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땐 부모님의 그늘 아래 있었기에, 오빠 언니의 든든함이 그렇게 피부에 와닿지는 않았다.
내가 초 3학년때였던가?
우리 반 짓궂은 남학생들이 나를 괴롭힐 때면 6학년이었던 언니가 우리 반에 찾아와서
"야~ 네가 우리 동생 XX 이 괴롭힌 친구야? 한 번만 더 그래봐~ 혼날 줄 알아"라고 야단쳐줄 땐 든든했었다.
딱 그 정도의 든든함만 느꼈던 나의 유년 시절이었다.
그 시절에는 온 가족이 옹기종기, 특히 형제자매들은 같은 방을 쓰며 자랐다.
나 또한 언니랑 같은 방을 쓰며 살을 비비고 지냈고, 사춘기 예민한 언니의 투덜거림을 그대로 보고 참고 지켜보며 자랐다. 엄마는 언니에겐 항상 새 옷을 사주고 나는 동생이니 물려 입게 해서 언니의 새 옷만 보면 그렇게 입고 싶어서 아등바등 둘이서 싸웠던 기억도 난다. 한 번은 엄마가 언니에게 새 청바지를 사줬는데 언니는 아끼고 안 입고 옷장 속에 넣어 뒀던 그 바지를 내가 먼저 입고 나갔다가 학교 갔다 온 언니에게 들켜서 엄청 싸우고 야단맞고 울고 했던 기억도 있다.
그렇게 누구나 그랬듯이, 여느 집 식구들처럼, 그렇게 아옹다옹 싸우며 자란 우리 자매였다.
그런데 꼭 싸웠던 기억만 있는 건 아니다.
공부를 잘했던 언니는 매일 집에 오면 영어 테이프를 카세트에 넣고 항상 들었다.
영어의 A도 몰랐던 초등학생이었던 나는 나란히 붙은 책상 옆에서 뭔지도 모르고 언니가 들었던 그때 당시 중학교 영어 교과서의 문장과 단어들을 자연히 반복적으로 듣다 보니 머릿속엔 영어 단어들이 자연히 새겨지게 되었고, 그 때문인지 나의 중학교 영어 듣기 평가는 항상 만점이었다. ( * 예전엔 모는 학교의 교과서가 동일했다) 언니가 좋아했던 이문세 노래도 같이 들으면서 자연히 따라 좋아했기도 했고, 언니가 좋아했던 남자 배우들과 남자 스타일도 비슷하게 바뀌기도 했다.
그렇게 유년시절과 사춘기 시절을 언니와 살을 부대끼며 자라면서 싸우고 울고 웃다가 각자 어른이 되고 각자의 사회생활과 결혼생활을 하면서 싸움은 사라지고 같이 아이들을 키우면서 서로 의지 되고 도움이 되는 자매가 되어갔다.
육아에 대한 정보도 공유하고, 학령기의 아이들에 대한 공부에 대한 정보도 같이 나누고 맛집 투어도, 여행도 함께 하곤 했다. 부부 싸움을 하고 나면 친정 엄마에게 털어놓기보다는 서로에게 털어놓으며 때론 "형부"탓도 하다가 때론 "제부" 탓도 하다가 때론 서로의 시어머니를 같이 두고 탓을 하기도 했다.
그렇게 우리는 부모님의 그늘은 점점 벗어나 서로의 그늘이 되어갔다. 연로해진 부모님은 다 커버린 자식들의 그늘로 들어와 자식들의 그늘에서 쉬게 되는 그런 시기가 왔다.
서로의 그늘
얼마 전 엄마가 급성 신부전증으로 응급실로 가셨다 그대로 병원에 입원을 하셨다.
연로한 부모님이 낮이 아닌 새벽이나 밤중에 전화를 하면 가슴부터 철렁 쓸어내리고 받기 마련,
그날도 엄마의 전화를 받고 쓰러지기 직전의 엄마 목소리를 듣고 엄마 집으로 달려갔었었다.
주변 가족 중에 엄마를 병원에 모시고 갈 사람은 나뿐이었기에 다른 볼일을 모두 제쳐두고 엄마 집으로 달려갔었다. 나 혼자는 너무 무서웠던 상황이라 언니에게 긴급 호출을 했고 외곽에 사는 언니였지만 한 번에 달려와 함께 엄마를 모시고 응급실에 갔다.
그 뒤로 입원한 엄마의 상태를 매일 간호사실과 확인하면서,
언니는 장녀답게 고집 스런 노년기의 엄마에게 말하기 꺼려지는 치료나 검사에 대해선 잘 알아듣게 말을 대신 해주었고, 동생인 나는 병원 잔심부름은 도맡아 가며 엄마를 간접적으로 지원해 주고 있다.
엄마의 갑작스러운 병환에 두 자매가 모두 침울해하면 안 되기에, 나는 오히려 더 냉정하게 행동하고 언니를 위로해주기도 했고, 서로서로의 건강을 걱정해 가며 눈물도 흘리기도 했고 때론 웃기도 하고 위로하기도 했다.
연로한 엄마에게 갑작스럽게 온 병환은 어쩜 당연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시기가 왔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을 했다. 그게 서로에게 위로가 되었고 마음이 오히려 편안해지기도 했다. 엄마의 병은 "현대 의학"에 맡기기로 하고 좋은 생각만 하기로 서로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