 도움이 될 때도 있지만, 때로는 더 창의적이고 수평적인 문화를 만드는 데 걸림돌이 되기도 합니다.
이런 여러 가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저는 지방 의료의 최전선을 지킨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전공의 시절을 보냈어요. 지역 주민들과 끈끈한 정을 나누고, 의사와 환자 사이의 관계도 매우 좋았죠.
하지만 동시에 의료 서비스의 질을 높이고 지방 의료를 발전시키기 위해 해결해야 할 과제들도 많다고 느꼈습니다. 교육 기회의 확대, 연구 환경 개선, 우수한 의료진의 유치 등 아직 갈 길이 멀어 보입니다.
이 모든 경험들을 통해 저는 의사로서의 정체성을 더욱 단단히 할 수 있었습니다. 지방 의료 현장에서의 도전과 성취는 제게 의학의 본질과 의사의 역할에 대해 깊이 고민할 기회를 주었습니다. 앞으로도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더 나은 의사, 더 나은 의료인이 되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지방에서 시작하는 글로벌 의료인의 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