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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소운 May 10. 2021

기.승.전.결

별로 특별할 것 없는 옛날 이야기

후렌치 파이가 떨어졌다.

절망이다. 캐비넷 가득 쌓아 놓았던 게 엊그제 였는데.. 엊그제는 좀 과장이고 아마 한 2-3주? 아님 한두달…?? 핸드폰을 체크한다. 정확히 3주전 목요일이었다. 한국 시장에 물건 들어오는 날이었다. 박스째 사다가 쟁여 놨는데 벌써 다 먹어버렸다. 올 겨울은, 유난히 설탕이 많이 필요하다. 후렌치 파이가 없으면 하루가 돌아가지를 않는데… 기승전결 후렌치 파이… 오랜 기억이 바스라진다.  


1.       기 - 시작


대한민국의 배꼽.. 서울의 서울 대학병원 (서울에 있는 서울 대학병원이라니.. 얼마나 단순하고 무성의한 이름인가!) 에서 도도가 태어났다. 칼바람이 몰아치던 한 겨울 빙판길을 핑계로 아무도 아이를 보러 오지 않았다. 부모 둘 다 상경해서 직장 생활을 했기에 친척들이 모두 멀리 있었다. 고향에서는 소문난 수재들이었지만, 그런 인재들만 모아놓은 대기업은 치열했다. 아이를 낳았다고 마음놓고 쉴수도 없다. 휴직은 곧 퇴직이던 시절.. 도도는 출근하는 엄마 대신 동네 아주머니에게 맡겨졌다.


2주일 후, 같은 병원에서 라라가 태어났다. 아마 도도가 누웠던 그 플라스틱 신생아 침대를 썼을지도 모른다. 어르신들이 추위를 뚫고 줄줄이 드나들었다. 아들만 드글드글하던 집안에 첫, 그리고 그 이후로도 쭉 유일한 딸이 나왔다. 뭐 특별한 거 없이 평범한 아가였지만, 과분한 사랑을 당연스레 받았다. 한겨울이라 특히 꽃이 귀하던 시절임에도, 양팔로도 다 들지도 못할 커다란 백합 꽃다발이 도착했다. 카드가 들어있다.


“공주님, 태어나느라 고생했어요. 얼른 커서 나한테 시집와요. 도도 왕자”


도도 엄마와 라라 엄마는 오랜 친구다. 비슷한 시기에 결혼하고, 비슷한 시기에 아이를 낳은, 요즘 말로 절친이었다. 한 직장에서 일하는 십년지기 대학 동창이자 자매같은 사이였다. 집도 가까워 주말이면 두집이 자주 모였다. 꼬물꼬물한 두 아이가 한 이불을 덮고 자거나, 우유를 먹거나, 토하거나 똥을 싸도 모든게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도도가 눈을 떠 제일 먼저 보는 사람이 라라였고, 라라가 잠들기 전에 마지막으로 보는 사람이 도도였다. 둘은 남매처럼 쌍둥이처럼, 점점 옷도, 장난감도, 가끔은 엄마 젖도 공유하며 자랐다. 5살에 도도가 이민을 가기 전까지는…  


“얘들이 자라서 기억할까? 난 5살때 기억이 하나도 없어.”

“가서도 연락해야지. 국제 전화 비싸니까 편지 써. 사진이라도 자꾸 보면서 생각하게.”


카톡이나 이매일이 없던 시절이다. 전화는 비싸기도 했지만 질도 많이 떨어졌다. 대신 국제 우편 봉투가 빵빵하도록 여러장의 사진과 편지가 왔다. 도도와 라라는 간당간당하게, 서로의 끈을 이어갔다.


“라라! 이 카드 게임 알아? 미국에서 많이 하는 거야.”


갓 중학교를 입학했을 때, 도도의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상을 치르러 잠시 한국에 나왔다. 출국을 앞둔 저녁에 도도네 가족이 라라네 왔다. 실물로 마주한 도도는 사진보다 키가 많이 컸다. 잇몸이 다 드러나도록 활짝 웃는 게 영락없는 미국 사람이다. 한국말은 다 잊어버리고 영어로만 이야기한다. 영어 초보인 라라에게 도도는, 천천히, 손으로 눈으로, 이야기했다. 우노라는 종이 카드를 가져왔다. 처음보는 게임이지만, 한국의 원카드 같은, 그런거였던 것 같다.


“바보야, 이런 어린 애들 게임도 몰라? 너 미국와서 배워. 우리집에 가서 살자, 내가 가르쳐 줄께.”

“쟤 좀 봐, 네가 라라 데려갈려고? 어려서도 꼭 붙어지내더니 정이 남았나보네. 라라 엄마, 어떻하니? 우리 아들이 너네 라라 훔쳐간다.”


도도의 얼굴이 잠깐 빨개졌지만, 부인하지는 않았다.


“앞일은 아무도 모르잖아? 기다려봐. 우리가 스무살쯤 되면, 그때는 혹시 모르지?”

“아이구야, 남자 놈들은 다르구나. 벌써 라라 찍어 놓는거야? 아줌마 적금 넣어야겠다, 너네 스무살에 결혼 시키려면..”


저녁도 다 먹었겠다, 둘이서만 슬쩍 놀이터로 나갔다. 한참을 그네에 앉았다가 도도가 쪽지를 내밀었다.


“이거, 내 학교 주소야. 집으로 편지하면 엄마가 자꾸 볼려 그러니까, 이제부터는 여기로 보내. 알았지? 기다린다, 꼭 보내.”


쪽지를 받아 주머니에 넣었다. 도도가 머뭇거리며 다가왔다.


“그리고 이거, 이상한 짓 아니야. 미국에서는 이렇게 인사해. 친구끼리.. 잘 있으라고..”


긴 팔로 라라를 살짝 안아주었다. 라라는 어색했지만, 싫지않아 가만히 있었다. 도도가 웃었다.


“너 진짜 바보구나. 너도 날 안아줘야지, 이렇게..”


라라의 팔을 들어 자신의 허리에 둘렀다. 아무도 없는 집 앞 놀이터에서 둘은 한번 더 꼭 안고 미국식 작별인사를 했다. 이마에 잠깐.. 아무 소리 안나게 살짝 스쳐가듯, 아주 짧은 뽀뽀를 받은 것 같기도 했다.


2.       승 – 재회


대학생이 되었다. 한쪽 눈이 많이 나빴던 라라는 학기 중에 눈 수술을 받았다. 회복이 늦어 여전히 흐릿한 눈으로 학교를 건성건성 왔다갔다만 했다. 총장님 이름으로 편지가 왔다. 빨간 리본을 두른 하얀 종이… 귀하의 자녀 라라가 이번 학기에 평점 1.8로 학사 경고를 받았습니다, 다음에도 또 이 꼬라지면 학교 짤립니다… 뭐 대충 그런 이야기... 며칠 후 라라는 처음으로 국제선 비행기를 탔다.


LA공항은 크고, 시끄럽고, 복잡했지만, 도도는 한눈에 라라를 찾아 손을 흔들었다. 중고등 시절 내내 펜팔을 해 온 터라, 어제, 그제... 매일 만나 온 친구처럼 편했다. 훌쩍 커진 서로를 보며 웃음이 터져나왔다. 예뻐졌네.. 원래 예뻤어.. 웃기지 마, 너 엉망이었어.. 죽을래? ... 예전보다 더, 도도는 남자인 척, 그것도 아주 다 큰, 센 미국 남자인 척 했다.


“가방 이리 줘, 내가 할께. 비행기 힘들었지?”


메고 끌고.. 반가움에 들떠 쉴새없이 재잘거리며 주차장으로 갔다. 도도는 그사이 빨간색 말보로를 하나 피웠다. 오호, 다 컸다 이거지… 라라는 한국말로만 이야기했고, 도도는 영어로만 답했다. 그래도 문제없이 알아들을만큼, 서로의 언어를 많이 공부해왔다. 조수석 문을 열려고 하자 도도가 재빨리 팔을 잡았다.


“아니야, 그런건 내가 하는 거야.”


짜식.. 이정도 문은 나도 열 수 있어.. 라라는 얌전히 차에 올랐다. 도도가 문을 닫아준다. 거울로 도도가 보였다. 헐렁한 티셔츠에 LA 다저스 모자를 썼다. 어른이다... 쿵… 트렁크에 짐을 넣고 운전석쪽으로 걸어왔다. 절대 훔쳐보지 않은 척, 반대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신청해 놓은 영어 프로그램이 시작하기 전까지 몇주동안을 도도네 집에 있었다. 손님방은 2층 맨 끝이었는데 화장실을 사이에 두고 도도의 방과 붙어있었다. 주로 도도 혼자 쓰는 화장실이었지만, 라라에게 양보하고 자기는 아랫층을 쓰겠다고 했다. 뭐 굳이 그럴것 까지야.. 같이 써도 되는데 왜 아랫층까지 가냐고 물었다.


“너 여자잖아. 불편할까봐... 네가 손님이니까... 괜찮아, 난 어차피 잘 때 빼고는 아랫층에 있으니까.”


짐을 풀고 씻으러 들어갔는데, 샤워기가 안된다. 한국에서 쓰던 것 처럼 이리저리 돌려봤지만, 물이 나오지 않았다. 몸에 큰 수건을 돌돌 말고 화장실 문을 빼꼼 열었다. 옆 방에서 음악 소리가 들렸다. 도도를 불렀다. 도도야, 물이 안나와.. 답이 없다. 큰 소리로 다시 불렀다.. 도도야, 물 안나와아아~~~ 음악이 멎었다. 여전히 아무 소리가 없다.. 야, 도도! 샤워기 못 틀어, 물 틀어줘~~


거짓말처럼, 도도가 욕실에 들어와 손을 뻗자마자, 쏴아아… 물이 나왔다. 돌리는게 아니라 힘껏 잡아당기는 거였다.


“아직도 바보네. 나오잖아, 이정도면 됐어?”


라라의 얼굴에 물을 뿌린다. 앗 차거.. 이 짜식이..! 라라도 뿌려보지만 키도 크고 팔도 훨씬 긴 도도가 한박자 빠르다. 아예 샤워기를 빼들고 라라에게 물을 뿌린다. 샤워 부스 안에 들어가기도 전에 쫄딱 젖었다. 건식 화장실 바닥에 물이 흐른다. 으흐흐.. 너 죽었어…


“쉿, 엄마 알면 우리 진짜 죽어. 들어가서 씻어, 여긴 내가 닦을께”


라라가 씻는 동안, 샤워 커텐 너머로 도도가 바닥을 닦았다. 그날부터 도도는 아래층 화장실을 쓰지 않았다. 같이 있어서 불편할 일이 하나도 없었다. 오히려 라라가 샤워 할 때 마다 와서 물을 틀어주고, 머리카락을 치워주고, 반짝반짝 싱크대를 닦아 주었다. 바짝 마른 수건들을 걸어놓는 것도 그의 일이었다. 처음 미국에 온 라라에게, 도도는 마법이였다. 도도야, 라면 먹고 싶어.. 도도야, 티비 못 켜.. 도도야, 콘센트 어딨어? 도도야, 세탁기는 어떻게 해…? 바보냐고 면박을 주면서도, 도도는 대신 세탁기를 돌리고, 건조까지 다 해서 가져다 주었다.


한국에는 없던 케이블 채널이라는 게 있었다. 몇 백번까지 올라가는 채널을 돌리느라 시간가는 줄 몰랐다. 매일 밤 티비를 봤다. 팝콘과 맥주를 먹었다. 만 스무살이 안되었었지만, 집에서만 마시는 거면, 맥주 몇 병 쯤은 괜찮다고 허락 하셨다. (사실 한국에서는 이미 온갖 술을 다 섭렵한 다음이었다)


“어? 신곡 나왔네? 나 본조비 진짜 좋아하는데.. 목소리 멋있지, 응?”

“목소리, 아니면 외모? 너도 백인 좋아해? 좋아하지마, 저렇게 생긴 애들은 다 게이야.”


본조비의 뮤직 비디오만 찾아보려는 라라에게서 리모콘을 뺏어갔다. 앨모가 나오는 세사미 스트릿을 틀어 놓는다. 넌 이거 보면서 영어나 공부해.. 너 죽어, 진짜..? 내놔, 리모콘… 싫어, 말하기 연습해야지, 너 다 알아듣는데 왜 말할때는 한국말만 해?.. 너도 그렇잖아, 다 알면서 영어만 하잖아, 리모콘 내놔... 싫어, 나 가끔 한국말도 해… 그래? 해봐, 뭐 할줄 아는데?


“기집애…”


할 줄 안다는 한국말이 겨우 기집애다. 웃음이 터졌다. 리모콘을 잡으려고 도도의 무릎 위에 반쯤 타고 앉았다가 그 한마디에 와르르 쓰러졌다.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내뱉는 기집애 소리가 귀여워 양손으로 도도의 뺨을 잡고 흔들었다.


“어디서 그따우로 한국말을 배웠어? 이 짜식아.. 똑바로 배워야지, 기집애가 뭐야?”

“너 말야, 예쁜 기집애...”


눈이 마주쳤다. 소란이 멈췄다. 잠시, 두 손 안에 담긴 그의 입술을 보았다. 예쁜 건, 도도였다. 어려서부터 참 예쁘다고 생각했었다. 볼을 감쌌던 두 손 그대로 도도의 귀 옆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마도 깨끗하게 넘겨 주었다. 도도는 라라가 하는대로 가만히 내버려 두었다.


“.. 졸린가봐, 네가 잘생겨보여... 얼른 자자.”


라라가 후다닥 옆자리로 내려 앉았다. 바보… 도도가 중얼거리며 티비를 껐다. 라라가 먼저 일어나 계단으로 향하려는데, 뒤에서 스탠드가 꺼졌다. 깜깜하다... 하나도 안보인다.. 계단이 어디더라.. 도도가 라라의 허리를 잡아 방향을 틀어준다. 계단 열두개를 양손으로 라라의 허리를 잡고 올라갔다. 다 된 줄 알고 마음 놓은 마지막 계단에서 콩.. 발가락을 부딪혔다… 아야.. 쉿, 바보.. 이쪽으로 와.. 도도의 방으로 밀려 들어갔다. 침대에 앉혀놓고 라라의 다리를 들어 자기 허벅지 위로 얹었다. 발가락을 살살 만져준다. 괜찮아? 응.. 근데 그 발 아냐, 이쪽 발이야.. 크흐흡.. 쉬잇., 조용… 엄마 깬다.. 간지러워, 그만해.. 다리를 내려준다.


"오늘 내 방에서 잘래?"


도도가 물었다… 왜? .. 그냥, 얘기도 더 하고 싶고, 잠도 안오고.. 너네 엄마가 아시면 쫒겨나.. 괜찮아, 쫒겨나면 내 아파트로 가지 뭐… (도도는 가까운 다른 도시에서 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우리 학교로 와. 내 방에서 같이 지내도 돼. 난 거실에 있을께… 안돼, 너네 학교는 영어 프로그램이 없어.. 너 어학연수 안해도 돼. 바로 학부로 들어가.. 여기 갑자기 온거라서 토플 점수가 없어.. 그럼 그거만 빨리 시험봐서 학교 옮겨, 나 다니는 데로. 나랑 같이 있자..


밤이 깊었고, 새벽이 왔고, 도도와 라라는 불도 안 켜고 누워 이야기했다. 한국 얘기, 미국 얘기, 학교 얘기, 가족 얘기, 연애 얘기.. 몇날 며칠을 밤새 이야기하느라 아침에는 정신을 못 차렸고, 점심때나 되어서 겨우 내려가곤 했다. 절대 아무도 모르도록… 일어나는 건 각자의 방에서 일어났다. 둘 다 선수다.


“어쩌면 아침에 늦잠 자는 것도 똑같니? 엄마 출근하니까 밥은 너네가 알아서 해먹어.”


도도 엄마도 포기하시고, 대신 도도가 요리를 한다. 베이컨, 햄, 계란, 토스트.. 주로 샌드위치다. 라라가 나선다… 두부김치, 골뱅이+소면, 반건조 오징어와 땅콩… 할 줄 아는 게 전부 술 안주 뿐이다. 냉동 감자튀김을 꺼내 오븐에 넣고 아이스크림을 얹어 디저트로 먹는다. 간식으로는 서랍장에 쌓여있던 후랜치 파이를 공략했다. 그래, 미국와서 굶어 죽지는 않겠구나…


“너 잠깐 온다 그랬을때, 둘 다 다 커서 만나는 거라 사고라고 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며칠 두고 보니까, 라라 네가 도도를 참 잘 다루더라. 다행이야, 쟤가 내 아들이지만 많이 거칠어. 쟤, 여자도 맨날 바뀌거든. 저 나이 미국 남자애들끼리 자취하면서 얼마나 개판이겠니? 잘 해준다고 홀랑 믿지 말고, 알았지? 너무 가까이 가거나 만지거나 하면, 싫다고 해. 어려서부터 널 많이 좋아해서, 말을 듣긴 할거야. 근데 넌 어쩜 그렇게 빼짝 마른 애가 참 씩씩하다, 우리 도도가 꼼짝을 못하네. 너한테 치근덕 거리지는 않지?”


도도가 잠깐 없는 틈에, 그의 엄마가 라라에게 소근소근 물었다. 아뇨, 안그래요.. 걱정 말고 다녀오세요... 도도 엄마가 야근하던 날, 작은 지진이 있었다. 뭐가 드르릉.. 진동이 오나 하는 순간, 도도가 라라의 손을 잡고 빠른 걸음으로 어디론가 들어갔다. 문을 닫으니 완전히 암흑이다. 여긴 뭐야? 대피해야지, 지진이야… 그런게 있어?.. LA잖아, 위험해… 네가 더 위험해.. 왜?.. 너 바람둥이지.. 바람둥이? 그게 뭐야?... 바람 피는 사람있잖아… 풍차?... 크흐흐.. 또 한번 빵 터졌다.. 풍차가 왜 나와… 쉿.. 조용… 도도가 라라의 입술에 손가라을 갖다 대었다… 조용히 해, 누구 깰지도 몰라.. 왜? 여기 오면 안돼? 지진이라 대피한다며? .. 너랑 둘만 오면 안되지, 안그래도 너무 붙어있다고 자꾸 잔소리하는데… 누가? 아줌마가? ..둘 다, 걱정되나봐.. 니가 나 덮칠까봐?.. 아니, 니가 나 덮칠까봐… 짜식, 진짜…


라라를 바짝.. 벽으로 붙여 세웠다… 네가 좋아. 아파트로 데려가고 싶어. 같이 가자… 라라가 잠시 대답을 망설였다. 대신 손을 뻗어 도도의 머리를 쓰다듬어 진정시켰다.. 아니야, 도도야, 그건 아닌거 같애. 나는, 여기에서 잠깐만 학교 다니다가, 한국 다시 가야되고.. 가지마, 같이 있어. 아줌마한테는 내가 나중에 얘기 할께… 너 바보구나, 한국 부모들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아… 상관없어, 난 미국 남자야, 다 큰 어른 남자. 내가 알아서 할테니까, 넌 그냥 따라오면 돼.. 어둠 속에서, 라라에게 팔을 둘러 꼬옥 안았다… 너랑 같이 가고 싶어.. 진심처럼, 심장 뛰는 소리가 들렸다.


또 허리를 꼭 잡고 깜깜한 계단을 올랐다. 이번에는 라라의 방문 앞까지 손을 풀지 않았다. 굿나잇 인사를 한다. 양쪽 옆구리를 잡고 온 두 손으로 단단히 뒤에서 안는다… 진짜 잘거야? .. 응, 너 사고치기 전에 얼른 자야돼. 방에 따라 들어오지마… 음, 따라 오라는 소리 같은데?.. 웃기지마, 발로 차서 쫒아낼거야.. 그렇게 못할 껄, 이렇게 꽉 잡고 있잖아.. 너도 내가 무섭구나?.. 어, 무서워, 네가 진짜로 갈까봐 무서워. 다시는 못 만날 것 같아.. 라라가 도도의 팔을 풀고 뒤돌아 마주 섰다. 어깨에 이마를 기댄다. 도도가 라라를 가만히 쓰다듬는다… 괜찮아, 도도. 조금만 더 지나서.. 이번에는 여기까지만 하자. 다음에 또 만나면, 그때는 망설이지 않을께… 다시 올거야? 언제?... 몰라, 네가 한국 오면 되잖아.. 내년에? 스무살에?.. 그래, 스무살에 다시 만나면, 그때는 니꺼해..


3.       전 – 헤어짐


학교로 떠나기 전날 밤, 아쉬움에 최대한 늦게까지 영화를 봤다. 티비를 끄고, 스탠드를 끄고, 늘 그랬듯이 라라의 허리에 손을 얹고 계단을 오른다. 근데, 너 말이야.. 계단 중간에서 갑자기 라라가 멈춰섰다. 휘리릭 뒤돌아 도도를 마주본다. 계단 한칸 아래에 선 도도와 키 차이가 많이 나지 않는다. 도도의 손은 여전히 라라의 옆구리를 잡고 있다.. 너 왜 여기 불 안켜고 올라가? .. 그게 뭐..?.. 저기 계단 아래에 스위치 있고, 저 위에 올라가서 끄는 스위치 또 있잖아. 근데 넌 왜 맨날 여기 불 안켜? 솔직히 말해봐, 너 그냥 나 만지고 싶어서 그러는 거지? .. ㅎㅎㅎ 도도가 웃었다… (미국 집은 계단에 스위치가 위아래에 다 있다) 어떻게 알았어?.. 이 짜식, 정말이네? 엊그제 보니까 위층에 스위치가 하나 있길래 한번 켜봤어. 잘 되던데? .. ㅋㅋㅋ 맞아, 잘 돼.. 너, 이 바람둥이..


도도가 두 팔을 조여 라라를 당겨 안았다.. 너 다칠까봐 잡아주려고 그랬어.. 거짓말쟁이, 안 믿어..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라라 역시 도도의 어깨위로 팔을 얹었다… 바람둥이 짓 그만해.. 미안해, 예뻐서 그랬어, 내가 너 좋아하잖아.. 좋아, 용서한다.. 진짜? 그럼 뽀뽀해줘… 잠시 주저하던 라라가 도도의 입가에 살짝 입술을 스친다… 야아, 그런거 말고, 진짜 뽀뽀.. 아니야, 나중에, 다음에 만나면, 그때 할거야… 난 진짜 너 보내기 싫어, 알아? 그냥 나랑 가면 안돼?.. 우리, 금방 다시 만날거야. 그때는 네 말 다 들을께..


밤새 도도의 방에서 이야기를 나눴다. 깜빡 잠이 든 새벽이 지나고 공항에서 정말 이별을 맞았다. 비행기 시간이 다될때까지 함께 앉아 있었다. 꼭 잡았던 손을 놓고 어쩔수 없이 게이트로 들어갈때, 도도가 본조비의 새 앨범을 내밀었다.


“네 꺼야, 가져가. 딱 이 사람까지만 허락하는 거야. 다른 남자 좋아하기 없기. 너 학교 가서 아무 놈이나 잘해준다고 따라가지말고.. 특히 잘 생긴 백인 애가, 나처럼 너 잡아주고 도와주고 그래도, 절대 믿지마…”


라라가 웃었다. 도도는 마음이 안 놓이는 얼굴로 라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혼자 아무것도 못하면서 겁도 없이 어딜 간다고.. 진짜 보내기 싫지만, 이번 한번만이야. 미국은 한국하고 달라. 많이 위험해. 절대 아무나 만나면 안돼. 그리고, 여기 씨디 안에  내 주소랑 전화번호 적어놨어. 돌아오고 싶으면 언제든지 와. 거기 도착하면 새 연락처 바로 알려주고... 미국 있는 동안 전화라도 자주 하는 거다, 약속해.”


4.       결 – 정말 안녕


시간은 빨리 흘렀고, 땅은 너무 넓었다. 사랑 타령만 하기엔, 어른의 삶이라는 건 많이 바빴다. 전화가 왔다. 도도가 죽었다. 심장마비라고 했다. 전화기가 꺼져있다. 허겁지겁 들어가 본 그의 페이스북에는 너무 단촐해서 더 슬픈, 너무 아름다워서 더 허무한.. 날짜 지난 장례식 안내문이 있었다. 줄을 잇는 지인들의 메세지…


‘도도, 정말이야? 난 믿을 수가 없어… 그렇게 건강하던 네가 가다니..’  

‘우리의 영원한 친구 도도가 생전의 약속대로 시신을 기증해, 7명에게 그의 장기를 나누어주고 떠났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친절하고 멋진 친구였습니다. 도도, 너를 잊지 않을께…’  


2주 빠른 도도의 생일을 지나며, 여전히 그가 생각난다. 말보로 광고가 나와도, 뮤직 티비를 봐도, 위아래 잘 켜지는 계단 조명을 봐도.. 유튜브에 남은 도도의 마지막 인터뷰를 자꾸만 돌려본다. 앞으로도 많이, 생각날 것 같다. 웃음 가득하던 맑은 눈동자, 중저음 목소리 - 바보, 바보… 예쁜 기집애… 도도가 떠난지 반년 .. 라라는 오늘도 도도가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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