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염병의 시대, 그 시절 우리가 겪은 모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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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겨울,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대 감염병의 시대가 찾아왔습니다. 중국에서 최초로 보고된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코로나19)는 전 세계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끼친 무서운 감염병이었습니다. 범국가적인 감염병이다 보니 병무청에서 병역판정전담의사로 근무하고 있던 소시민인 저에게도 삶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많은 분이 사망하셨고, 거의 모든 분이 최소 한 번 이상 코로나에 감염되어 격리를 겪었을 것입니다. 코로나19는 약 2년 동안 많은 인명피해와 함께 사회를 크게 변화시켰습니다. 대면업무는 많이 감소하였고, 비대면 업무는 크게 증가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코로나19 사태 초기에 병무청에서 병역판정전담의사로 근무 중이었고, 야간에는 공학대학원 컴퓨터공학 전공 소속으로 통학하고 있었습니다. 그 외의 시간에는 미국의사국가고시 (USMLE) 공부를 하고 있었습니다.
평범했던 일상은 어떻게 바뀌게 되었을까요?
저는 고향 대구에서 나고 자라 전문의까지 취득하였습니다. 제 고향을 사랑합니다.
당시 대구에서는 특정 종교 모임을 통해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전파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태 초기에 전국 평균보다 대구에서 많은 사람들이 감염되기 시작하였습니다. 당시 코로나19 바이러스에 감염되면 감염된 환자의 동선이 전국적인 뉴스에 보도되기도 하였습니다. (사진 1)
당시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의 수석대변인이 2020년 2월 "대구·경북에 최대한의 봉쇄 조치"를 한다고 발표했다가 취소하는 사건도 있었습니다. 고향에 계신 부모님도 최대한 조심하시면서 사람이 많은 곳에는 가급적 가시지 않고, 거의 모든 시간을 집에서만 보내시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때부터 부모님께 자주 전화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종교가 없는 저로서는 특정 종교 대면 모임에서 전파된 병이 특정 지방에 유행하여 도시 전체가 사람들로부터 부정적인 이미지를 갖게 된 것이 참 안타까운 마음이었습니다.
모든 국민이 그러하셨던 것처럼 저의 일상도 잠시 동안 봉쇄되었습니다.
초창기에 병무청 신체검사 업무가 몇 주간 중단되었다가, 마스크 착용으로 전파를 차단할 수 있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검사가 재개되었습니다.
저는 일과가 끝나면 야간대학원에 통학하고 있었는데, 대학원 수업도 모든 수업이 대면 수업에서 비대면 수업으로 전환되었습니다. 연차가 올라가면서 병무청 부임지를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이 조금씩 생겼는데, 대면 수업이 사라질 줄 알았다면 굳이 수도권에서 병역판정전담의사 복무를 수행할 필요가 없었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아울러 수업이 없는 날에는 미국의사국가고시(USMLE) 공부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늘 시간이 있을 때마다 관사 근처에 있는 선경도서관을 방문하였습니다. 안타깝게도 수원시 내 모든 공공도서관이 휴관하게 되었습니다. (사진 2)
그래서 업무가 끝나도 갈 곳이 없어진 저는 병무청 사무실에서 문이 닫을 때까지 수업을 듣고 공부를 해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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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무청 신체검사가 잠시 중단되던 때에, 판정의사들끼리 의기투합하여 소속 지방병무청장님께 건의드려 근처 보건소에 코로나19 방역 봉사활동을 나가겠다고 의견을 제시하였습니다.
대면 검사 업무가 중단되어 있는데 출근은 또 해야 하는 상황이니, 덕분에 개인 공부 시간이 늘어나는 의외의 기회 때문에 약간 좋은 면도 있었지만, 업무 없이 출근하는 것도 이상하여 봉사활동에 나가겠다고 모두 지원하였습니다.
저희 병무청장님과 면담 자리가 만들어졌고, 의사들의 따뜻한 마음이 너무 고맙고 좋아 보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현재 코로나의 전파 속도가 너무 무서워 어떻게 될지도 모르고, 곧 판정업무가 재개될 것 같은데 여러분이 감염되면 국가적인 손실이라고 말씀하시며 정중히 거절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아무래도 군대체복무 중이라 소속이 국가 소속이다 보니 그렇구나 생각하였습니다.
당시 많은 의사들이 봉사활동에 참여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저희도 동참하려고 하였으나 아쉽게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2018년 3월에 저는 정형외과 전문의가 되어, 한 달간 논산훈련소에서 훈련을 받은 뒤 3년간 병역판정전담의사로 복무하였고, 2021년 4월 8일 민간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풀타임 의료인공지능 연구원이 되었습니다.
대학원 수업을 듣기 위해 연차휴가를 아껴서 미복귀전역과 비슷한 형식으로 3월부터 대학원 생활을 시작하였습니다.
일반대학원 학생은 장학금을 등록비의 총 85% 또는 50% 정도 받을 수 있는데, 저는 입학할 때의 신분이 공무원이어서 '일반장학'이 아닌 '공무원장학'으로 분류되어 30%만 받을 수 있었습니다. 한두 푼도 아쉬운 시기였기에 장학금이 줄어드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었습니다.
규정상 장학 담당하시는 행정직원분과 통화했을 때 알게 된 사실은, 작년 코로나 유행 시기에는 개강이 늦어져서 4월 중순에 개강했었기 때문에, 작년에 입학했다면 '일반장학'으로 분류되었을 것이라고 알려주셨습니다.
코로나가 만연했던 작년에 입학했다면 더 큰 장학금을 받을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들었지만, 동시에 전염병이 퍼지는 것이 옳지 않기 때문에 참 복잡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제가 공학박사과정으로 의료영상 인공지능 연구원을 시작하고 나서 영상의학과 분야의 전 세계 가장 큰 학회인 RSNA2021에 초록을 제출하여 구연발표로 채택되었습니다. 당시에는 백신을 맞은 사람을 대상으로 특별한 증상이 없다면 해외에 다녀올 수 있는 시기였습니다.
그래서 2021년 11월 말에 출국하여 미국 시카고에서 무사히 발표를 마치고 학회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었습니다. (사진 3)
그런데 갑자기, 12월 3일 0시부터 모든 해외 입국자에게 10일 격리를 의무화한다고 하였습니다. 오미크론 변이 바이러스가 전 세계적으로 유행하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아예 학회에 참석하지 않았을 텐데, 나가 있는데 새로운 격리 의무화 규정이 생겨서 정말 당황했던 기억이 납니다. 제가 돌아올 일정보다 하루 일찍 귀국하시는 분들은 격리의무가 없었고, 제가 돌아올 날부터 격리가 시작되는 것이 아이러니였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우리 사회에 미친 영향은 정말 지대합니다. 일단 전 국민이 마스크를 쓰는 것이 정말 자연스러운 일상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비대면 사업이 번창하고 대면 사업이 상대적으로 위축되었습니다. 연구 분야에서는 비대면 회의가 큰 흐름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인간이 관계를 맺는 방식을 바꿔놓았습니다. 예전에 새벽까지 이어지던 회식 문화도 많이 사라졌고, 회식도 저녁식사 후에 끝나는 분위기로 많이 바뀌었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는 저에게도 이런 영향들을 끼치게 되었습니다.
“Smooth seas do not make skillful sailors”
"고요한 일상 속에서는 진짜 성장을 경험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