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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관희 Nov 05. 2020

오타쿠 아저씨

 다큐멘터리였던가. 채널을 돌리다 우연히 오타쿠에 관한 방송을 본 적이 있다. 당시 몇 명의 오타쿠가 나왔는지는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나의 인상에 남은 사람은 일본 여자 아이돌을 광적으로 좋아하는 대략 40대 후반의 일본 아저씨였다. 일본의 여자 아이돌은 인기의 척도를 가늠하기 위해 ‘선거’라는 방식을 실행하고 있는데(일부 아이돌에 한해서), 취재진이 촬영을 위해 방문했던 날이 선거의 결과가 발표되는 날이었다. 잘은 모르지만 팬들의 투표를 통해 전체 순위에서 100위권 안에 들어야만 그 아이돌의 미래가 어느 정도 보장되는 시스템인 것 같았다.

 

 아저씨는 진지했다. 인터뷰에서 자신이 응원하는 멤버는 한 번도 순위권에 든 적이 없기 때문에 크게 기대하지는 않는다고 말하면서도 설렘 가득한 표정으로 TV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이후, 갑자기 누군가의 이름이 불리자 아저씨는 깜짝 놀라 하며 감격의 눈물을 펑펑 쏟아냈다. 아저씨가 그토록 응원하던 멤버가 순위권 안에 든 것이다. 행복의 눈물을 흘리며 떨리는 목소리로 인터뷰를 하는 아저씨의 모습이 무척이나 인상 깊었지만 나는 당시 그 장면을 보면서 생각했다.      


‘역시 세상엔 정신 나간 사람들이 많구나.’     

 

 오타쿠들의 성지라고 불리는 도쿄의 ‘아키하바라’, 오사카의 ‘덴덴타운’ 같은 곳을 가면 오타쿠를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애니메이션 숍이나 카드 게임 숍, 피규어 숍 같은 곳엔 오타쿠들로 넘쳐 난다.

 

 예전에 오사카에서 공부했던 시절, 외국 친구들과 도쿄를 여행할 일이 있었다. 그때 ‘아키하바라’라는 곳을 처음 방문했다. 그 시절엔 그저 ‘용산전자상가’ 비슷한 곳이라는 이야기만 들어서 싸구려 카메라라도 하나 있으면 구입해볼까 하는 심정이었다.

 헌데 직접 방문한 그곳의 풍경은 가히 놀라웠다. 길거리 양 사이드에 메이드복을 차려입은 여자들이 일렬로 쭉 서있는 것이 아닌가. 거짓말 안 하고 관광객보다 메이드가 많아 보일 정도였다.

 그녀들은 하나같이 카페 팻말을 들고 방긋 웃으며 자신의 가게를 홍보하고 있었다. 나는 궁금한 나머지 외국인 친구들에게 함께 가보자고 권유했지만 메이드 카페의 가격을 보고는 모두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런 내 모습을 불쌍하게 여긴 친한 여동생이 선뜻 같이 가주겠다고 하여(혼자서는 도저히 갈 용기가 나지 않았어요) 나는 운수 좋게? 메이드 카페에 입성할 수 있었다.     

 

 그곳에서 우릴 불러주는 호칭은 특이했다. 나는 ‘오우지 사마(왕자님)’, 여동생은 ‘오히메 사마(공주님)’ 기분이 묘하면서 흥미로웠다. 이런 것이야말로 새로운 경험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혹시나 우리를 오타쿠로 오해하는 것은 아닐까’하고 눈치를 살펴가며 자리에 앉아 음료수를 마셨다. 카페는 크지 않았다. 그래도 좁은 공간 이곳저곳에 몇몇의 사람들이 있었다.

 

 나는 그중에서 한 사람을 주목하게 되었다. 해맑게 웃고 있는 나이가 지긋한 중년의 아저씨였다. 메이드와 함께 음식을 앞에 두고 “오이시쿠 나레(맛있어져라)”하고는 만화에나 나올 법한 마법의 주문을 목청껏 외치는 아저씨의 모습은 관광의 묘미를 만끽하게 해 주었다(물론, 몇 분 뒤에 나도 메이드의 요구에 맞춰 ‘오이시쿠 나레’를 외쳐야만 했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아저씨는 가방 한쪽에서 자연스럽게 선물을 꺼내서 메이드에게 건네주었다. 어색함이라곤 전혀 없었다. 메이드는 활짝 웃으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고 그 반응에 아저씨도 덩달아 행복해하는 장면, 어찌 보면 지극히 아름다울 수도 있을 그 장면이 내겐 상당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가상의 세계에서나 벌어질 신비스러운 상황을 두 눈으로 마주한 느낌이었다. 그 아저씨를 보며 내가 일본에 있다는 사실을 새삼 실감하기도 했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동정심과 혐오감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불쌍하고 처절한 인생들......’

 

 그곳에서 나는 나 자신에게 계속해서 주문을 걸었다. ‘나는 오타쿠가 아니라고’ ‘이곳을 들락날락하는 께름칙한 사람들과는 명확하게 질이 다른 사람이라고’     

 

 그로부터 꽤나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 내가 싫어했던 그들에게 혹시나 어떠한 문제가 있었는지를 문득 생각해 본다. 그리고 굳이 집어내라면 ‘나이가 들었다는 사실’ 밖엔 없지 않을까, 라는 결론에 이른다.

‘나이에 맞게 행동하라’를 정설처럼 여기는 인간 사회이기 때문에 청년이 하는 행동과 아저씨가 하는 행동은 동일하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젊은이가 방황하면 청춘이고 늙은이가 방황하면 주책인 것이다. 하지만 나이 먹은 사람도 충분이 방황하며 넘어질 수도 있고, 동년배보다 모든 면에 있어 부족할 수도 있다. 자신이 하고 싶다면 타인의 눈치를 보지 않고 행동할 권리 또한 가지고 있다.


 오타쿠들의 행복한 표정을 본 적이 있는가. 역설적이게도 내가 혐오하던 그들의 모습에서 행복의 본질을 발견한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의 주변 여러 곳에서 가식적으로 포장하고 비교하는 표면적인 행복과는 확연히 다름을 절감하게 되었다고나 할까. 우리는 그들을 사회 부적응자, 혹은 정신 나간 사람이라고 손가락질하며 멸시적인 태도를 취한다. 그들을 비난하는 행위를 통해 조금이나마 스스로를 위로한다. ‘자신은 그들보다 나은 삶’을 살고 있다며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론 자신보다 잘난 사람들을 바라보며 자괴감에 빠져 괴로워한다. 그렇게 영원히 끝나지 않을 비교의 굴레와 속박에 갇혀버리고 만다.


 우리는 오타쿠를 비롯하여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외형적으로 자신보다 못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습관처럼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진정으로 행복을 이해하는 그들이라면 우리에게 관심조차 주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행복을 위해 자신만의 확고한 가치관을 지닌 사람들이자, 그러한 삶 자체를 즐길 줄 아는 사람들이니까. 타인에게 자신을 투영시키지 않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행복을 찾아 만들어가는, 끝내는 남과 비교되지 않는 자기 자신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들이니까.

 

 틀에 갇힌 편견의 시선으로 바라봤던 나 자신을 돌아보며 생각해 본다. 과연 어느 쪽이 더 행복할까. 내가 과연 그들보다 더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을까.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만 않는다면 우리는 사회의 다양성을 존중해 줄 필요가 있다. 나아가 그 다양성을 이해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삶을 다른 방향으로 바라볼 수 있다. 삶이란 어떤 방향이 옳은 길이라고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다. 그르다고 여기던 타인의 삶의 방식도 한 번쯤은 들여다보고, 그런 타인의 사고방식에 자신의 상념을 빗대어도 보는 일. 자신만이 가지고 있던 기존의 가치 철학을 비틀어 바라보는 일. 누구에게나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오타쿠를 비난하지 말자. 누구나 가슴속 어딘가에 소년, 소녀가 살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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