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선재센터에서 오는 4월 20일까지 하종현 작가(1935~)의 초기 작업을 조명하는 《하종현 5975》를 개최한다. 본 전시는 작가가 홍익대학교를 졸업한 1959년부터 그의 대표 연작 <접합>이 시작된 1975년까지의 작업을 4개의 시기로 나누어 조명한다. 또한 그가 회화의 본질과 물질성에 대해 펼친 실험적 탐구를 집중적으로 다룬다.
작가 하종현. 사진 남서원. 제공 아트선재센터. ⓒ 2025. Art Sonje Center all rights reserved (1)
전후 시대의 불안에서 실험적 추상으로
하종현의 예술 세계는 한국전쟁 이후 급격한 산업화와 도시화 속에서 이루어졌다. 1950년대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작품 활동에 매진한 그는 유럽의 앵포르멜 회화에 영향을 받았다. 그는 전쟁의 상처와 사회적 불안을 어두운 색조와 두꺼운 물감, 불에 그을린 표면으로 표현했다. 전후의 황폐한 현실을 화면에 구현한 이 시기의 작업들은 이후 그가 물질과 회화의 경계를 실험하는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1960년대 후반, 하종현은 도시화와 경제 성장이라는 새로운 사회적 변화에 주목하며 작품 주제를 확장했다. 〈도시계획백서〉 연작은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67–1971)의 흐름 속에서 만들어지는 도시의 구조적 변화를 추상적 패턴과 색채로 시각화한 대표작이다. 이와 함께 〈탄생〉 연작에서는 전통 단청 문양과 직조 기법을 현대적으로 변형해, 근대화 과정에서 점차 사라져가는 전통과 새롭게 형성되는 도시적 구조 사이의 균형을 탐구했다.
하종현, _도시계획백서 67_, 1967, 캔버스에 유채, 112 x 112 cm. 작가 제공.
《하종현 5975》 설치 전경. 사진 남서원. 제공 아트선재센터. ⓒ 2025. Art Sonje Center all rights reserved
아방가르드와 사회적 실험
1969년, 하종현은 비평가 이일을 포함한 12명의 예술가와 함께 한국아방가르드협회(AG)를 결성하여 전위적 실험미술의 장을 넓혔다. 이 시기 작가는 철망, 신문지, 시멘트 가루, 스프링 같은 일상적 재료를 활용하여 사회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작업을 진행했다. 특히 거울과 엑스레이 필름을 활용한 1970년의 설치작 〈작품〉은 사회적 억압과 언론 검열에 대한 은유적 표현으로 해석된다. 이번 전시에서는 이 작업을 50여 년만에 도면을 기반으로 재현하여 다시 선보인다.
《하종현 5975》 설치 전경. 사진 남서원. 제공 아트선재센터. ⓒ 2025. Art Sonje Center all rights reserved
(좌)〈작품 72-5(B)〉, 1972(2010년 재제작), 패널에 철조망, 182×273 cm. (우)〈작품 72-5(A)〉, 1972(2010년 재제작), 패널에 철조망, 182×273 cm. 사진: 남서원. 제공: 아트선재센터. ⓒ 2025. Art Sonje Center all rights reserved.
〈접합〉 연작의 탄생, 배압법의 실험
1974년부터 하종현은 회화와 조각의 경계를 넘나드는 실험을 거듭하며 〈접합〉 연작을 시작했다. 그는 기존의 평면 회화를 벗어나 입체적 물질성을 강조하기 위해 마대자루를 캔버스로 활용하는 ‘배압법’을 고안했다. 이는 캔버스의 뒷면에서 물감을 밀어내어 전면에 나타나도록 하는 독창적인 기법으로, 신체적 행위와 물질성을 결합한 회화적 실험이었다.
〈접합〉 연작은 단순한 형식적 변화가 아니라, 회화가 가진 매체적 한계를 넘어서는 시도였다. 직조된 마대 표면을 통해 흘러나오는 물감의 물질적 질감과 깊이는 화면 위에 예상치 못한 조형적 효과를 만들어냈으며, 하종현은 이를 통해 새로운 회화적 언어를 확립해 나갔다. 이후 2010년부터 〈이후 접합〉이라는 제목으로 새로운 형태의 실험을 이어가며, 지금까지도 그의 대표적 작업으로 자리 잡고 있다.
《하종현 5975》 설치 전경. 사진 남서원. 제공 아트선재센터. ⓒ 2025. Art Sonje Center all rights reserved
〈접합 74-98〉, 1974, 마포에 유채, 225×97 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사진 남서원. 제공 아트선재센터. ⓒ 2025. Art Sonje Center all rights reserved.
하종현의 실험정신을 돌아보며
《하종현 5975》는 그의 초기 실험이 단순한 기술적 탐구가 아닌, 한국 현대사의 흐름과 맞닿아 있음을 보여준다. 전쟁의 기억, 산업화와 도시화, 사회적 억압에 대한 성찰, 그리고 물질과 회화의 경계를 확장하려는 시도는 그의 작업 전반을 관통하는 중요한 주제들이다. 이번 전시는 하종현이 특정한 방법론에 안주하지 않고 시대적 변화와 함께 지속적으로 진화해 온 예술가임을 강조하며, 그의 조형 언어가 어떻게 형성되고 발전해왔는지를 조망한다. 전시는 4월 20일까지.
한국전쟁 이후, 미술은 무엇을 기록해야 했는가?-하종현의 회화적 실험과 시대적 응답 < 전시 < 미술 < 기사본문 - 데일리아트 Daily Ar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