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의 사회는 금수저 집안에서 태어나야 출세도 하고 대접받는 사회가 됐습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우월한 유전자를 갖고 있어야 그 가치를 인정받는 사회입니다. 존 번연은 목사도 설교를 잘해 신도들이 많아지고 헌금이 많이 들어오면 많은 봉급을 받고 사는 사회에 대해 축재의 도시에서 온 사람들의 입을 통해 말하고 있습니다. 나도 황새들과 함께하는 이 순례길에서, 요즘 우리 사회에서 축재 선생의 제자들을 직접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런 사회에서 오직 믿음이란 용어 조차 사용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단지 '한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는 것이 나를 영접하는 것이라!' 하신 말씀을 다시 한번 새겨봅니다.
허영의 도시를 빠져나온 크리스천은 소망과 함께 순례길에 나섰습니다. 두 순례자는 한 참을 걷던 중 집착, 돈사랑 그리고 노랭이를 만났습니다. 이들은 탐욕의 시에 사는 축재(蓄財) 선생의 제자들이었습니다. 이 도시에서 축재 선생은 그들에게 폭력, 사기, 아첨, 거짓말 그리고 신앙의 허울 뒤집어쓰기 온갖 술책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축재 도시 출신의 집착, 돈자랑 그리고 노랭이 (2021)
"저기 앞서가는 사람들은 누구지! 우리와 같이 순례길을 가는 것 같은데, 왜 우릴 거들떠보려 하지 않지!"(돈사랑) "우리는 '지나치게 의롭다는 말씀을 읽은 적이 있거니와 너무 고지식한 성격의 사람들은 사람을 판단할 때 자신들의 주장을 내세워 자신들 이외의 사람들을 비난하고 정죄하지요"(노랭이)
"나도 하나님을 믿고 있는데,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우리에게 많은 것을 베푸시고 허락해 주셨으니 우리로 하여금 베푸신 것들을 잘 보존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이치에 맞는 일이 아닐까요?"(집착)
"그 점에 대해서는 우리 모두 의견이 일치됩니다."( 노랭이)
"나는 목사들도 많은 보수도 받고 성도들을 위해 일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목사의 설교가 훌륭하다면 성도로부터 많은 헌금도 걷고 또 그걸로 큰 예배당을 지면, 이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게 아닙니까?"(돈사랑)
결국 크리스천이 이들 말에 끼어들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믿음이 있는 자라면 어린아이라도 그런 문제 수만 개쯤은 대답하고도 남을 겁니다. '사람이 단지 빵을 얻기 위하여 예수님을 따르는 것조차 불법이라 하였거늘' 예수님과 종교를 이용하여 현세의 쾌락과 유익을 얻는다는 것이 얼마나 혐오할 만한 일인가요! 이교도들이나 위선자들, 악마나 마녀들이 아니라면 그 같은 행위는 찾아볼 수 없을 것입니다. 옛날에 하몰과 세겜이 야곱의 딸과 가축에 탐을 내었으나 오직 유대인들처럼 할례를 받아야만 그들에게 접근할 수 있음을 알게 되었을 때, 그들이 모두 할례 한 것처럼 우리도 모든 남자들이 할례를 받는다면 그들의 가축과 짐승과 재산 및 그 밖의 모든 것이 다 우리 것이 되지 않겠느냐?'라고 말했습니다. 결국 그들은 야곱의 딸과 가축을 얻고자 하는 그들의 목적 달성을 위해서 종교를 하나의 방편으로 이용하고자 했지요."
세 사람은 크리스천의 말을 듣고 어떤 반박도 못한 채, 그들만의 순례길로 향했습니다. 이들과 헤어진 크리스천과 소망은 안락이라고 불리는 멋진 평원에 이르렀습니다.
축재 선생의 후예들
어느 날 황새 복원 사업이 자연과학자의 연구사업이 아닌, 축재 시에서 온 '돈자랑', '집착', '노랭이'의 제물로 바뀌어 버렸습니다. 그 축재 시는 우리나라에서 꽤 유명하다는 모 언론사입니다. 그들은 상금을 마련하여 마구잡이식으로 황새를 자연에 뿌려 대고 있는 한 지자체 단체장에게 한일환경상이라는 이름으로 포상을 수여했습니다. 많은 돈은 아니었지만, 이 사업이 연구사업이라는 것을 모르고, 환경보호로 포장하여 이 사업의 본질이 가리어지고 있다는 사실에 너무 가슴이 아팠습니다.
내 가슴이 아프면 황새들도 가슴이 아파할 겁니다. 그런 일이 일어난 후, 황새들에게 나뿐 일들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마구잡이로 방사한 황새들이 전신주 감전사로 죽었습니다. 농약중독으로 신음하고, 낚싯줄에 한 다리가 잘려나간 채 돌아다니고 있는 모습을, 황새를 사랑하는 어떤 사람이 사진을 찍어 내게 보여주었을 때, 나는 오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돈자랑', '집착'과 '노랭이'가 돈이 많고 하나님의 영광을 외친다면 전신주 지중화 사업에 보태주면 안 될까요? 그들에게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조상 때부터 폭력, 사기, 아첨, 거짓말 그리고 신앙의 허울 뒤집어쓰기 등, 온갖 술책에 대해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사정도 모른 채, 내가 재직하고 있었던 학교에서는 대자보 하나가 붙었습니다. '박시룡 교수는 학교 구성원이 공적으로 사용할 땅을 개인의 연구목적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내용으로 당장 학교를 떠날 것'을 성토하는 내용의 대자보였습니다. 대학에 들어온 지 10년 만에 황새 복원 연구를 한다는 이유로 대학에서 쫓겨날 상황과 마주했습니다. 잠시 학교 내에서 연구를 접고, 인사동에 나갔습니다. 무엇보다 다수의 국민들에게 황새를 알리기 위해서였습니다.
인사동에는 이미 국민대 환경디자인을 전공하시는 윤호섭 교수께서 환경보호 포퍼먼스를 하고 계셨을 때였습니다. 나는 윤교수님의 동의하에 교수님 옆에서 준비해 간 황새모빌과 브로셔를 나누어 주는 일을 했습니다. 그때 윤교수님은 행인의 흰 티셔츠에 황새 그림도 그리셨습니다. 그때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었던 것은 '우리나라 마지막 황새가 밀렵꾼의 총에 맞아 완전히 사라졌고, 러시아에서 황새를 도입, 증식과 함께 오염된 우리 자연을 재생시켜야 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때는 윤교수님께서 하루에 100~200명의 행인들의 티셔츠에 그림을 그려줄 정도로 반응이 뜨거웠습니다.
인사동에서 그림을 그려주는 사람(2004)
그 후 몇 년이 지난 뒤 코로나19가 찾아왔던 때, 내가 직접 물감과 붓을 들고 인사동과 여의도 샛강에 나갔습니다. 코로나로 인해 사람들의 반응이 신통치 않았습니다. 대신 국회의사당 앞에서 1인 시위를 했습니다. 우리나라도 이젠 '황새법'을 제정을 하자는 시위였습니다. 황새법은 일명 '농경지 생태관리기본법'이라고도 합니다. 황새가 사유재산인 주민들의 논에서 먹고살아야 하기 때문에, 주민들이 농약을 사용하지 않고 농사를 지었을 때 국가가 그 소출의 감소분에 대해 생태관리비로 지원해 주자는 내용의 국회 청원을 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그 법안은 최소 5만 명의 동의를 얻어야 국회 소위원회에서 안건으로 상정되는데, 그마저도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자연과학자로 살면서 모든 것이 실패로 돌아가, 도대체 내 나라 황새복원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는게 하나도 없었습니다.
결국 증식시켜 놓은 황새들은 어떻게 될까? 하나님께 맡기며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기도밖에 없었습니다. 꿈속이었습니다. 천사가 나타나더니 노인을 앞에 두고 커다란 흰 쪽지를 보여 주며 무슨 말을 건넸습니다. 나는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직 알지 못합니다. 혹시 내 딸아이의 아기가 태어나 소녀가 되었을 때, 그 아이가 국회의사당 앞에 서서 "내 할아버지를 아시나요?" 질문을 던질 것 같습니다. "그는 황새법을 만들기 위해 매일 국회 앞에서 서성거렸습니다"
내 할아버지를 아시나요?(2022)
황새 복원은 돈을 주고 살 수 없습니다. 우리 모두의 생각과 마음이 바뀌어진다면, 언젠가 이룰 수 있다는 희망일 뿐입니다. 주님은 내가 실패하는 일에도 함께 하십니다. 성경(롬 4:16-18)은 이 실패를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우리의 일이 실패로 끝나는 것처럼 보이지만, 안에서는 하나님께서 단 하루도 빠짐없이 은혜를 펼치시며 새로운 생명을 창조하고 계십니다. 현재의 힘겨운 시기는 장차 다가올 복된 시기, 우리를 위해 마련된 성대한 잔치에 비하면 하찮은 것에 불과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지금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오늘 이 자리에 있다가 내일이면 사라지고 말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히 지속될 것입니다’.
어린아이와 같은 심령
나는 크리스천으로 실패를 매번 나의 덕목이 부족의 원인으로 생각하는 성향이 있습니다. '내가 자연과학자로 노벨상을 받은 학자라면 남들이 날 이렇게 취급하지 않았을 텐데... 그리고 황새 복원 연구가 이렇게 실패로 끝나지도 않았겠지!' 그러나 황새 복원 일을 하는 나에게 성경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시기심이나 교만한 마음을 품고서 다른 사람들과 자신을 비교하면서 살지 말라' 하십니다. '자기가 아닌 다른 무엇이 되려고 애쓰려 했는지'(롬 12:6)도 말입니다. 다른 사람을 존중하는 마음은 중요하지만, 한편으로 하나님이 지으신 자신을 열등감에 빠트릴 수 있어, 과학자이자 크리스천으로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삶을 살아가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성경의 말씀을 보고 교훈 한 가지를 얻습니다.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 신 이를 영접함이니라'(막 9:37).
예수께서 집에 계실 때에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너희가 길에서 토론하던 것이 무엇이냐?" 제자들은 자기들끼리 누가 가장 큰 사람인지를 두고 서로 입씨름을 벌였던 것입니다. "너희가 첫자리를 원하느냐? 그렇다면 끝자리로 가거라.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라"(눅 9:35). 이렇게 말씀하시고 예수님은 방 한가운데에 어린아이들 가운데 하나를 품으시며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들 가운데 하나를 나처럼 품으면 곧 나를 품는 것이고, 또 나를 훨씬 넘어서서 나를 보내신 하나님을 품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린아이를 영접, 즉 품는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요? 무시당하기 일쑤인 사람들에게 사랑의 관심을 베풀라는 주님의 가르치심을 읽을 수 있습니다.
길거리에서 거지를 만났습니다. 나는 아무거나 먹을 것을 사려고 한다며 내게 잔돈을 구걸했습니다. 별 반응을 기대하지 않다가 내가 만 원짜리 한 장을 주자 그는 펄쩍 뛰며 "감사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의외로 큰돈에 놀라 어쩔 줄 몰라했지만 나는 갑자기 마음이 한없이 슬퍼졌습니다. 나는 빠지고 싶지 않은 모임에 가고 있던 길이었습니다. 내 적선은 걸음을 멈추지 않기 위한 구실이었으니까요. 나는 거지를 영접하지 못했습니다. 그저 인심 좋은 자가 되려 했을 뿐입니다. 내 인심은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라는 주님의 말씀과 큰 괴리를 느낍니다. 지금까지 나는 내 마음도 바꾸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들의 마음이 바꾸어지길 기대했으니까요.
어린아이의 영접(2022)
예수님은 또 어린아이를 안으시면서 제자들의 경쟁심을 나물 하셨습니다. 나는 제자들의 세상의 경쟁심을 지적하는데 왜 주님은 어린아이의 영접을 꺼내드셨나? 곰곰이 생각해 봤습니다. 이른 아침 새벽에 더러운 쓰레기를 수거하는 아저씨가 있습니다. 그 쓰레기 안에는 방금 버린 어린아이의 1회용 기저귀도 들어있었습니다. 한 어린아이의 엄마가 말합니다. "얘야, 방금 네가 똥 싼 기저귀를 치우고 계시는 저 아저씨가 참 고맙지 않니! 저 아저씨가 있기 때문에 네가 병에 걸리지 않고 건강하게 살고 있는 거란다." 그러나 다른 엄마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얘야, 너도 공부 안 하면 저 아저씨처럼 쓰레기 줍는 사람이 된단다. 저렇게 오물이 묻은 옷을 입고 쓰레기 치우는 사람이 돼야 하겠느냐?" 제자들의 경쟁심이 바로 후자의 엄마와 같은 생각, 그리고 축재의 시에서 온 순례자들-돈자랑, 노랭이, 집착-에게 주님은 늘 천국에는 누가 더 큰 자인지를 질문하십니다. 비록 나는 황새복원 연구의 실패자이지만, 천국에서는 실패한 사람이 아니길 바람니다. 실패의 원인을 '자연과학자인 내가 노벨상을 받은 학자가 아니라서 이렇게 되고 만 거야!" 하는 생각도 이제는 버려야겠습니다. 우리는 늘 누구는 더 낫고 누구는 모자라기라도 한 것처럼 비교하면서 삽니다. 그러나 어린아이는 남을 이렇게 판단하고 비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라고 하신 말씀은 어린아이는 아무도 판단하지 않는 심령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