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아직도 노예가 있다고요?
어느 누구도 노예상태에 놓이지 아니한다.
모든 형태의 노예제도 및 노예매매는 금지된다.
1863년, 미국의 링컨 대통령은 남북전쟁에서 승리하고, 노예제를 폐지했습니다. 영국에서는 미국보다 이전인 1833년에 노예제가 폐기되었어요. 하지만 이 것은 노예제를 인정하는 법을 폐지한 것 일뿐 여전히 노예는 존재해 왔어요. 심지어 지금도 우리 사회 곳곳에 현대판 노예가 존재하지요.
21세기의 노예는 법적인 굴레가 아닌 폭력이나 채무로 인해 구속되어 있고, 이 상황이 대대로 세습되며 고착화되고 있어요. 노예제도가 폐지된 지 160년이나 지났는데도 말이에요. 왜 강제 노동, 아동 노동, 강제 결혼과 같은 노예들이 없어지지 않는 걸까요?
※ 노예 (奴隸(종(노), 종(예)), Slave / Thrall)
노예는 다른 사람의 소유권 하에 놓아져 강제로 부림을 당하는 사람을 뜻합니다. 노예제 조약(Slavery Convention, 1926)에서는 노예를 "소유권에 관련된 권한의 일부 또는 전부가 행사되는 사람의 상태 또는 조건"으로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국가에서 형벌이나 군역을 제외한 그 어떠한 형태로라도 강제 노역은 곧 노예제로 봅니다. 그러니 직장인들이 회사의 노예라는 얘기도 언뜻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죠?
노예를 의미하는 영어인 Slave는 슬라브인(라틴어 Sclavus, 고대 프랑스어 Sclave)이라는 말이에요. 유럽에서는 9~10세기 경 발칸 반도에서 전쟁이 잦아 많은 포로가 발생하였는데, 포로 대부분이 슬라브인들이었어요. 노예 시장에서 주로 포로로 잡힌 슬라브인들이 거래되면서, 자연스럽게 슬라브인이라는 말이 노예의 대명사가 되었고, 이 말이 유럽의 언어와 아랍어에서 노예를 지칭하는 말로 자리 잡게 되었서요. 그러고 보니 slave라는 용어 자체가 인권 탄압 같네요.
※ 구속(拘束(거리낄(구), 묶을(속)), redeem) : 행동이나 의사의 자유를 제한하거나 속박함.
2019년 런던 남부 램버스(Lambeth) 지역의 가정집에서 30년간 사실상 노예로 살아온 세 여성이 경찰에 의해 구출된 사건이 보도되자 영국 사회는 깜짝 놀랐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수준 높은 선진국으로서 자존심을 가지고 있었던 영국이었기에 더 그랬을 거예요. 사건의 개요는 이렇습니다. 인도 출신의 남성 용의자와 정치적 이념을 같이한 2명의 여성이 집단생활을 시작했어요. 더 놀라운 사실은 이 2명의 여성이 처음 집단생활을 시작하게 된 나이가 69세, 57세였다는 거예요. 아무것도 모를 어린 나이에 갇혀 그렇게 살아온 게 아니라는 거예요.
경찰 조사 결과, 피해 여성들은 정기적인 구타를 당했지만, 신체적으로 속박당하지는 않았다고 해요. 하지만 '세뇌'에 가까운 정신적, 감정적 학대를 통해 도망갈 엄두도 내지 못했어요. 심지어 그들은 휴대폰도 있었고, 외출도 가능했다고 해요. 피해 여성들은 이후 30년간 용의자들의 수발을 들었어요. 반드시 손발을 묶는 것과 같은 상황에서만 노예 상태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 더 충격이었지요. 이 사건이 계기가 되어 영국 정부는 2015년 제정한 '현대판 노예제 (Modern Slavery) 방지법'을 더욱 강화하였습니다. 분노한 영국 정부는 범인들에게 징역 1000년형을 선고했으며, 범인은 교도소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이 법에 의해 기업은 노예 노동이나 인권 침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예방 조치를 해야 할 뿐만 아니라, 노예 발생을 막기 위해 책임과 의무도 부과되었어요. 하지만 아직도 네일숍, 공장, 세차장, 청소업체 등에 '현대판 노예'를 사용하는 사례가 만연하다고 합니다. 그리고 미국과 호주 등 주요 국가의 기업들과 거래하는 기업들은 현대판 노예를 방지하겠다는 서약을 해야 하는 경우도 많다고 해요.
하루의 3분의 2를 자기 마음대로 쓰지 못하는 사람은 노예다.
- 프리드리히 니체
2021년 말 기준 전 세계적에서 ‘현대판 노예’ 상태에 빠진 인구가 5천만 명에 이른 것으로 조사되었습니다. 그리고 점점 노예는 없어질 것이라는 우리의 안일한 기대와는 달리, 노예는 5년 전보다 무려 25%나 증가했어요. 이 조사에 의하면 전 세계의 현대판 노예는 4960만 명이며, 이 중 2760만 명은 강제노동에 시달리고 있고, 2200만 명은 강제결혼에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해요.
물론 코로나 펜데믹이라는 특수한 상황 때문에 일시적으로 증가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을 거예요. 코로나19로 인한 도시 봉쇄 등 강력한 방역 대책으로 하루벌이 노동자들이 일거리를 못 찾았으니까요. 게다가 비교적 가난한 국가의 많은 어린이들은 학교가 문을 닫는 동안 생계 전선에 내몰려 노예 상태에 빠질 가능성이 더 크기 때문입니다. 이런 전염병 외에도 내전이나 전쟁과 같은 무력 충돌도 사람들을 강제 노동에 처하게 하는 배경이 되기도 합니다.
2019년 기준으로 우리나라에도 18만 명이 노예 상태에 빠져 있다고 합니다. 전체 인구의 0.3% 정도(전 세계 180개국 중 117위)가 어딘가에 갇혀, 강제로 일하고 있는 거예요. 주로 남부 해안 지역에 많다고 하네요. 최근에도 지속적으로 적발되고 있는 신안군의 섬노예 사건에 관심을 더 기울여야만 하겠어요. 심지어 신안군의회 부의장도 노예노동 혐의로 입건되었다고 하니, 대한민국에서 벌어지는 일이 맞나 싶을 정도예요.
전 세계에서 인구대비 노예 비율 1위는 바로 북한입니다. 전체 인구의 10.4%가 강제 노동에 종사하고 있다고 해요. 참고로 굵직한 나라들의 순위를 보면 4위 사우디아라비아, 5위 튀르키예, 8위 : 러시아, 34위 인도, 111위 중국이라고 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병역의무의 대체 복무로서 운영되고 있는 사회복무요원제도 역시 현대판 노예제도라고 볼 여지가 있습니다. 사회복무요원은 국가로부터 강제로 소집당해 21개월 동안 군사적 성격과 전혀 관련 없는 기관에서 복무를 해야 합니다. 그 소집대상 역시 신체적,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어 현역복무를 감당할 수 없는 자들이지요. 심지어, 이들에게 최저임금에 미달하는 급여를 지급하기까지 하니 국가가 심신미약자들을 대상으로 치료는 못해줄 망정 오히려 병역의무를 명분 삼아 학대한다는 소리까지 나오는 것입니다. 물론 현역 복무가 가능한 자들의 양심적 병역거부로 인하여 대체복무를 부과받은 경우는 좀 사정이 다르지만요.
왜 현대판 노예는 없어지지 않고 계속 유지되는 걸까요?
사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노예는 거의 모든 문화권에서 발견됩니다. 농경 사회를 통해 이룩한 생산력은 빈부격차와 함께 '노예제'라는 폐해를 가져왔기 때문입니다. 먹을 게 없던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노예가 되었던 거예요. 이런 탓에 노예에 대한 언급은 고대 함무라비 법전과 성경에도 있어요. 우리나라에도 고조선 시절부터 노예가 존재했다고 합니다.
오랜 전통과 역사(?)를 자랑하는 노예제도는 이제 공식적으로 없어졌습니다. 법적으로 노예를 인정하는 나라는 없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노예 사업 역시 거의 사라졌어요. 우리나라를 포함한 전 세계에 만연했던 노예 사업이 거의 사라진 이유는 우리의 인권 수준이 높아졌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노예를 통한 생산 성과에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노예는 당연하게도 자발적으로 일하지 않기 때문에 노예를 감시, 통제, 관리하기 위한 시스템과 인력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산업이 고도화되고 기술력이 들어가는 상품을 주력으로 하는 국가일수록 노예제처럼 다수의 인력에 노동을 강요하기 힘들어 노예는 거의 사라지는 것이죠.
하지만 목화와 같이 플랜테이션(Plantation) 농산물처럼 대량 생산을 통해 낮은 단가를 유지해야 하는 원자재를 생산하는 사업에서 노예제는 큰 이익을 줄 수 있어요.
이런 상황이다 보니 전 세계적으로 노예 사업은 크게 줄어들었지만, 플랜테이션 농산물의 수출로 먹고사는 개발도상국에서는 오히려 노예에 대한 폐해가 더 심각해졌습니다. 강대국들이 더 쉽게 약소국의 원자재를 수탈하기 위해 개발 도상국에게 노예제를 사실상 강요하는 실정이기 때문에 쉽게 근절하기 더 어려운 점도 있을 거예요. 더구나 남북 전쟁 당시 (현재 기준으로) 수천만 원 이상을 호가했던 노예 가격은 현재 평균 90달러 수준으로 낮아졌기 때문에 노예 상태에 빠진 사람들의 인권이나 처우가 더 나빠졌을 거라는 우려가 있습니다.
현대판 노예제 방지법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명료합니다. 누군가를 그 사람의 동의 없이 강제로 어떤 상태에 처하게 하지 말라는 의미일 거예요. 즉, 다른 사람의 인권을 존중하라는 겁니다. 이 말은 신체를 구금하고, 학대하고, 급여를 빼앗고 하는 질이 더 나쁜 짓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행동을 강제로 제어하고, 생각을 하지 못하게 가스라이팅하는 것도 포함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어릴 때부터 숱하게 들어왔던 "까라면 까"식의 정신 무장은 자칫 잘못하면 강제 노동의 범주에 들어갈 수도 있어요.
'나 때는 말이야~'로 대표되는 '꼰대 문화'도 이러한 배경에서 보면 이해가 됩니다. 젊은 세대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윗 세대어른들이 자신들을 마치 '내가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해야 하는 노예 상태에 있다'라고 여기기 때문에 더 반발하는 거라고 보면 너무 오버하는 걸까요?
직장에서도 '부하 직원은 (회사에 있는 동안) 나의 소유물'이라는 인식을 깨고, '부하 직원의 시간을 회사가 빌린다'는 개념이 확산된다면 인권, 특히 강제 노동에 대한 환경이 크게 개선되지 않을까요?
나의 판단은 나의 판단이다.
다른 사람이 이 판단에 대해 권리를 가진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 프리드리히 니체 / 선악의 저편, 도덕의 계보