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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역판정전담의사의 슬기로운 도시생활

3년간의 솔직한 일상과 성장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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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첫 부임지, 광주 】


대한민국에서 태어나 병역의무가 없었다면 살면서 단 한 번도 마주치지 않았을 것 같은 많은 병역판정전담의사들과 귀중한 인연을 맺게 되어, 1년 또는 2년씩 같은 병무청에서 근무하게 되었습니다. 같은 청에 있는 병역판정전담의사 선생님들과는 늘 막역하게 지냈고, 특히 1년차 때 처음 함께 온 동기들과는 더욱 가깝게 지냈습니다.


저의 첫 부임지는 광주전남지방병무청이었습니다. 이곳에 함께 온 1년차 판정의사들과는 즐거운 추억이 참 많았습니다.


먼저 관사 생활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병무청에서 제공한 관사에서는 2인이 함께 생활했습니다. 저는 늘 부모님 집에서 출퇴근했던 터라 다른 사람과 함께 살아본 것이 처음이어서 재미있는 일들이 많았습니다. 서로 삶의 사이클(취침 시간, 기상 시간 등)은 달랐지만 잘 지냈던 것 같습니다.


또한 이 친구들과는 한 달에 한 번씩은 늘 저녁식사를 함께 했습니다. 광주에 있는 유명한 맛집들, 카페들 등을 다니면서 그동안 살아온 인생 이야기를 나누고 추억을 만들었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2018년 러시아 월드컵 독일전에서 손흥민 선수가 골을 넣었을 때, 그 축제 같은 순간을 저의 관사에서 함께 했던 추억입니다. 지금 생각해 봐도 정말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림 1)


1*_JdL3my1mNztB_j7O0TT0Q.png 그림 1. 광주전남지방병무청 관사에서 동기 판정의사들과 함께 월드컵을 시청하며 환호하던 모습. 낯선 땅에서 만난 소중한 인연들과 나눈 잊을 수 없는 순간이었다.



마침 같은 정형외과에서 근무했던 이선호 전문의와는 공동 연구도 함께 진행할 만큼 막역하게 지냈습니다. 학자로서 우애를 다지는 방법 중 하나는 논문을 같이 쓰는 공동연구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생각하기로는 고상한 방법의 친목 활동이라고 여겨집니다. 이 친구와는 평발 진단을 주제로 함께 연구하여 공동 저자로 논문을 여러 편 출간했습니다. 지금도 매년 학술대회 때마다 차담을 나누는 사이입니다.



【 고향을 떠나 가장 오래 살아봤던 곳, 수원 】


2년차가 되어 경기도 수원에 위치한 경인지방병무청으로 부임지를 옮겼습니다. 여기 동기들과도 막역하게 잘 지냈습니다. 쉬는 시간이 생기면 늘 신경외과 조의진 판정의사 선생님 뒷자리로 모여서 근황 이야기 등을 나누었습니다. 그 자리가 사랑방 같은 곳이었습니다. 이 친구들과는 3년 1개월간의 병역 의무가 끝나고도 한 번씩 모임을 갖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경인지방병무청은 수원의 화성행궁 담벼락 바로 아래에 있어서, 많은 관광객들이 방문하는 이곳을 우리는 평일에 편안한 복장으로 다녔던 추억이 있습니다. 여러 맛집들과 카페들을 방문했고, 특히 관사가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여러 선생님들과 저녁식사도 가끔 했습니다. 그 시절이 한 번씩 생각납니다.



【 공무원 사회의 현실을 마주한 순간 】


경인지방병무청에 첫 부임했을 때 황당한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여파는 1년을 가게 되었습니다. 병역판정전담의사는 각 과목별 전문의가 판정을 하고 한 명의 수석의사가 최종적으로 점검하는 시스템입니다. 제가 2년차 때 부임한 이곳에는 수석의사로 부임하게 될 한 신규 전담의사 선생님이 질병을 사유로 전시근로역(면제) 처분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아쉬운 점은 본인도 의사이면서 본인이 그런 병이 있는 것을 알고 있었다면, 병역판정전담의사로 배치되기 전에 전공의 시절에 전시근로역 처분을 받았으면 이곳에 공백이 발생할 이유가 없었는데, 병역판정전담의사로 결정이 나고 난 뒤에 전시근로역으로 편입되어 우리 병무청에 공백이 발생한 것이었습니다.


판정의사들은 병무청 높은 분들께 새로 의사 충원을 요청했으나 판정의사 급여로는 민간의사를 채용할 수 없다는 답변을 받았습니다. 1년간 공백이 발생한 것을 나머지 의사들이 돌아가면서 그 자리를 메워가며 일했지만, 돌아온 보상은 아무것도 없었다는 것이 아쉬웠습니다. 병무청 직원 분들도 규정이 없어서 못 도와준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일을 겪으면서 공무원 조직과 사회에 대해 이해도가 높아지게 되었습니다.



【 잊을 수 없는 하루 】


한 번은 섬뜩한 일이 있기도 했습니다. 일과가 끝나고 공부를 하고 있는데, 모르는 휴대전화 번호로 연락이 왔습니다. 받아보니 저에게 여러 차례 재검을 받았던 수검자였습니다. 이 수검자는 좀 복잡한 사연이 있던 분이어서 듣자마자 기억이 났습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병원에서 진료를 받고 저에게 병무상담을 원해서 전화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처음 병무청에 부임하고 받았던 교육 중에 매우 강조한 점이 있었습니다. '수검자와 직접 개인적인 연락을 주고받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유는 병역면탈 등의 비리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너무 당황해서 바로 생각이 나지 않았지만, 전화를 끊을 때쯤 그 사실이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일단 그 수검자가 하는 이야기를 최대한 들어주었고, 문제가 되지 않는 선에서 판정에 관한 것을 설명해 드렸습니다. 그리고 전화 마지막에 저에게 개인적으로 전화를 거는 것은 불법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제 개인 휴대전화 번호는 어떻게 알았는지 물어보았습니다.


그 수검자의 대답은 점심시간에 제가 차에 있는 짐을 가지러 잠시 나갔을 때, 그것을 보고 제 차 번호판에 적힌 휴대전화 번호를 입력해 놓았다고 했습니다. 저는 그 뒤로 차에 휴대전화 번호를 필요한 경우에만 올려두게 되었습니다. 정말 섬뜩한 경험이었습니다.



【 1년간 3번 이사 】


2018년 4월에 고향집 대구에서 광주로 이사했고, 2018년 9월에 광주에서 전주로 이사했습니다. 그리고 2019년 4월에 전주에서 수원으로 이사했습니다. 1년여 시간 동안 이사를 3번 한 것이었습니다.


이사를 여러 번 하면서 느낀 점이 몇 가지 있습니다. 첫 번째로 이삿짐이 적어야 이사가 쉽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다른 사람에 비해 단출한 세간을 꾸려 살아왔습니다. 그래서 이사가 그렇게 어렵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사를 한 번 하면 하루 이틀 정도는 좀 앓아누워야 했습니다. 이때의 기억이 짐을 많이 늘리지 않는 삶을 살게 한 것 같습니다.


이사를 하면서 지도를 보며 가장 먼저 찾는 것은 편의점이었고, 그다음은 도서관이었습니다. 집 가까이에 도서관이 있다는 것은 정말 축복이었습니다. 그다음은 근처에 시장이 있는지 찾아보았습니다. 집 근처에 시장이 있으면 반찬을 사기 좋았고, 한 번씩 외식하기도 좋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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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년의 마무리 - 시원섭섭한 그 순간 】


3년의 판정의사 신분이 마무리될 때 시원섭섭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전공의 시절에는 늘 단수여권이나 1년 단기여권만 만들 수 있어서 매년 사진을 새로 찍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었습니다. 저는 이제야 드디어 1년짜리 유효기간의 단기여권이 아닌 5년 또는 10년짜리 여권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국가에 대한 의무 중 하나를 완료한 것이었습니다.


국방의 의무를 마쳤을 때 그 기분은 시원 섭섭 그 자체였습니다. 그 기간이 저를 성장시켜준 부분도 분명 있었지만, 국가가 상대적으로 긴 기간 동안 여러 공무원의 의무를 지켜가며 생활하게 한 것은 답답한 부분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몸 건강히, 사고 없이, 무사히 병역의 의무를 수행해서 기뻤습니다.



“Friendship is the only cement that will ever hold the world together.”

"동기들과의 우정이야말로 3년간의 병역생활을 버텨낼 수 있게 해준 든든한 버팀목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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