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의 작은 도움이 저희에게 큰 힘이 됩니다.’
사람이 사람을 돕는 행위만큼 아름답고 인간적인 일이 또 있을까. 누구나 인생을 살아오면서 한 번쯤은 타인에게 도움을 준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럴 땐 상대방으로부터 진심 어린 감사의 인사를 받기 마련이다. 가끔은 그런 사소한 답례가 마음 한편에 따스한 온기를 더해주고 삶의 긍지를 심어 주기도 한다.
그런데 만약, 정기적으로 오랜 기간 타인을 도와야만 한다면? 어떠한 보답도 없이 나의 소중한 시간이나 돈을 누군가에게 소비해야만 한다면? 벌써부터 신경이 곤두설지도 모른다. 빡빡한 일상으로 인해 자신만의 시간조차 현저히 부족한 현대인, 혹은 고작 몇 백 원 아끼려고 눈알 빠지도록 인터넷 최저가를 찾아 헤매는 사람들에게 누군가를 꾸준히 도와야만 한다는 의무가 주어진다는 것은 일종의 압박감으로 다가올 수도 있다. 스트레스받아가며 굳이 남을 돕고 싶어 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현실은 영화나 드라마처럼 감동적이지만은 않다.
늦은 밤, TV를 틀면 이따금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마주할 수 있다. 화면 상단에는 구호의 손길을 기다리는 단체의 이름과 연락처가 적혀있고 방송은 그들의 지독한 실생활을 여과 없이 비춰준다.
국가, 성별, 인종의 구분은 중요치 않다. 기생충이 득실대는 구정물을 뜨기 위해 1시간 이상을 맨발로 걸어 다니는 아프리카 소년부터, 희귀성 난치병을 가진 아이를 키우는 대한민국 어느 부모의 모습까지. 아름다운 푸른 별의 절반이 하루하루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며 살아가는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에 적잖은 충격을 받는다. 마치 샤워를 마친 후 ‘아이고, 오늘도 고된 하루였네’ 라며 따스한 잠자리에 누우려고 이불을 펼치는 내 뒤통수를 누군가 힘껏 후려 친 느낌이다.
지금도 방영되고 있는 후원 방송들은 내가 얼마나 행복한 환경을 누리며 살고 있는지를 다시 한번 상기시켜준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방송을 보면서 안타까워한다. 기부에 대해 잠시나마 망설이기도 한다. 하지만 모든 감정은 그 순간의 찰나일 뿐, 채널을 돌려버리거나 방송이 끝남과 동시에 이성을 되찾는다. 심장을 쥐어짜 낼 듯이 먹먹했던 감정도 지갑이 열리는 상상과 함께 소리 없이 증발해 버리고 만다.
‘나도 힘든데 기부는 무슨, 어차피 기부해봤자 저 사람들한테 안 돌아가.’
월 200을 벌든 500을 벌든 모두가 한 목소리로 하소연한다. 나도 힘들다고, 지금 내가 죽게 생겼다고.
뭐, 어느 정도는 이해한다. 지옥 같은 그들의 현실을 목격하고도 태연하게 TV 채널을 돌리는 사람이 비단 당신만은 아니니까. 또한 삶이란 누구에게나 고난을 안겨 준다는 사실은 변함없으니까. 그만큼 기부는 쉽지 않은 일이다. 대담한 용기와 굳은 의지를 필요로 하는 행위임에 틀림없다.
6년 전쯤, 처음으로 기부를 시작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정기 후원이다. 당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대학교를 다니다가 집안 사정이 심각하다는 사실을 뒤늦게 인지하고 휴학을 신청했다. 그리곤 주구장창 일만 하던 시절이었다. 나 또한 매번 방송을 접하면서도 갈팡질팡 망설였었다. 그러다 어느 날 큰 맘먹고 NGO 단체를 검색해서는 무심코 후원을 신청해버렸다. ‘후원을 해볼까’라고 처음 생각한 때로부터 적어도 3,4년은 지난 후였다.
아이로니컬 한 사실은 형편이 그나마 괜찮았을 때는 그렇게나 망설였는데 경제 상황이 최악으로 치달을 때 덜컥하고 신청해 버린 것. 아직도 잘은 모르겠지만 그 당시 ‘지금’이 아니면 영영 못할 것만 같았다. 어쩌면 나 자신이 힘든 상황에서 나보다 더 어려운 사람들을 보고 용기를 얻었을 수도 있고, 어려운 삶을 같이 이겨내 보고자 하는 희망이 깃들어 있었을지도 모른다.
처음 후원을 하게 되면 고심 끝에 후원을 결정한 나 자신에게 큰 만족감을 느낀다. 나의 후원으로 그들이 얻게 될 혜택들을 알아보고 해맑게 기뻐하는 얼굴들을 상상한다. 나는 이제 보통 사람과는 다른 존재. 사회적 약자를 돕는 훌륭한 후원자가 된 것이다. 주변인들에게 맘껏 자랑도 해보고 후원을 권하기도 한다. 남을 도와주는 행위가 곧 나의 행복이 되는 신비스러운 마법을 경험하기도 하고, 난 역시 멋진 사람이라고 되뇌며 스스로에게 빠져 헤엄치는 시간도 제법 오래간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금전적으로 쫓기게 되면서 조금씩 예민해지기 시작한다. 내가 아는 후원자들의 대부분은 가난한 대학생이거나 시원치 않은 벌이에도 불구하고 한 푼 두 푼 아껴가며 후원하는 사람들이다. 한 달에 몇만 원이 우스워 보일지도 모르지만 100원짜리 동전 하나도 함부로 쓸 수 없는 상황이 되면 만 원짜리 한 장 꺼내는데도 손이 덜덜덜 떨리게 되는 법. 나는 결국 자랑을 뽐냈던 친구들로부터 놀림을 당했다.
“너 아직도 후원하고 있냐? 내 생각엔 네가 후원을 받아야 할 것 같은데.”
사랑스러운 친구들을 욕할 순 없다. 친구들이 없었다면 후원을 중단해야 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후원을 중단했다가 재개하는 것도 가능합니다). 그때의 나는 후원을 하는 동시에 친구들에게 밥과 술을 후원받는 놈이었다. 인생을 살면서 양아치라는 소리를 가장 많이 들었던 시기이지만 우정의 소중함을 일깨워준 값진 시간들이기도 했다. 너희도 후원에 동참한 거나 마찬가지다, 친구들.
해외 아동의 경우 1:1 정기 후원을 할 수 있다(국내 아동도 가능해요). 후원을 하게 되면 아동의 신상정보를 받고 펜팔을 하게 되는데 담담하게 적은 일상적인 내용과 직접 그린 귀여운 그림을 받아 볼 수 있다. ‘오늘은 이런저런 일을 해서 너무 즐거웠어요, 모두 후원자님 덕분이에요.’ 대략 이러한 내용의 편지가 온다.
아빠 미소를 짓게 한 첫 편지의 감동을 아직도 기억한다. 하지만 서로의 편지가 오가는데 많은 시간이 소요되고 점차 날이 갈수록 펜팔은 자연스럽게 뜸해진다. 후원받는 당사국의 정책에 의해 갑작스럽게 후원을 할 수 없게 되는 경우도 더러 있다. 그렇게 되면 다른 나라의 새로운 아이를 연결해주고 몇 년간 정 붙였던 아이는 영영 떠나보내야만 한다. 어떠한 방법으로도 소식을 들을 수 없다. 그때의 쓰나미처럼 밀려오는 허탈감이란......
이렇듯 금전적인 문제 이외에도 후원을 계속 이어나가야 할지에 대한 고민에 빠지는 일들이 여럿 발생한다.
나는 왜 후원을 하고 있는 걸까, 하고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있다.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위해서? 그들의 행복을 위해서? 물론, 최악의 상황으로부터 벗어나길 바라는 마음, 최소한의 교육은 받았으면 하는 바램과 같이 그들의 삶을 응원하기 위해 후원을 시작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오로지 나만을 위한 행위’에 지나지 않았나 하는 고민에 빠졌다. 나는 그들에 대한 동정심을 이용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 자신의 가치를 높이려는 수단으로써 후원을 지속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고.
‘후원이라는 아름다운 행위의 본질이, 그 상태, 그대로 남아주길.’
지금의 나는 더 이상 누구에게도 후원한다는 사실을 밝히지 않으며 후원 자체에 크게 의미를 두지 않는다. 자선을 베푼다면 아는 사람보다는 모르는 사람에게, 가까운 사람보다는 최대한 멀리 떨어진 사람에게 베풀려고 한다. 아무런 보상을 바라지 않고 단지 주는 것만으로도 느낄 수 있는 행복, 그러한 행복의 진정성을 티끌만큼이라도 배우고 싶은 마음이다. 그러한 마음을 가지고 누군가를 돕는 행위야말로 ‘참다운 동정’ 임을 느낀다.
후원이라는 행위를 애써 강요하고 싶진 않다. 하지만 내 경험을 빗대어 말하자면, 후원이란 행위를 통해 어디서도 발견하지 못할 본연의 나 자신과 마주할 기회를 얻을 수 있고, 여러 가지 우여곡절을 겪을지도 모르지만 그만큼 경험해보지 못했던 새로운 감정들을 만날 수 있다. 일주일에 한두 번 마시는 커피 한잔 값으로 할 수 있는 값진 인생 공부라고나 할까.
‘선을 행하는 데는 나중이라는 말이 필요 없다’라는 괴테의 말처럼 혹시라도 마음이 있다면 하루라도 빨리 그 예쁜 마음을 보여주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보다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사회의 일원이 되었다는 기쁨을 꼭 누릴 수 있었으면 좋겠다. 금액은 중요치 않다. 중요한 건 그들이 조금이나마 인간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소망하는 우리의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