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혼인서약서에 성과 본관을 쓰는 이유
대부분의 문명권에서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매우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고 여겼습니다. 유럽에서도 그랬지요. 심지어 기독교가 삶과 정치의 중심이었던 시대에는 '이름'을 부르는 행위 자체로 어떤 사람이나 신격의 권위 또는 능력을 빌려온다고 여겼어요. 그래서 놀라거나, 끔찍한 일을 보면 Oh! my God이나 Jesus Christ!라고 하는 거지요. 신의 이름을 불렀으니 안심이 된다는 뜻일 거예요.
그래서 서양의 이름에는 가톨릭이 많은 영향을 미쳤어요. 유럽과 미국에서 아주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이름인 Peter는 예수님의 제자 중 첫 번째 사도이자 그리스도의 교회의 초대 교황으로 알려져 있는 성 베드로에서 유래한 이름입니다. 또한 Matthew, Mark, John 역시 성경을 지은 예수님의 제자들의 이름이죠. 교회 다니시는 분들에게는 익숙할 마태, 마가, 요한복음이 이 이름들을 한국식으로 변환한 거예요. 만약 성경이 지금 번역되었다면 매튜복음, 마크복음, 존복음이 되었겠지요. Andrew, Anna, David, James, Jacob, Michael처럼 우리가 많이 들어본 이름들이 대부분 기독교와 관련된 인물들의 이름입니다.
하지만 서양에서는 대체적으로 이름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습니다. 할머니, 할아버지 등의 선대 조상의 이름을 그대로 쓰거나, 좋아하는 장소/물건/사람의 이름을 사용하는 경우도 있지요. 새로운 의미가 부여된 이름을 스스로 만들기도 하지요. 테슬라의 CEO인 일론 머스크(Elon Reeve Musk)는 아들의 이름을 'X Æ A-12 Musk'이라고 지었어요. 어떻게 읽냐고요? '엑스 아이 에이 투웰브 머스크'에요. 이런 경우는 종종 있어요. 미국의 가수이자 프로듀서인 퍼렐 윌리엄스(Pharrel Williams)는 아들의 이름을 로켓 맨 윌리암스(Rocket Man Willams)라고 지었지요. 미국 NBA의 전 슈퍼스타이자 헬기 사고로 사망한 코비 브라이언트(Kobe Bryant)는 아버지가 고베 스테이크를 맛있게 먹고 지었다죠. 이 인연으로 코비는 2001년 실제로 고베를 방문해 친선대사로 임명된 적이 있다고 해요.
이에 반해 우리나라는 성과 이름을 모두 중요하게 여깁니다. 우리는 정말 다양한 형태로 성과 이름을 존중하고, 귀하게 여겼어요. 앞 선 글에서 서양에서는 성을 surname과 family name의 2가지 형태로 사용하고 이를 크게 구분하지 않는다고 했어요. 우리는 한 가지의 성과 이름만 사용하는 것 같아 보이지만, 사실 본관(本貫), 파(波), 아명(兒名), 관명(冠名), 자(字), 호(號), 시호(諡號), 봉호(封號) 등과 같은 다양한 성과 이름을 (비공식적으로) 사용합니다.
예를 들어 이순신 장군의 경우에는 본관이 덕수(德水)이니 '덕수 이 씨' + 순신이 됩니다. 이순신 장군의 자는 여해(汝諧)이니 (이순신 장군과 친하다면) '여해'라고 부를 수도 있지요. 그리고 돌아가신 이후에 얻게 되는 시호를 이용해 '충무공 이순신'이라는 이름으로도 부를 수 있어요. 나라의 큰 공을 세운 사람에게 부여되는 봉호는 덕풍부원군(德豐府院君)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왜 이렇게 성과 이름을 중요하게 여기게 되었을까요? 우리나라에서 성이란 곧 그 사람의 정체성이자 뿌리를 나타냅니다. 그래서 어떤 것을 장담하거나 강조할 때 '성을 간다'라고 하지요. 국민을 의미하는 백성(百姓)이라는 말도 백가지 성을 가진 사람들이란 뜻이에요. 우리나라에서 결혼한 여성이 남편 성을 쓰지 않는 이유도 그만큼 성과 가문이 중요했기 때문이지요. 특히 결혼은 가문(성)과 가문(성)의 결혼이기 때문에 아내의 성도 중요시했어요. 그래서 서양과는 다르게 왕조 시대에서 외척의 문제가 단골로 등장한 이유가 되기도 했지만요.
※외척(外戚(겨레(척)) : 성씨가 다른 모계의 (8촌 이내) 친족. 주로 왕조의 족보에서 사용됩니다. 그래서 반대말인 내척(內戚)은 아버지 쪽의 친척, 즉 왕족을 의미합니다. 특히 외척 중 특히 왕 혹은 황제의 장인은 국구(國舅)라고 불러요.
그래서 서양에서처럼 성을 함부로 만들거나, 바꾸지 않아요. 그러니 성의 개수도 많지 않습니다. 우리나라의 성은 외국인이 귀화하여 만든 성을 포함하여 5,500개 정도예요. 하지만 100명 이상이 사용하는 성은 200여 개 밖에 되지 않죠. 우리나라와 비슷한 인구수를 가진 영국의 성이 45,000개 이상인 것을 보면 얼마나 성을 귀하게 여기는지 짐작이 가시나요?
심지어 대부분의 서양 국가들이 이름 + 성을 쓰는 것과 달리 우리나라는 성 + 이름 순으로 사용합니다. 나보다는 내가 속한 그룹(가문)을 먼저 드러내는 것이 예의라고 생각하는 것이겠지요. 사실 성 + 이름 순으로 쓰는 국가는 매우 적어요. 극동의 한/중/일 세 나라와 베트남, 캄보디아, 헝가리(?) 정도예요. 이름을 먼저 나타내느냐, 성을 먼저 나타내느냐도 민족의 성향을 알 수 있는 대목이지요.
우리나라에서도 선조(surname)에 대한 인식은 신라시대 때부터 있었어요. 한반도 동남부를 평정한 신라에 뒤늦게 편입된 가야 귀족인 '김(金)씨' 가문은 신라(경주)에 원래 있던 김 씨 가문과 구분하기 위해 신(新) 김 씨라고 따로 구분하는 관념이 있었다고 해요. 이후 지명, 부족명, 관직명 등을 이름에 같이 붙여 '~~ 의 후손'등의 방법으로 가문을 표현했지요.
가문(family name)을 의미하는 '본관'은 고려 시대부터 (공식적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여겨집니다. A.D. 940년 고려 태조 때 귀족이나 호족 같은 유력자들의 가문을 구분하기 위해 전국 군현의 이름과 연결하여 본관과 성씨를 정한 것이지요. 고려시대 초기의 영토가 평안남도와 원산 이남이었기 때문에 본관 역시 이 일대에 대부분 분포되어 있어요.
고려시대에 본관과 성을 본격적으로 사용한 이유는 고려 문종 대에 본관과 성이 과거 제도의 필수 기재 항목으로 지정되었기 때문이에요. 과거를 통해 입신양명하려는 귀족과 평민의 양인 계층이 본관성씨제도를 받아들였기 때문에 전국적으로 대폭 확대된 계기가 된 것이지요. 공부로 성공하려는 풍조는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지요.
이후 이름, 특히 가문의 이름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에 동성동본((同姓同本) 간의 혼인을 금지하는 제도가 생겨났습니다. '성(姓)과 본관(本貫)이 모두 같은 사람끼리의 혼인을 금지하는 제도지요. 이 제도는 꽤 최근까지 유지되었어요. 무려 2005년까지 존속했어요. 1920년대에 결혼을 하기 위해서는 부부가 성과 본관이 다르다는 것을 증명하는 서류를 요구하기도 했습니다.. 1960년에는 민법에 동성동본금혼이 규정되기까지 했어요. 이는 현대 국가의 성문법상 가장 광범위한 근친혼 금지법이기 때문에 외국 학계의 관심을 받기도 했지요.
이 법은 우리 일상생활에도 널리 퍼져 DJ DOC의 히트곡인 '머피의 법칙' 가사 중에 "내가 맘에 들어하는 여자들은 꼭 내 친구 여자 친구이거나 우리 형 애인 형 친구 애인 아니면 꼭 동성동본."이라는 가사가 있고, 미팅에서 성이 같은 사람을 만나면 본관을 물어보기도 하였지요. 1995년 출시된 만화 '두치와 뿌꾸'의 뿌꾸는 고향에 원래 서로 좋아하는 암캉아지가 있었는데 동성동본이라서 헤어졌다는 설정이 있을 정도였어요.
결국 이 법은 2005년에야 겨우 개정되어 근친혼금지제도로 전환하였어요.
근친혼 금지 제도
8촌 이내의 혈족(친양자의 입양 전의 혈족을 포함) 사이에서는 혼인하지 못하도록 하고 6촌 이내의 혈족의 배우자, 배우자의 6촌 이내의 혈족, 배우자의 4촌 이내의 혈족의 배우자인 인척이거나 이러한 인척이었던 자 사이와, 6촌 이내의 양부모계(養父母系)의 혈족이었던 자와 4촌 이내의 양부모계의 인척이었던 자 사이의 근친혼만 금지되었다.
인구가 늘고, 성/본관에 대한 숭상이 더해지면서 본관을 세분화한 '파(派)'라는 개념도 등장합니다. 이러한 개념 때문에 우리는 선조들을 시조(始祖)와 파조(派祖)로 구분하고 있어요. 시조는 맨 처음 윗대의 조상(祖上)으로서 제1세 선조(先祖)를 일컫는 말입니다. 박혁거세나 김알지 같은 분들이 있어요. 그리고 시조 아래 훌륭한 인물이 나오면 분파(分派)가 되는데, 이때의 선조를 파조라고 하지요. 계속해서 훌륭한 인물들이 많이 나오면 지파(支派)가 됩니다. 이렇게 계속 갈라진다고 하여 물갈래 파(派) 자를 씁니다. 일반적으로 ○○공파라고 부르는데, 이는 ○○공 할아버지의 자손들 만으로 족보를 편찬할 경우를 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