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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관희 Nov 03. 2020

한정판이란 과연 의미가 있는 것일까?

 ‘한정’이라는 단어는 인간의 소유욕을 자극한다. 즉 ‘한정’되어 있다는 것은 누구나 다 가질 수 없다는 의미이기에 ‘한정’된 무언가를 획득했다는 자체로 우린 만족감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한정된 무언가를 소유한다는 사실은 많은 단점을 불러온다. 상대방은 없지만 나는 가지고 있다는 비교의식에 사로잡히기도 하고, 남들이 가치 있다고 여기는 것이 나에게도 가치 있을 것이라는 착각을 들게끔 한다. 결국은 한정된 존재의 본질보다는 그 외관이 뿜어내는 형태에 매료되곤 한다.

마치 ‘나란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보다 ‘나란 인간이 어떻게 비치는 존재인가’가 더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처럼.     

 

 2년 전부터 레코드판(바이닐, 비닐, LP)을 모으기 시작해 지금은 내 방 책장에 꽤 많은 음반이 모였다. 사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레코드판은 구경하기 어려운 물건 중 하나였다. 나 또한 내가 처음 구입한 레코드판이 태어나서 처음 본 레코드판이었다. 그런데 언제부터 인가 복고의 바람이 불어 오래된 음악은 물론 요즘 시대의 음악들도 레코드판으로 출시되고 있다. 옛 추억의 감성을 되살리고자 하는 이들의 염원이 통한 건지, 아니면 지금은 접하기 힘든 아날로그라는 희소성의 가치로 인해 주목받는 건지.     


‘이소라 베스트 LP, 800장 퍼플 한정판, 예약 판매 중’     

 

 처음 레코드판을 구입한 계기는 충동적이었다. 그저 평소대로 책을 구입하기 위해 인터넷 서점을 방문했는데 메인 화면에 뜬 저 문구가 나의 눈길을 사로잡은 것이다.

 ‘이소라 누님의 상징인 보라색 LP라니, 그것도 800장 한정반이라니!!!’

저건 무조건 사야 한다는 생각을 떨쳐 낼 수 없었다.


그러자 불쑥 나의 마음 한쪽이 비아냥거렸다.

‘너 지금 백수잖아, 돈이 남아돌아? 만약 저 LP를 사버리면 넌 다음 달은 물론 그다음 달까지 책을 살 수 없어. 그리고 결정적으로 넌 저 LP를 들을 수 없어. 턴테이블이 없잖아.’


그러자 다른 한쪽이 반박했다.

 ‘잘 생각해봐. 무려 800장 한정반이라고. 시간이 지나면 되팔 수도 있겠지. 나중에 그 돈으로 책 10권은 구매할 수 있을지도 몰라. 턴테이블은 나중에 사면 그만이야.’     

 사실대로 말하자면 잠깐 고민했을 뿐 귀신에 홀린 듯이 한정판 LP를 구매해 버렸다. 얼마 후 LP가 도착했고 설레는 마음으로 조심스레 꺼내 보았다. 키야... 눈부신 보랏빛 자태가 얼마나 영롱하던지 절로 미소가 나왔다. 그렇게 방 한쪽 눈에 띄는 곳에 모셔두고는 매번 먼지를 걷어내며 애지중지하던 나날을 보냈다.

 하지만 모든 것에는 권태라는 것이 존재하기 마련. 어느 날인가 방 청소를 하다 먼지가 내려앉은 LP를 닦으며 생각했다.


 ‘내가 이걸 왜 샀을까, 듣지도 못하고 매번 먼지만 털어내는 걸, 한정판이라는 소리에 낚인 거지’


한 푼 두 푼 아끼느라 집 밖으로 잘 나가지도 않던 시절이었다. 나에겐 거금이었던 4만 원을 들여 산 레코드판은 실용성이라고는 1도 찾아볼 수 없는 애물단지였다. 크기는 큼지막한 내 얼굴보다도 커서 놔둘 곳도 마땅치 않은 그놈을 볼 때마다 슬슬 짜증이 올라왔다. 결국 최대한 내 눈에 띄지 않길 바라며 나는 LP를 과감히 책장 위로 던져버리고는 잊고 살기로 했다.     

 

 시간이 흘러 다행히도 새로운 직장을 구하게 되었다. 그리고 여느 때와 다름없이 출퇴근길에는 항상 음악을 들었다.

스마트폰에 마구잡이로 집어넣은 음악들을 감상하던 어느 겨울날, 우연히 플레이 리스트 끝자락에 있던 이소라의 ‘고백’이 흘러나왔다. 감미로운 바이올린 선율, 심장을 울리는 콘트라베이스 리듬과 함께 시작되는 이소라의 목소리는 황홀 그 자체였다. 나는 지하철 안에서 두 눈을 감고 나만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4분이라는 짧은 시간이 추운 겨울 차갑게 얼어붙어있던 내 마음을 녹여주었다.

 

 음악이 끝난 후 나는 기존의 플레이 리스트를 싹 다 지운 후 이소라의 음악으로 가득 채웠다. 그리곤 오랜만에 내 앞에 차려진 그 황홀함을 마음껏 음미했다. 그러자 잊고 지냈던, 책장 위에서 무거운 먼지를 수북이 쌓아 올렸을 LP가 불현듯 떠올랐다. 나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책장 꼭대기에 올려 두었던 레코드 재킷의 묵은 먼지를 벗겨냈다.     

 

 한정되어 있다는 것, 그리고 특별해 보인다는 것은 중요하다. 800장 한정이라는 수량과 레코드판의 색깔, 혹은 순금이나 다이아몬드 같은 물질들 역시 중요하며 가치가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것들만이 가치를 지니는 걸까. 한정되어 있는 무언가를 소유하게 되면 특별해진 기분이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껍데기가 아닌 본질에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면 모든 것은 무의미하지 않을까. 한정판이라는 의미보다 이소라의 음악 그 자체가 내게 특별한 것처럼 말이다.     

 

 물과 공기, 빛과 소금 그리고 삶의 가치는 쉽게 잊히곤 한다. 오히려 남들보다 좋은 학교를 졸업해서 좋은 직장을 다니고, 남들보다 돈이 많고, 혹은 남들보다 유명해지는 행위들에 우선적인 가치를 두려 한다. 하지만 특별하다는 가치 판단을 타인이 부여해 주는 세상에서 그런 빼어난 가치들이 언제까지 위대함을 유지해 나갈 수 있을까. 정녕 중요한 가치는 나란 인간의 본질 자체에 있지 않을까.


‘나는 인간적인 존재인지, 누군가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사람인지, 나 자신 스스로 부끄럽지 않게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진정한 가치는 자신의 본질과 그 본질의 향상을 추구하려는 마음에 있는지도 모른다.     

 

 우린 사소해 보이는 모든 가치들을 지나친다. 기억해야 할 점은, 이 지구 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가치를 지닐 수 있다는 사실이다. 지극히 평범하고 사소한 것들에 나만의 가치를 부여할 때, 그것들과 나 자신이 감정적으로 유대감을 맺을 때, 비로소 특별해지고 그 가치가 빛을 발하게 된다. 마치 나의 감성과 이소라의 음악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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